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발견]수확의 계절

테렌스 맬릭감독의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 1978)’
수확의 계절이다. 수확에 관한 여러 가지 이미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인 이미지는 끝없이 펼쳐진 너른 평야다. 곡식이 영그는 누런 들판은 풍요로움에서 비롯되는 안도감과 평화를 약속한다. 이렇듯 수확의 장면을 담고 있는 영화는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압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영화가 있다. 테렌스 맬릭 감독의 ‘천국의 나날들’이 그것이다.
일 년에 수 편의 영화들을 양산해내는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길게는 몇 년에 한 번, 심지어는 십 여년에 한 번 꼴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과작의 감독들이 있다. 일년에 적어도 두어 편씩 작품을 내놓는 김기덕 감독이나, 일본의 구로사와 기요시 같은 감독들에게 영화를 만들어내는 속도는 어쩌면 그들 영화 세계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온갖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것이다. 그러나 다작이 영화의 질과 곧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몇 십년 동안 단 몇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도 양에 비할 수 없이 풍성한 영화적 생산력을 자랑하는 감독들이 있다. 미국 감독인 테렌스 맬릭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1973년 ‘황무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고작 네 편의 장편을 만든 그의 영화 중에서도 1978년에 만든 두 번째 장편 ‘천국의 나날들’은 그저 영화에 불과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감각적 체험을 선사하는 영화다.
191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천국의 나날들’은 떠돌이 노동자인 빌과 그의 연인 애비가 도시를 떠나 텍사스의 거대한 농장에 흘러들면서 시작된다. 영화는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키는 대신,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과 오로지 자연광만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촬영으로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여지는 광활한 밀밭의 풍경을 재현한다. 대사를 극도로 제한하는 테렌스 멜릭의 연출 방식은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은 그의 영화에 정취를 더한다. 이야기가 지극히 느리게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불평을 잊게 만드는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이미 이야기를 넘어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황혼의 들판을 배경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서 있는 밀 베는 기계, 마치 밀밭과 하나가 된 듯한 일꾼,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무성한 밀밭의 클로즈업에서 끝없는 평야에 고즈넉이 서 있는 농장주 저택의 롱 숏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의 향연은 상영시간 내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에릭 로메르의 초기작과 트뤼포의 영화를 촬영했던 촬영 감독 네스토르 알멘드로스의 엄격한 자연주의적인 시선, 엔니오 모리코네의 낭만적인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70mm 필름으로 찍혀진 ‘천국의 나날들’은 영혼이 담긴 자연의 이미지를 담은 가장 뛰어난 영화 중 한 편으로 기억될 만 하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출처 : http://www.naeilshot.co.kr/news/view.asp?num=2097&Sfield=&Sstr=&page=1&cate_news=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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