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페셜]이성애자, ......퀴어영화를 보다
| 동성애영화가 우리에게 준 것 퀴어영화가 관객에게 선을 보이고, 여기저기서 퀴어담론이 형성된 지 얼마가 지났습니다. 모든 성적소수자를 일컫는 ‘퀴어’ 라는 범주 안에서 편견과 이해 뿐 아니라 몸과 마음에 대한 철학까지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이번엔 범위를 좀 좁혀 ‘동성애’입니다.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 개봉을 앞두고 큰 주목을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호기심,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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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 ‘그’ 혹은 ‘그녀’가 있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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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는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인식한 생물체를 자신의 엄마로 여기고 따라다닌다. 이러한 현상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한다.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접촉에 의해 형성된 상대방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도장을 찍듯 그대로 새겨져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이 각인 된 후에는 이것에 어떤 착오가 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마치 새끼오리가 자신의 친 어미가 아닌 생물체에 반응하며 따라다니는 것처럼. 태어나기를 비정상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육체적, 정신적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어도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패왕별희’의 두지는 처음부터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경극학교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시토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두지를 보호해주고 보살펴준다. 두지는 시토의 애정을 느끼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여성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시토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고자 한 선택이었다. 애정을 느낀 후에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몬스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여자에게는 관심 없다던 에일린이 셀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준 셀비의 행동 때문이었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티나 또한 브랜든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사랑의 감정을 거두지 못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 단순하고도 위대한 행위가 같은 염색체를 가진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직도 재앙일까. ‘베니스의 죽음’의 주인공 구스타프는 획일적이고 이성적이며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동성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타지오를 본 후에 그가 겪는 감정과 혼란은 그의 과거보다 인간적이다. 타지오에 대한 마음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억누르던 인간적인 감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 ‘메종 드 히미코’의 하루히코는 히미코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게이가 ‘된다’. 여전히 히미코를 사랑하는 그가 사오리에게 끌릴 수 있는 이유는 오다기리 조가 대변해줬듯,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도 이해되지도 않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닌가. 혼자서는 완전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한 이 ‘만물의 영장’은 항상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눈길이 멈추는 곳에 발길을 멈추고 그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위의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그들과 우리는 그저 조금 다를 뿐이며 사랑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보듬는 인간애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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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적인 희망과 긍정, 강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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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옛 말이 있다. 같은 뜻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이해의 범위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감정을 전달하더라도 그 표현이 어떠한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러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리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무서운 편견을 흡수하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위험한 흑백논리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많은 영화들 중 정통 멜로를 선택한 영화들은 슬프고 어둡고 참담한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후회하지 않아’의 후반부에는 애증에 눈 먼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생매장 시키려는 극단적인 광기가 그려지는데 이는 하얀 도화지를 온통 검은 색으로 색칠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나쁜교육’에서도 마놀로 신부에 의해 발가벗겨진 엔리케와 이나시오의 특별한 관계는 증오와 복수, 음모나 살인과 같은 이미지로 읽히며, ‘여고괴담 2’의 경우에도 효신과 시은의 동성애는 효신의 투신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이 난다.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 대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광포한 사랑의 파국을 보여주는 ‘주홍글씨’는 물론, 동성애가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죄악처럼 취급받던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토탈 이클립스’ 같은 영화들도 짐짓 동성애를 수장시키는 것처럼 보여 진다. 반면 동성애를 유쾌하게 해석한 영화들, 이를테면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이매진 미 앤 유’ 같은 영화들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는 엄마의 갑작스런 커밍아웃에 혼란을 느낀 세 딸이 동성애에 대한 배타적인 시선을 거두어 가는 과정을, ‘이매진 미 앤 유’는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자신의 감정에 의심을 품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이들에게 건네는 이해와 관용의 메시지 다름 아니다. 동성애를 육욕이 난무하는 탐욕적인 사랑쯤으로 단정 짓던 이들이라도 이런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영화들을 본다면 마음의 문 활짝 열고 싶은 충동이 생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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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만났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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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게이가 아니었다면 삶이 더 쉽지 않았을까?” 강박증에 시달리는 괴팍한 작가 멜빈은 먼 길까지 같이 여행 와서는 게이 화가 사이먼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되돌아온 우문현답. “당신은 지금 당신 삶이 쉽다고 생각해요?” 골든 글러브 6개 부문 노미네이트에 빛나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잭 니콜슨과 헬렌 헌트의 사랑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인 그렉 키니어를 따라가다 보면 호모포비아에 가까웠던 반 휴머니스트이자 이성애자인 멜빈과 게이인 사이먼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둘은 고통 뿐인 인생이 주는 통증을 나누며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영화는 해피엔딩을 향한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행복한 동거를 더 보고 싶다면 케이블 텔레비전을 켜면 된다. ‘섹스 앤 시티’ ‘윌 앤 그레이스’ 같은 미국의 많은 시트콤들은 센스로 충만한 게이를 등장시켜 ‘그들과 친구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게이 친구’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허나, 이것은 로맨틱 코미디 안에 자리 잡은, 보기에만 좋은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 영화 속 동성애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이 세상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기란 ‘이보다 더 어려울 수 없다’. 숫한 어려움들은 동성애자가 자신의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 더 정확히 말해 이해의 폭을 좁히기 어려운 이성애자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서 발생하며 이 정점에는 부모님과 가족이 있다. ‘세상 그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지만 부모님 앞에선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라는 어느 동성애자의 말을 증명하듯 ‘결혼 피로연’의 게이커플 웨이퉁과 사이먼은 부모님을 위해 여성과 위장결혼까지 감행한다.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끝끝내 온전히 이들 연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님의 뒷모습은 감독의 최근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연상시키며 쓸쓸한 뒷 맛을 남긴다. 또한, 이미 이성과 결혼해버린 동성애자들은 ‘파 프롬 헤븐’ ‘디 아워스’에서처럼 스스로와 배우자에게 미련, 후회, 상처를 남기며 생을 꾸린다. 동성애자를 마음에 품고 사랑에 아파하는 이성애자들의 안타까운 사연 ‘체이싱 아미’ ‘내가 사랑한 사람’ 등 다양한 관계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필라델피아’의 마지막 풍경이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부당 해고를 당해 끝까지 어려운 싸움을 벌어야 했던 앤드류의 장례식. 여기저기서 모여든 친인척은 그가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였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따뜻하게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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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즈비언, 퀴어영화를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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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정 . 인 |
레즈비언 퀴어영화를 허하라! 잊지 못할 영화제라 하면,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부천 판타스틱영화제와, 남성적 시선에만 머무르는 기존 상업 영화와 다른 시각의 여성영화제, 그리고 이름 그대로 뭔가 독특한 상상력을 줄 것 같은 퀴어영화제다. 세 영화제 모두 즐거운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었기에 쉬이 잊히지 않는 듯하다. 특히 퀴어영화제는 내게 큰 의미이기도 했다. 레즈비언인 나의 감수성과 사연들을 영상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스무살 그 즈음 퀴어영화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던 것. 발음도 과히 ‘괴상한’ 퀴어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가슴에 탁 와 닿지는 않았다. 게이나 레즈비언보다 더 외래어 같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들이 “너희는 참 이상해!” 라고 내뱉을 때, 이 정치적인 의미의 단어를 이용해 “그래! 우리는 이상해!” 라며 외칠 수 있는 용기와 깨달음은 자랑스럽다. 이런 의미에서 퀴어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단어일지라. 퀴어담론과 퀴어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갈수록 ‘퀴어영화란 무엇인가’ 자문하게 된다. 무엇보다 동성애자에게 퀴어 영화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내 얘기를 따라가 보면 조금 갈피가 잡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의 짐이 있었다. 사랑을 느끼던 그 오묘한 감정, 그러나 그 대상이 나와 같은 여성이라는 것에 아무 말도 못하고 괜히 혼자서 힘들었던 시기였다. ‘왜 나는 동성에게 끌리는 걸까? 나는 ‘비정상’인가? 혹시 내가 변태인 걸까?‘ 등등 우울의 나락에 빠지다가 눈여겨 본 것이 바로 영화였다. 지금이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가 동성 친구를 좋아해요, 어쩌면 좋죠?” 하고 고민 상담도 할 수 있으련만 그 때는 인터넷이 없던 ‘엄혹한’ 시절이었던 게다. 그렇기에 그나마 영화가 동성애자인 나를 부정하지 않도록 도와준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 때 ‘프리스트’나 ‘패왕별희’ 그리고 ‘금지옥엽’과 ‘록키호러픽처쇼’ 등 영화 잡지에 “동성애”가 써있으면 나는 그 영화들을 꼭 보고야 말았다. 물론 세세한 내 감정과 고민들을 이 영화들이 다 풀어주지는 못했지만, 왠지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퀴어영화는 더 이상 동성애자의 전유물 혹은 진기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동성애자는 물론 이성애자에게도 퀴어코드의 영화들은 환대받고 무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내게 이 퀴어영화에 대한 대단한 관심과 인기는 ‘괴현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 동성애 차별 지수가 낮아지지도 않았고, 동성애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 인식은 여전히 낮은 편이기 때문이다. 외국 영화에서나 동성애자 캐릭터를 만날 수 있던 때에 비하면 천만다행 일취월장이지만 말이다.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의 단편 영화인 ‘슈가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국 동성애자로서의 고민을 진솔하게 담아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일정 정도 나이가 차면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결혼의 압박을 받기 마련인데, 동성애자에게 결혼은 이성애자보다 배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한숨이 나온다. ‘후회하지 않아’는 물론이고 ‘왕의 남자’나 ‘번지점프를 하다’ 그리고 ‘로드무비’ 등 동성애적 코드가 담겨진 이 영화들의 사연들은 모두 남성 동성애자, 게이의 이야기라는 점이 못내 안타까운 일이니. 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홍글씨’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는 단지 반전의 장치로만 이용되기 때문에 퀴어영화에서 열외로 두고 싶다. 어쨌든 오호 통재라, 영화란 사뭇 감정이입이 되면 더 감동적이기 마련인데 레즈비언인 나는 언제쯤 제대로 감정 이입된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사랑 이야기든 가슴 절절하긴 마찬가지라지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가 이성애자나 게이들만의 대사가 될 수는 없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꿈이 있듯이, 내게도 꿈이 있다. 내가 원하는 건 레즈비언의 레즈비언에 의한 레즈비언을 위한 영화를 보고 싶은 것이다. 어둠 속에 손을 내밀면 얼마든지 외국의 레즈비언 영화를 찾을 수 있지만, 나는 한국 땅에서 살아 숨 쉬는 레즈비언의 생생한 사연이 담긴 영화를 원한다. 사연은 흐르고 넘치는데 한국에서 퀴어영화로 불리는 영화들은 게이 이야기뿐이다. 현실 속에 레즈비언도 사랑할 줄 안다! 레즈비언에게도 절절한 실연의 아픔이나 상큼하고도 재미있는 사연이 무궁무진하니, 이제는 우리 한국 레즈비언에게도 퀴어영화를 허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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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내일 문화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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