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라빠르망(The Apartment)’의 앨리스

통화를 하다 끊으려는 찰나 슬그머니 ‘그래서’가 따라붙었다. 친구는 이 부사를 벌써 다섯 번쯤 연달아 사용하고 있었다. 가끔 지하철 좌석 앞에 서있다 엿들은 여학생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래서’가 과도하게 등장하곤 했다. 아직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 혹은 끝낼 수 없다는 의미, ‘그래서’로 이어진 것은 대부분 그런 사랑이야기였다. 너무 소중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꼭꼭 숨겨 혼자만 알고 싶은 법인데 사랑에 있어서만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누군가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쯤은 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사랑의 정말로 시작되는 지점이다. ‘사랑일까 아닐까’ 사이를 오가던 이성적 사고는 입으로 의문을 뱉는 순간 평정을 잃고 감정을 증폭시킨다. ‘말을 하면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생겨서 그 마음을 또 말하고 그 마음을 또 말하다보면 또 다른 마음이 생겨요.’ 고현정이 울먹이며 연기했던 드라마 ‘봄날’의 대사처럼 사랑은 말 한대로 자꾸만 커져가고 뱉는 순간 폭주해버려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앨리스가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고 리자에게 털어놓던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짝사랑이라면 뱉지 않는 편이, 터뜨리지 않는 편이 그나마 감당하기 쉬울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내뱉었고 이내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순응하게 된다. ‘정말 난 사랑에 빠졌어.’
그 순간 과학시간에 배웠던 기체의 승화작용을 닮은 사랑의 승화가 시작된다. 형체 없이 부유하던 마음은 묵직한 덩어리가 되어 가슴 밑바닥에 쿵 떨어진다. 그렇게 무거워진 사랑은 떨어지면서 가슴깊이 아픔을 남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데, 혼자서 시작했고 혼자서 키웠으며 또 혼자서 끝내야 했다.
나프탈렌 덩어리가 공기 중에 솔솔 피워져 어느새 사라지듯 그녀가 지닌 사랑도 다시 상념 따위로 흩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웬만해서 빠지지 않는 지방덩어리처럼, 엉겨 붙어 불어난 마음은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화두에 상관없이 ‘그래도’로 이어가고 싶고, 말하고 싶어진다 해도 꼭꼭 숨겨야 한다. ‘그 사람을 좋아하나봐’를 뱉어버리면 틀림없이 잠식되고 말테니까. 그러기 전에, 비대해진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숨쉬기 힘들어지기 전에 그저 사랑일랑 없는 듯, 모르는 듯, 그렇게 꼭꼭 숨긴 채 살아라. 나조차 찾지 못하게 꼭꼭 숨어 버려라.

이수빈 학생리포터 fantastic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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