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음악처럼]장마, 레니 크레비츠, 그리고 그녀
|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Boxing Hele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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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됐답니다. 우산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비가 오는 걸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요즘 내리는 비는 왠지 반갑습니다. 빗물에 씻겨 깨끗해진 거리를 보면 뒤죽박죽이던 머릿속도 어느 정도 정리되기 때문일까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제겐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녀는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했지요. 그래서 비 내리던 날 그렇게 떠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은임, 수많은 시네필들을 가슴 설레게 했던 그 이름. 팬들의 표현을 빌려 저는 ‘FM 영화음악’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는 사이비 청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사망을 계기로 여기저기 남아있던 흔적들을 반추하면서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Boxing Helena)’에는 살아생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It ain't over, til it's over’가 흐릅니다. 레니 크레비츠의 이 주옥같은 넘버는 그루브한 리듬과 허스키한 목소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매력적인 곡이지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뜻을 가진 이 노래는 마지막 방송 오프닝을 장식하기엔 더 없이 알맞은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제니퍼 린치 영화의 기괴함을 떠올린다면 다소 오싹해집니다. 맥 라이언 주연의 동명 로맨틱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남자의 집착이 끝을 보는 영화거든요. 자우림의 노래 ‘밀랍천사’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이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헬레나(쉐릴린 펜)라는 여자를 짝사랑하게 된 의사 닉(줄리안 샌즈)은 그녀를 곁에 두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헬레나의 사지를 절단해 예쁜 의자에 앉혀놓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죠. 이러한 엽기적인 행각이 벌어지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과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 푸치니의 ‘라 보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5번’ 등 클래식이 주가 되어 흐르는 음악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답습니다. 클래식의 드라마틱한 연주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모양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와 댄스 비트를 혼합시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던 이니그마(enigma)의 ‘sadness’ 또한 세계에서 최고로 섹시한 음악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입니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음악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닉의 행동에 질려 도중에 영화 보는 것을 그만 두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찌 되었든 앞으로 장마가 올 때면 반사적으로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장마는 정은임 아나운서를, 그녀는 레니 크레비츠의 음악을, 레니 크레비츠의 음악은 이 영화를 떠오르게 만드니까요. 언제 끝날지,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로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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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엽 학생리포터 schkolade@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