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워낙 청개구리라서 베스트셀러도 싫어하고, 모두가 찬양하는 작가의 책도 이상한 거부감 때문에 잘 안 본다. 그러던 내가 하루키의 작품에 도전(?)을 했고 지금은 뭔가 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느낌이다. 입문용 작품으로는 좀 아니었지만 확실히 읽기 전과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제목이 비슷해서인지 ‘하루키‘ 하면 이 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개발서 위주로 읽는 한국인들도 이 책은 많이들 읽었고 리뷰도 엄청 많다. 그래서 이런 유명작의 리뷰를 쓸 때면 왠지 에너지 낭비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라 아무도 안 읽을까 봐.


이 책도 남녀의 시점이 교차되는 방식이다. 한 여학생의 응모작인 ‘공기 번데기‘가 문학 신인상 후보에 오른다. 출판사 편집자와 남주는 이 응모작을 날조하여 완벽한 작품을 만들었고, 출간된 작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후 한 변호사가 남주에게 접근하여 ‘공기 번데기‘의 비밀에 관하여 입단속을 하고자 한다. 그 책 내용은 ‘선구‘라는 신흥종교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었고, 여학생은 그 신흥종교 신자의 집안에서 탈출했던 일명 배도자였다. 선구의 비밀을 들춰내는 책의 내용들은 절대 세간에 알려져선 안되는 내용이었고, 남주는 본인이 엄청난 일에 휘말렸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한편 스포츠 클럽 강사인 여주가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한 노부인과 연을 맺는다. 노부인은 폭행을 일삼던 사위 때문에 딸이 자살한 뒤로 사회의 악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섰고, 여주를 암살자로 고용하여 신흥종교 ‘선구‘의 리더를 암살하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암살 현장에서 리더에게 남주의 소식과, 현재의 1984년 세계와, 또 다른 1Q84 년의 세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제 사랑하는 남주를 살리고 자신이 죽을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의 길을 갈 것 인지 선택을 해야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리더의 말을 증명하듯 하늘에는 달이 두 개가 떠있었다.


한 서평가가 깔끔하게 정리한 문장을 빌리자면, 남주는 공기 번데기 소설을 통해 1Q84 세계에 닿았고, 여주는 두 개의 달을 통해 1Q84 세계에 존재함을 알게 되었으며 이 비현실 세계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남녀의 이야기이다. 두툼한 분량답게 다루는 내용도 많은데 저마다 패턴이 비슷비슷하다. 작가는 ‘진실을 알게 되면 고통도 감당해야 한다. 그래도 알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진다. 알면 다칠 테니 조용히 살라는 갑과, 그래도 책임져보겠다는 을의 이야기가 기본 뼈대 같다. 일단 작품이 3권이나 되기 때문에 진도는 느리지만 분량만큼 정성도 대단해서 평점은 우수한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읽고 싶은 마음도, 누군가에게 추천할 마음도 안 든다. 하루키 팬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게 현실과 판타지를 심히도 어중간하게 섞어 놓았고, 특히 3권에서 쌓아올린 탑이 와르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니까 ‘글맛‘ 때문에 읽은 거지, 스토리가 좋아서 읽은 건 아니었다.


어디서 읽었더라. 모든 연습의 최종 단계는 ‘자연스러움‘이라고 들었다. 하루키의 글쓰기는 이 최종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만큼 글이 자연스럽다. 불필요한 문장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글을 추구하는 유명 작가들도 있지만 하루키는 그렇지 않아 인간미가 있다. 그저 그런 문장도 잘 사용해서 잘 쓴 문장을 더 돋보이게 한다. 강조하고 싶은 글에도 가벼운 비유나 은유를 넣을 뿐, 자연스러움에서 절대 벗어나는 법이 없고, 딱히 빼어난 문장을 쓰지 않아도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 마치 화려한 단풍잎으로 단장한 가을산보다, 돌밖에 없는데도 웅장한 그랜드 캐니언 같은 감성이랄까. 사람들이 하루키를 왜 찬양하는지 알 것 같아. 19금 장면만 빼면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을 듯. 왜 일본은 19금 장면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여튼 2권까지는 분위기 진짜 좋았는데 3권부터 한숨 나오기 시작했다. 독자들 사이에서 3권이 문제였다는 말이 많았다. 먼저 열매는커녕 자라지도 않을 씨앗을 심은 것부터 얘기해보자. 그렇게 여러 번 나오던 남주의 엄마 소식은 끝까지 남주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남주도 그렇게까지 엄마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중요하지도 않은 엄마의 기억을 왜 수차례 강조했을까? 그리고 남주와 여주의 집문을 두드리던 수금원의 정체도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NHK에서 보낸 적 없는 직원이란 게 밝혀졌으면 그다음은 누군지도 알려줘야 하잖아. 그런데 그 뒤로 수금원 내용은 쏙 들어감. 이런 것도 맥거핀이야? 맥거핀이 몇 개야 대체.


두 번째로 설명 부족과 개연성 부족도 짚고 넘어가자. 요양원에서 보았던 어린 여주의 분신이 들어있는 공기 번데기는 전개상 매우 중요한 장면인데 그 등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분신이 나와서 어떤 액션을 취한다던가, 리틀 피플이 분신을 조종한다던가, 아무런 설명도 뒤 내용도 없음. 공기 번데기를 딸랑 한번 등장시키고 말 거면 뭐 하러 집어넣은 걸까. 이거 말고도 여학생이 남주의 집을 갑자기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앞으로 뭘 한다던지 이런 보충 내용도 없음. 특히 여주가 만난 적도 없는 남주의 아이를 잉태한 건 정말 막장에 가까웠다. 이런 부실함에 대하여 스토리 작가와 같이 작품을 만드는 웹툰 작가를 예로 들어보자. 스토리 작가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내용이 산으로 가면 독자는 더 이상 웹툰을 안 보거나 아니면 내용보단 그림체 때문에 보게 된다. 1Q84는 후자의 케이스다. 스토리 작가가 갑자기 퇴사를 했는지(따로 있는진 모르지만) 3권부터는 상황의 앞뒤 설명도 없고 개연성도 떨어지면서 스토리에 탄력을 잃었고, 그저 하루키의 필력 때문에 꾸역꾸역 읽었다. 총이 나왔으면 발사가 되어야 한다는 ‘체호프‘의 대사를 넣었으면 말 그대로 해주셔야지, 이 책에서 나온 총들은 방아쇠가 고장 났는지 발사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 이건 정말 마이너스 요소였음.


마지막으로 갑자기 무너진 흐름. 가장 심각했던 건 여주가 임신한 뒤로 그동안 보여주던 액션이 뚝 끊어져 버린 것. 아 진짜 3권에 문제가 많긴 많다. 이 작품이 액션물은 아니지만 초중반에 나오는 여주의 암살 과정과, 소프트볼 선수로 활약했던 과거와, 마셜 아츠를 가르치는 내용 등 작품에 탄력을 주는 씬이 꽤 많았다. 비가 와도 절대 뛰는 법 없는 양반 같은 전개에서 그나마 여주가 완급조절을 해주고 있었는데 그게 하필 멈춘 거다. 남주는 원체 조용하고 재미없는 타입이고, 여주는 은신처에서 방콕만 하니 한없이 루즈해진다. 작가도 그걸 알고 보완 차원에서 변호사 시점의 글을 넣은 게 아닐까 싶은데, 변호사조차 똑같이 방콕하면서 카메라만 찍고 있다. 뭐 하자는 겨 이게. 그렇게 작품은 다 끝나가는데 벌려놓은 판을 어떻게 수습하나 했더니 남녀가 만나 가상세계를 탈출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와 진짜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닙니까, 하루키 센세? 매듭지어야 할 내용이 얼마나 많았는데 싹 다 무시하고 끝내버리는게 어디있습니까. 요리를 많이 하면 당연히 설거지 거리도 늘어나요. 근데 설거지가 하기 싫었으면 요리를 조금만 했어야죠. 사건도 인물도 매번 엄청나게 비중 있는 것처럼 포장해놓고 정작 내용물은 없는 빈 상자였으니 이건 욕먹어도 쌉니다. 할 말이 아직도 많은데 이쯤에서 끝내렵니다. 이게 베스트 작은 아니니까 아직은 봐줄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