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칸영화제에서였다. 당시 기자 신분으로 출장을 와 있었지만, 3년 동안 몸담았던 잡지사가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기에 쉴 틈 없이 영화를 보는 와중에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신작들을 챙겨봐야 하건만,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영화제가 진행되는 내내 해변가에서 구슬프게 울려퍼지는 니노 로타의 음악이 마음을 자극했다. 어느 날 밤 펠리니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작은 상영관으로 몸을 숨기듯 들어섰다. 그리고 비로소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상영작은 ‘카비리아의 밤’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영화를 여는 첫 장면이다. 많은 위대한 영화들의 첫 장면은 심지어 영화 전체가 담고 있는 이야기와 주제를 압축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펠리니 감독의 아내이자 불세출의 여배우 줄리에타 마시나가 주연을 맡은 ‘카비리아의 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기막힌 방식으로 서로공명한다. 낙천적인 창녀 카비리아가 겪는 기이한 모험의 시작은 반복되는 그녀의 우스꽝스럽고도 슬픈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인 한 쌍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을 치며 강둑으로 향한다. 그러나 분위기에 한껏 취한 여자의 뒤에 서서 문득 주위를 살피던 남자는 그녀가 들고 있던 지갑을 뺏고 그녀를 물에 빠뜨린 뒤 달아난다. 사랑하고 버림받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카비리아의 우스꽝스럽고도 가혹한 운명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비리아는 믿었던 마지막 연인이 그녀를 벼랑으로 유인해 살해하고 돈을 뺏을 심산이었다는 사실을 최후의 순간에 알게 된다. 그냥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카비리아 앞에서 당황한 연인은 돈을 들고 도망치고, 만신창이가 된 카비리아는 어둑해진 숲속을 휘청거리며 걸어간다. 그런 그녀의 뒤로 갑자기 일군의 소년 소녀 무리들이 등장한다. 마치 축제라도 벌이는 듯 피리를 불고 노래하던 그들은 카비리아의 주위를 에워싼다. 그들의 노랫소리에 카비리아의 슬픔은 조금씩 무뎌진다. 영화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한 순간 카비리아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눈물어린 미소를 보낸다. 수없이 배신당하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창녀 카비리아는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도 끝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카비리아가 겪는 믿음과 배신이 되풀이되는 기구한 여정은 불행이 맹수처럼 도사리고 있는 험난한 삶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펠리니는 그 모든 불행의 밑바닥에서 기적처럼 솟아오르는 삶의 소중함을 카비리아의 눈물어린 미소를 통해 보여준다. 그녀를 둘러싼 무리 중 한 명이 다정하게 던진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마디로 카비리아의 영혼은 구원 받는다. 이는 절망의 끝에서 얻은 삶의 가장 소박한 순간이 만들어내는 기적에 다름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