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발견]As tears go by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

최근 한국 영화들이 과거의 영화 제목을 가져다 쓰는 경우는 꽤 많다. 조근식 감독의 ‘품행제로’,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등의 영화들은 장 비고나 펠리니의 동명의 영화 제목을 따왔지만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영화다. 이정범 감독의 ‘열혈남아’ 역시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다른 감독들과 달리 이정범 감독은 왕가위의 ‘열혈남아’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애정을 지닌 경우라 할 수 있다. 원래 왕가위의 데뷔작인 88년 영화 ‘열혈남아’를 리메이크하려 했던 감독은 판권 문제 등이 여의치 않아 결국 리메이크는 포기했지만, 제목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설경구가 연기한 복수심에 불타는 건달 재문은 왕가위의 ‘열혈남아’에서 장학우가 연기했던 건달 창파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이정범 감독의 ‘열혈남아’는 내용적으로 왕가위의 영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삼류 건달의 삶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희미한 연결고리를 지닌다.
그러나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는 단순히 내용만으로는 그 영화의 진가를 설명할 수 없는 영화다. ‘열혈남아’는 기존 홍콩 누아르 영화의 스타일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스산한 홍콩의 도시 풍경과 마치 버려진 듯 여러 공간들을 방황하는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이후 왕가위 영화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과 공간의 구성, 감정과 이미지의 홀린 듯한 뒤엉킴의 단초를 제공한다. 왕가위는 인터뷰에서 제작자의 극도의 간섭에 의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며 이 영화에 대해 아쉬움을 피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들에서 드러나는 명징한 왕가위의 인장은 그 자체로도 새로운 시네아스트의 발견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밤거리 네온 사인 아래 대형 비디오 화면 속에서 흐르는 인공적인 하늘의 풍광, 시퍼런 형광등 조명 아래 스텝 프린팅 기법을 사용하여 끊어질 듯 이어지는 포장마차의 처절한 격투 장면은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일반적인 홍콩 누아르 영화의 격한 에너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몽환적이고 사색적인 뉘앙스를 보여준다. ‘열혈남아’를 보고 왕가위를 발견했던 비평가들이 회상하듯, ‘열혈남아’는 심드렁하게 보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리를 고쳐 앉고 여러 번 다시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영화가 개봉한 후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 크게 성공한 ‘열혈남아’로 왕가위는 홍콩 금장상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고, 다음 영화 ‘아비정전’에서 비로소 자신만의 색깔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데뷔작의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탄생한 ‘열혈남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가위 영화의 시작을 여는데 충분한 아우라를 품고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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