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페셜]부산국제영화제 특집 03

기다렸던 ‘그들’의 영화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신작
영화제가 주는 가장 큰 행복은 누가 뭐래도 ‘다채로운 영화를 볼 수 있는 것’,
그 중에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 하나 가슴에 남겨주고 홀연히 떠나버렸던 감독들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로 암시하기
플랑드르 Flandres
1999년 인간 내면의 본성과 폭력을 처연하게 드러낸 영화 ‘휴머니티’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부르노 뒤몽 감독은 ‘29팜즈’를 거쳐 ‘플랑드르’로 다시 한번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이미지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기를 원하는 그는 이번 영화 ‘플랑드르’에서도 절제된 장면들만으로 이야기 하고자하는 본질을 암시할 뿐이다.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에 사는 드메스테르는 같은 동네의 바르브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다른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플랑드르의 청년들은 곧 군대에 소집되어 전쟁터로 나간다. 그들은 살인에 대해 점차 감각이 무뎌가고 학살과 윤간을 일삼는다. ‘플랑드르’의 무대는 크게 둘도 나뉜다. 농장이 펼쳐진 플랑드르의 자연과 황량한 사막이다. 사막의 건조함과 플랑드르의 푸른 벌판이 대조를 이루며 인간 내면의 본성, 욕망과 폭력성에 대해 망연히 이야기한다. 음악의 삽입이 한 곡도 없으며 자연히 생겨나는 소리들을 간혹 극대화하여 드러낼 뿐이다. 감독은 ‘휴머니티’에 이어 이번에도 실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비전문배우를 캐스팅하였다.

‘복수’ 끝내고 찍은 ‘코미디’ 한편
IT의 황제 The Boss of it All

선의 3부작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를 끝내자마자 섬뜩한 복수를 선보였던 ‘도그빌’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도그빌’의 연장선상에 있는 ‘만덜레이’를 끝내고 연출한 신작 ‘IT의 황제’는, 코미디다! 한 IT회사의 소유주가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심한다. 까다로운 바이어부터 시작해 분명 심각하게 분노할 직원들 등 해결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회사 창립 이래 단 한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던 사장이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하지만 감춰진 진실이 있다. 소유주가 곤란한 결정 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은 피고용인인 척하고, ‘사장’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만든 것. 어쩔 수 없이 무명 배우를 고용해 사장 역할을 시키는데 이 배우, 양심과 주목받고 싶은 욕망과 자기실현 욕구 등의 갈등을 경험하며 일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다.
항상 심각하게 자리 잡고 앉아 깊게 생각한 후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는 여전히 인간의 이중성 혹은 악마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이전작들에서 그것을 비극 속에 풀어냈던 것과는 달리 신작에서는 희극으로 풀어낸다. 또한 이 스토리를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가 직접 등장해 해설을 해주는데, 그는 “내 모습이 보여도 별로 신경쓰지 말기 바랍니다” 라며 자신이 이제까지 선보였던 ‘영화형식의 파괴’까지 희극화하는 탁월함을 선사한다.
그래도 드실래요?
패스트푸드의 제국 Fast Food Nation

1995년,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낭만이 응결된 최고의 청춘영화였다. 젊은이들은 ‘비포 선라이즈’를 잊지 못했고, 9년 후 ‘비포 선셋’을 잉태한다. 하지만 그를 낭만과 로맨틱한 청춘만을 다루는 감독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증거자료가 부산에 왔다. 에릭 슐로서의 논픽션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대기업의 실상을 폭로한다. ‘더 빅 원’의 성공으로 호황가도를 달리던 패스트푸드사가 햄버거에서 다량의 대장균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중견간부인 돈 핸더슨을 공장으로 파견한다. 영화는 존 핸더슨, 햄버거 공장에 취직하기 위한 멕시코 불법 이민자, 체인점 아르바이트생 등 직접 혹은 간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들 간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소재의 변화는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스쿨 오브 락’까지 주류와 비주류를 오가며 자유자재로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패스트푸드의 제국’으로 당당히 또 하나의 계단을 올라섰다.

헤드윅은 죽지 않는다
숏버스 Shortbus
지금으로부터 5년 전, ‘헤드윅’의 출연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존 카메론 밋첼은 감독과 주연을 겸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고,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의 파워풀한 사운드트랙은 전 세계 영화인들을 뜨겁게 달궜다. 21세기형 ‘록키 호러 픽쳐쇼’의 탄생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전설로 회자되던 그가 두 번째 장편 ‘숏버스’로 돌아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다. ‘헤드윅’의 정서가 절망과 고독에 가까운 회색빛이라면 ‘숏버스’는 좀 더 밝고 경쾌한 푸른빛에 가깝다. 남편과 관계를 맺을 때 한 번도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성상담가 소피아는 우연히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섹스 클럽 ‘숏버스’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인생과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소피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존 카메론 밋첼 감독은 결국 ‘섹스=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이 소통을 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섹스가 필요하며,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자 사랑이 형상화된 최상의 상태라고 말이다. SM, 게이커플, 성기노출, 집단성교 등 충격적인 영상이 계속해서 펼쳐질지라도 그리 놀라지 마시라. 존 카메론 밋첼 감독의 최고 장기인 황홀한 사운드트랙과 도시를 수놓는 건물들의 찬란한 불빛,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마지막 엔딩 신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존 카메론 밋첼은 죽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그의 피와 살을 태우고 있다.
황혼 속에 찾아온 한 줄기 빛
라이트 인 더 더스크 Lights In The Dusk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어둠은 걷히고’ ‘과거가 없는 남자’에 이은 핀란드 3부작의 마지막 편 ‘라이트 인 더 더스크’로 부산을 찾았다. 우리에게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로 친숙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특유의 유머와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짐 자무시 감독은 그의 전작 ‘과거가 없는 남자’를 ‘슬퍼서 웃기고 재밌어서 눈물 난다’고 표현했다. 짐 자무시 감독의 말처럼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를 지배하는 감성은 체념에 가까운 고독이나 슬픔에 가깝지만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법은 굉장히 유머러스하다.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전작 ‘과거가 없는 남자’와는 다르게 ‘라이트 인 더 더스크’에서는 타인에 의해 짓밟히고 단절되는 한 남자의 현실적인 삶을 조망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던지는 냉소와 카리스마 넘치는 대사는 여전하며 최소한의 동선과 최소한의 장식으로 깔끔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거장의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과거가 없는 남자’가 즐거운 해피엔딩이라면 ‘라이트 인 더 더스크’는 제목의 뜻인 ‘황혼의 빛’이 암시하는 것처럼 미세하지만 강렬한 희망으로 끝맺는다. 우울하고 고독한 황혼 속에도 마주 잡을 수 있는 손, 따뜻한 온기와도 같은 한 줄기 빛이 있다는 감독의 메시지가 모든 이의 가슴을 녹인다.
Hope There’s Someone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
I Don’t Want to Sleep Alone
‘구멍’ ‘흔들리는 구름’ ‘천교는 보이지 않는다’ 등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차이 밍량 감독의 작품은 외로움이란 정서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대면하면서도 좀처럼 소통하지 못한다. 그런 군상들을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아주 긴 호흡으로 바라본다.
차이 밍량감독의 고국이기도 한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처음 만드는 그의 신작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 역시 집요하게 인간의 외로움을 좇는다. 그의 영화에서 지배적으로 등장하던 물은 여전히 요상한 비린내를 풍기는 듯하고, 인물들의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며, 인물들이 속한 대부분의 공간들도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제목,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를 곱씹어보자. 제목에서부터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진심으로 누군가 내게 머물러 달라고 간절하게 되뇌는 것이다. 안식처라고 여겼던 이가 떠나자 그를 해치려다가 결국 손을 놓아버리고 마는 남자, 키스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남녀. 그들 셋이 함께 뗏목을 타고 유영하는 마지막 쇼트는 흐르고 흘러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뼈저리게 도착한다.
아무도 모르던, 삶을 긍정하다.
하나 More Than Flower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해낸다고 생각하는 말은 ‘촌철살인’이 아닐까한다. 세세한 감정들을 모두 들추어 드러내지 않고도 어떤 짧은 순간이나 과장되지 않는 표현으로써 감독 스스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아주 힘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말이다.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부터 ‘애프터 라이프’를 거쳐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는 ‘아무도 모른다’까지 상실, 사랑, 죽음, 만남 등을 이야기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보통 나른하고 평화롭게 인물들을 찍어내지만 가벼운 느낌보다는 다소 무거운 감정으로 관객들의 가슴에 남아 왔다. 하지만 그의 최근작 ‘하나’는 분명 밝다.
영화사 ‘쇼치쿠’에서 제작된 시대극 ‘하나’는 내내 가볍다. ‘하나’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원수를 찾아다니면서 어느 한 마을에 정착한 사무라이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삶의 지혜를 깨달아간다는 이야기다. 소박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들은 그 자체로 유쾌하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따라 가면 어느새 ‘행복’이 가슴에 남는다. 그러니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눈물 흘린 이들이여, 이제는 ‘하나’를 만나면서 가벼이 미소를 띠워보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삶을 분명 긍정하고 있으니.
세상의 바꾸고자 하는 열정과 그대뿐인 ‘나의 삶’
악어 The Caiman
‘나의 일기’ ‘아들의 방’으로 국내에 알려진 난니 모레티 감독의 신작 ‘악어’는 그의 이전작들처럼 감독의 이야기를, 깊은 열정의 폭 안에 담아낸다. 중년의 B급영화 프로듀서 브루노는 일과 가정, 자신의 삶을 채우고 있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해야 하는 고달픈 시점에 놓였다. 호평을 받긴 하나 자꾸 망하는 영화만 제작하는 버릇을 버려야하는 것이 일에 관한 것이라면, 사랑스런 두 아이에게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와의 별거 사실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 가정에 관한 것이다. 그러던 중 브루노는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정부에 대한 비판이 담긴 시나리오를 발견하고 또 다시 유혹을 떨치지 못한 채 제작에 돌입한다. 브루노가 이 시나리오에 쏟는 열정은 난니 모레티 감독이 ‘나의 일기’에서부터 베를루스코니 정부를 비판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는 한 인간이 가진,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적 열망의 아름다움과 그림자를 강렬하게 제시하고, 그 위에 평범한 삶 속에서 생겨난 사랑의 상처와 자기치유 과정을 옅지만 진솔하게 채색한다. “사는 건 힘들지 않아. 늘 쉽게 살아왔기 때문에. 사랑도, 이야깃거리도, 영웅도 없어. 나는 그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네.” 마지막, 흐를 듯 말듯 눈물 맺힌 주인공을 바라보면 열정과 좌절이 공존하는 인간의 생이 가져다주는 만감을 맛 볼 수 있다.
대학내일 문화팀


 

출처 : http://www.naeilshot.co.kr/news/view.asp?num=2127&Sfield=&Sstr=&page=2&cate_news=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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