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페셜]잃어버린 한국영화를 찾아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 세계 영화사 곳곳에서 발견되는 ‘뉴웨이브’는 말 그대로 새로운 흐름을 뜻합니다. 도전적인 감독들은 관습화된 저급의 영화에 반동하며 저마다의 저력을 발휘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쯤 그때의 영화를 보고 감탄하지 않으셨나요? 여기서 한 가지, 한국에도 뉴웨이브가 있다는 사실. ‘코리안 뉴웨이브’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아직까지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진 못했지만, 1980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비단구두’의 여균동, ‘길’의 배창호 감독이 오랜만에 관객을 찾아 반가운 걸음을 한 김에, 이들이 활동했던 그때 그 영화들과 감독들을 한번 만나보시죠!
내게로 열려진 또 다른 세상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1994

예술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필생의 걸작을 비유하여 ‘스완송(swan song)’이라 일컫는다. 저무는 백조의 화려한 날갯짓은 죽기 전의 마지막 일탈, 꿈같은 자유와도 상응한다. 94년 개봉했던 ‘세상 밖으로’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이들의 스완송 같은 영화다. 한국 범죄로드무비의 새 지평을 열었던 이 영화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델마와 루이스’ 만큼이나 다이내믹한 모험과 긴장감이 가득하다. 이감되던 중 얼떨결에 탈옥에 휘말려 자유를 얻은 죄수 성근과 경영은 인질을 자청하고 끈덕지게 들러붙는 혜진과 함께 경찰을 피해 도주한다. 앤딩 크레디트와 함께 흐르는 김종서의 노래 가사처럼 ‘내게로 열려진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은 (오드리 햅번이 출연했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한 장면처럼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자유를 실현한다. ‘세상 밖으로’는 장선우, 박광수 감독에게 ‘영화로 세상과 소통하기’를 배웠던 여균동 감독의 처녀작이다. 연기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맨?’ ‘죽이는 이야기’ 등의 작품을 통해 계속해서 사회에 만연된 잘못된 가치들, 자본주의나 인간의 속물근성 등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의 ‘그저 그렇게 사는’ 인물들의 쓰린 삶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카메라 안에 녹여내는 작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과연 그들은 오발탄일까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우리가 흔히 소시민이라고 지칭하는 무리들은 늘 현기증 나는 현실의 그림자 아래에서 신음한다. 또한 그들은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조물주의 오발탄으로 전락한다. 박광수 감독은 고층 건물에 광고 그림을 그리는 두 청년, 칠수와 만수를 통해 비극적인 드라마를 이끌어냄으로써 80년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빈부격차, 연좌제 등의 모순을 꼬집는다. 사실 그들은 단순히 취기 어린 장난을 벌인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투신자살이라도 할 것처럼 몰아붙인다. 영화 속 칠수의 대사처럼, 결국 그들의 삶은 ‘밧줄 하나에 달린 목숨’과도 같았다. 결국 세상이 그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지도 않은 문제를 만들어 강요한 셈이다. 박광수 감독은 사회성 짙은 드라마, 그중에서도 특히 비극을 고집한다. 그의 영화에 사용되는 주요 재료는 이데올로기, 노동문제, 빈민, 분단 등 사회의 깊은 환부다. 덕분에 그의 영화는 언제나 황량하거나 씁쓸하다. ‘칠수와 만수’의 연장선상에 ‘그들도 우리처럼’이 있었고, 분단의 아픔을 강렬하게 채색한 ‘베를린 리포트’가 있었고, 노동문제 고발영화의 대명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있었다. 더 슬픈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바로 그것이 흥행과는 상관없이 독하게 외길을 가는 그의 뒷모습이 여전히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남은 것은 눈물 뿐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젊은 날은 기뻤다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영화를 통해 한 인간의 삶과 사랑을 훔쳐본다는 것은 굉장한 재미다. 우리는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을 통해 떼 묻지 않은 순수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영민은 대학 시절, 연극을 공연하는 아름다운 여대생 혜린에게 한눈에 반한다. 기둥 뒤에 숨어 “저,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차나 한 잔 같이 할까 해서요”라는 유치뽕짝 접근멘트를 연습하는 그는 ‘완벽한 소심남’의 전형이지만, 연정 가득한 편지와 순정만화 못지않은 순수한 사랑을 무기로 끈질기게 구애한다. 하지만 애틋함 조성을 위해서일까, 그녀는 거절의 웃음 ‘호호호’ 남기곤 홀연히 떠나버린다. 이혼녀가 되어 돌아온 혜린은 비로소 영민의 품에 안겼지만 그 행복도 잠시, 또다시 그녀는 눈물만 남긴 채 영민을 떠나버린다. 그래도 그들의 젊은 날은 충분히 기뻤다. 감히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영민이 그녀를 조건 없이 사랑했고,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소리를 배제한 화면은 절절한 울림을 만든다. 그러나 사실 배창호 감독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정석보다는 변주에 가깝다. 물론 그가 작품에 따라 큰 편차를 보여준 것이 사실이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 배창호 감독은 주로 로드무비 형식을 이용하여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
황홀한 리얼리즘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산 속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세 명의 스님에 대한 영화다. 노스님 혜곡은 자신의 입적을 예상하고 있고, 젊은 스님 기봉은 속세에 두고 온 어머니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도를 깨우치기를 열망한다. 동자승 해진은 어머니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고아로 태어나 산사에서 성장한다. 혜곡 스님의 죽음으로 인해 기봉과 해진은 작은 깨달음을 안고 각자의 길을 걷는다. 배용균 감독은 우주처럼 광활한 풍경을 응시하면서 번뇌를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두말할 것 없이 황홀하다. 어떠한 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은 자연 풍경과 비전문배우 날 것의 표정들은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관념적인 대사들로 점철된 영화에서도 리얼리즘을 발현한다.
이 작품으로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그랑프리) 부문에서 주목받았던 배용균 감독은 1995년 신작 ‘검으나 희나 땅에 백성’을 갖고 돌아왔다. 한민족을 이야기 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어둠에서 시간과 장소가 멈추고 있는 모습들을 자신의 미학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연출은 물론 각본, 촬영, 편집, 미술, 기획을 모두 혼자서 해내는 ‘완전 작가’의 면모를 지닌 배용균 감독의 신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상승에서 나락까지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 1989
막강 그룹에서 가장 촉망받는 사원 김판촉은 물불 가리지 않고 성공을 향해 달려온 덕택에 날이 갈수록 각광 받으면서 승진을 거듭하고 유미사(社)의 영웅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런 상승도 잠시, 경쟁 회사는 혁신적인 생산을 통해서 유미사의 시장 점유율을 완전히 무너트린다. 김판촉은 결국 지방 대리점으로 떨어지고, 흥분한 그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김판촉을 연기하는 이는 ‘국민배우’ 안성기다. 대중들에게 늘 부드러운 이미지로 각인되던 그는 이 영화에서 성공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악마 같은 모습을 연기한다. 결국 ‘성공시대’는 성공에 눈이 먼 김판촉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냉혹한 시장 논리와 파행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작품. 장선우 감독은 정식 데뷔작인 ‘성공시대’ 이후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4편의 작품들을 찍었다. 박영한의 ‘우묵배미의 사랑’,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고은의 ‘화엄경’,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까지. 저마다 이야기 하는 바도 다르고 모양새도 서로 다른 작품들이지만 장선우 작품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 강한 개성을 표출했다. 이후의 작품들, ‘꽃잎’‘나쁜 영화’‘거짓말’‘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늘 논란의 대상이 됐다.
서울의 봄날은 간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는 덕배, 춘식, 길남은 각자 지방에서 상경한 촌뜨기지만 눈 깜빡하면 코 베어가는 세상에 당하지 않으려 악착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냉정한 도시 서울은 그들에게 끝까지 웃음을 선사하지 않는다. 잔인한 서울에서 세 남자는 유일하게 서로를 믿으면서, 소박한 꿈을 갖고 삶을 ‘버텨내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상의 수상한 질서들뿐이다. 러닝타임 내내 꾸준하게 절망을 향해 가고 있는 정서는 다소 불편하지만, 영화 속 모습들이 1980년대 현실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절망을 맛 본 세 친구가 어설픈 표정으로 찍은 단체 사진은 현재에도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장호 감독은 1974년 최인호 원작 소설 ‘별들의 고향’을 영화화하여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같은 해에 ‘어제 내린 비’도 히트를 기록하면서 당대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지만, 그 뒤 계속되는 실패를 맛봐야 했다. 암울한 세월을 청산하고 ‘바람 불어 좋은 날’로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어둠의 자식들’ ‘바보 선언’ ‘어우동’ 등을 연출하며 흥행과 비평을 모두 만족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1995년 ‘천재 선언’ 이후에는 연출 활동을 하지 않았다.
뜨거운 심장으로 가슴을 울리다
홍기선 감독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1992
밑바닥 인생, 항구도시 목포에 온 절름발이 떠돌이 김재호는 악덕소개인에게 걸려들어 ‘멍텅구리’라 불리는 노예선 새우잡이 배를 타게 된다. 거기엔 가출 소년, 원양어선의 마도로스를 꿈꾸던 길재, 사기 전과자 정복춘, 나이 들어 오갈 데 없는 천씨 등이 타고 있다. 그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잡초 마냥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세들이다. 그들을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건 손바닥 만 한 라디오 뿐.
소외된 무리에 대한 고발정신, 작가의식 짙은 연출솜씨, 리얼한 영상을 선보인 홍기선 감독은 2003년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선택’으로 부산국제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했다. 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를 만드는 홍기선 감독은 기교와 장식은 배제하고 진심과 묵직함으로 리얼리즘을 전달한다. 그의 눈을 통해 전해지는 아웃사이더들의 애환은 우리의 가슴을 강하게 때린다. 그는 곧 인권문제를 다룬 옴니버스 영화 ‘세 번째 시선’으로 우리 곁을 찾을 예정이다.
낭만의 시대
황규덕 감독의 ‘지금 우리는 사랑하고 싶다’ 1991
감싸 안기 벅찰 만큼 예민했던 시절, 넘치는 몽상처럼 사랑도 그리웠다. 가짜 코피를 쏟아 선영의 손수건을 입수한 정현은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그녀와 서서히 가까워진다. 독서실에서 싹튼 로맨스는 어느 덧 빵집을 지나 한강으로까지 이어진다. 첫사랑의 순수함처럼 온전한 것이 또 있으랴.
황규덕 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로 시작하여 1989년 제작, 기획, 각본, 연출을 맡은 ‘꼴지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로 데뷔했다. 이 작품으로 영평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로카르노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는다.
황규덕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우리의 유년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출연했던 60명의 아마추어 연기자들을 모두 주인공으로 묘사했던 데뷔작 ‘꼴등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와는 달리 차기작 ‘지금 우리는 사랑하고 싶다’는 장르에 충실한 하이틴 로맨스였지만 고등학생들의 순수한 모습을 담은 점은 공통점이다. 2004년 ‘철수와 영희’로 이어지는 황규덕 감독의 영화는 그때 그 시절을 반추하며 살며시 미소 짓게 만든다. 아! 낭만이구나!
사랑해, 미영
이명세 감독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0
국제적 공통 관심사인 ‘사랑’. 사랑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사랑법일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젊은 부부의 일상을 빌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풀어나간다. 영민은 미영을 사랑한다.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을 했다. 싸웠다 화해했다를 반복하며 알콩달콩 잘 산다. 여기까지는 색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랑이야기라고? 그렇지만 걱정 말 것. 이런 평범함을 독특하게 연출해내는 것이 이명세 감독의 특기이니까.
1988년 ‘개그맨’으로 데뷔한 이명세 감독은 90년대에는 비현실적인 스타일로 주춤했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재기에 성공하였고, ‘형사’에서는 전혀 색다른 영상미를 시도한다. 이명세 감독이 추구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칫 밋밋할 뻔 했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도 애니메이션 기법이 사용된 신선하고 재치 있는 화면이 지루함을 날려버린다. 자신만의 장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한 단계씩 진화발전해가고 있는 그가 앞으로 어떤 새로움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대학내일 문화팀

 

출처 : http://www.naeilshot.co.kr/news/view.asp?num=2150&Sfield=&Sstr=&page=1&cate_news=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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