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예술 작품이 절대적이고 찰나적인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청춘을 노래하는 것은 그래서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청춘이 지닌 절대적 아름다움은 오로지 그 순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라는 청춘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누구나 통과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 찬란함을 결코 알지 못하는 ‘젊음’이 내뿜는 아름다움은 실로 막강하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음’은 한 소년의 모습에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 병든 한 작곡가의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그리는 영화다. 고귀한 정신과 이성적 판단의 산물로서의 예술을 주창하던 작곡가 아센바흐 앞에 불현듯 나타난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는 그가 이제껏 신봉하고 있던 예술관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예술가로서 인간은 일반인이 획득하지 못하는 강인함과 자기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소년의 아름다움 앞에서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린다. 이탈리아 귀족 출신이자 게이였던 비스콘티 감독은 예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이중적 감정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아름다움은 찰나적이지만 동시에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성숙도와 비례하는 예술의 영속성을 굳게 믿었던 중년의 병든 예술가에게 찾아온 뒤늦은 깨달음은 계속해서 그를 회한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아센바흐는 오로지 타치오가 속해 있는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부질없는 행동을 감행한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그는 해변에서 뛰노는 타치오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나 타치오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이미 아센바흐가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타치오는 창백한 아센바흐의 모습에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는 진땀으로 인해 흘러내리는 염색약과 벗겨지는 화장으로 엉망이 된 아센바흐의 절실한 표정과, 그림처럼 아름다운 타치오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바다 속으로 들어간 타치오는 불현듯 한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키고, 그러한 타치오의 몸짓을 따라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던 아센바흐는 그대로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다.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키는 타치오의 실루엣은 비단 아센바흐 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결코 가둘 수 없는 찰나적 아름다움의 빛이다. 비스콘티 감독은 그 찰나적 아름다움을 환영으로나마 붙잡아 둘 수 있는 예술로서의 이미지, 즉 영화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보여주는 예술가의 이중성은 성숙해가는 동시에 아름다움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하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