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스타였던 케빈 코스트너와 휘트니 휴스턴이 ‘보디가드’로 “(이게) 웬 다이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래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모가 하는 비디오가게에 가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꽂혀있는 그 필름을 보겠다고 징징거리다 뒤통수를 한 대 제대로 맞았다. 하지만, 결국엔 봤다. 멋졌다. 떨어진 공간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남녀, 여자를 보호하는 남자,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는 여자. 사랑한다는 것이, 서로 마음이 닿는다는 것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별을 그렇게 맞았다. 그 애가 기다리고 있는 교문을 향해 경사 65도에 해당하는 언덕을 뛰었다, 그것도 7cm높이의 구두를 신고. 나는 달리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애가 나를 지킬 수 있을지 두고 보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사람이요.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은 종교에서는 가능하죠. 사람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해요.” 조금 오래 아프다 싶을 때 내려진 이 선고는 나를 해방시켰다. 없는 것을 찾고 있었구나. 그럼 이제 다른 것을 찾아 나서자. 누군가 꼭 나를 지켜줄 필요는 없다고, 힘들면 힘든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혼자 달렸다. 개운하고, 상쾌했다. 체력장 100m 달리기에서 죽도록 뛰어봤자 “너는 왜 걷냐” 따위의 반응 밖에 나오지 않아 ‘건강관리야 내 할 일이지, 왜 국가적 차원에서 간섭을 하나’ 투덜대며 달리기 증오증후군에 시달리던 때와는 달랐다. 그리고는 서서히 회복했다. 없는 줄만 알았던 무게중심과 중력을. 내가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달리고 달리니 몸도 마음도 튼튼해져서, 이왕 뛰는 김에 누군가를 구출하고 지켜주러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군가에게 안기기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안아주기 위해 달리는 것도 큰 기쁨이리라. ‘내가 널 지켜줄게.’ 사랑한다는 표현대신 이 말을 쓰기로 한다. 그래, 내가 널 지켜줄게. 아무리 무서워도 용기를 내서 꼭 널 지켜줄 꺼야. 차가운 세상 속에서, 상처 주는 사람들 속에서, 너의 아픈 마음속에서, 내 약한 의지 속에서, 약속할게. ‘영화가 끝난 후 언제가 레이첼도 프랭크를 지켜냈을 꺼야’ 라고 생각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