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순간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면 그건 어떤 장면일까? 영화 속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들은 대개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장면일 때가 많다. ‘비포 선라이즈’처럼 시종일관 대화로 시작해서 대화로 끝나는 영화도 충분히 로맨틱하다. 특별한 스킨쉽이나 격정적인 고백이 없이도 둘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의 공감대, 제스처가 그들의 감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느와 제시는 하루 동안의 여행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비엔나 곳곳을 걸어다닌다. 산책은 이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행위 중 하나다. 그러한 산책의 순간들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연인이거나, 혹은 맺어질 수 없는 큰 장벽이 가로놓여 있을 때 역설적으로 더욱 애틋해지는 법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에서 언제나 연인들은 산책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어떤 풍파를 겪더라도 남녀가 산책하는 순간만큼은 어떤 무언의 감정이 영화의 대기를 휘감게 마련이다. ‘산의 소리’에는 그런 짧지만 로맨틱한 산책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시부모님을 모시고사는 기쿠코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다. 남편은 시종일관 바람을 피우고, 그녀는 그런 남편을 보면서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런 그녀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다독여주는 사람은 그녀의 시아버지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퇴근하는 시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기쿠코는 좁은 골목길을 달음박질쳐 그의 곁에 선다. 쓸데없는 잡담을 하는 순간에도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고, 웃는 모습은 어딘가 들떠 보인다. 이 영화에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결코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두 남녀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감정의 추이를 따라간다. 몇 번의 마중과 몇 번의 짧은 산책. 그녀를 위해 소라를 사 오고, 그녀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화초를 돌볼 수밖에 없는시아버지의 마음은 복잡하다. 아이같이 천진한 기쿠코에 대한 시아버지의 마음은 우연히 사게 된 어린아이 탈이 은연 중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애지중지하는 행동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녀를 아끼는 자신의 마음으로 인해 기쿠코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꾹 참고 지속하는 건 아닌지,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어 그녀를 불행하게 했다는 생각이 남자의 가슴을 저민다. 마침내 아이를 지운 기쿠코는 이혼을 결심한다.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난다. 겨울의 탁 트인 공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벌거벗은 가로수 길을 산책한다. 불행한 생활을 억지로 계속하게 만든 것 같아서미안하다는 시아버지의 말에, 기쿠코는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아버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러나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나란히 산책할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