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페셜]once upon a time

역사속 인물에 몰입하다
18세기 프랑스 황실의 최대 스캔들 ‘마리 앙투와네트’를 시작으로’ 16세기 조선 최고의 명기였던 ‘황진이’가 대기 중입니다. 사실 사극 드라마 바람이 분 것은 한참 된 일이죠. 살아보지 못한 시대, 파란만장 한 삶에 대한 호기심, 더하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을 무언가. 상상만 가능한 오래전 이야기의 매력이 독자여러분을 매료시킬 수도 있겠습니다.

‘두려울 게 없으라’고 명하다

엘리자베스 여왕 | 엘리자베스 Elizabeth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유명하다. 국가와 결혼한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으로, 가톨릭의 부흥을 잠재우고 성공회를 굳게 뿌리내리도록 한 사람으로,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대양으로 나아간 ‘버지니아’ 로. 우리는 큰 인물의 유명한 단면을 본다. 그렇기에 더욱 상상하기 싫어진다. 그녀가 저렇게 두려움 없는 지상의 신적 존재로 거듭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 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거대한 종교적, 정치적 기류들 사이에서 얼마나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가톨릭 세력의 음모로 사형되기 직전 살아난 그녀는 메리여왕의 뒤를 이어 곧 여왕이 된다. 그러나 그녀 앞에 닥친 것들은 어지러운 경제적 상황과, 스페인, 프랑스 두 국가에서 동시에 가해진 혼인압력들이었다. 국가 간 동맹이나 주종관계를 맺는 최고의 방법이 왕가의 결혼이었던

당시,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두 국가들의 압력에 모두 등을 돌린다. 그들과 결혼을 하는 것은 비인간적이었고, 비신념적이었고, 비자주적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 안한 여자, 특히 후세가 없는 여왕은 오래 갈 수 없다는 식으로, 강한 나라의 청을 무시할 순 없다는 식으로 여왕을 몰아붙이는 사람들, 그리고 메리 여왕의 임종과 함께 부활을 시작한 성공회를 용납하지 않는 가톨릭의 여왕 암살 음모 속에서 그녀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 넘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여자이지만 남자의 심장을 갖고 싶다고, 나는 여자이면서 곧 아버지의 딸이라고 당당히 외친다. 그녀는 어느 순간에는 실패도 했었지만 국민을 언제나 입에 담았고, 동시에 한 남자를 향한 뜨거운 사랑도 갖고 있었고, 신념 없는 자를 비웃을 줄 알았고, 긴 머리를 잘라 그 어떤 남자보다도 강한 동정녀가 될 수 있었던 여인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것은 가끔 부풀려진다. 그것은 가끔 미화되고 치장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 그것은 우스워지지만, 어떤 경우 그것은 실제로는 훨씬 위대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낳는다. 두려운 것이 많았고, 두렵지 않은 척 했고, 결국 그 자리에 우뚝 섰을 때도 그녀에게 두려움이야 없었겠는가. 처녀 여왕으로 역사에 우뚝 선 섬뜩하리만치 아득한 엘리자베스의 모습. 우리가 무엇을 보았건 간에 그녀는 그보다 훨씬 위대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천재와 범인(凡人) 사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안토니오 살리에르 | 아마데우스 Peter Shaffer’s Amadeus
18세기 이탈리아. 우리는 흔히 천재를 ‘완전함’의 표상으로 인식한다. 사람들은 천재(만)을 소비하고 기억한다. 불운하거나 요절한 천재라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이다. 신에게 부여받은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은 한낱 범인들에겐 높은 벽일 뿐, 그 아무리 피나는 연습도 천재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오죽하면 ‘예술계에서 2등이란 꼴찌와 같다’는 말이 다 있을까.
여기, 그런 이유로 평생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끝내 자살을 기도한 한 노인이 있다. 궁정음악가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과 어마어마한 부를 얻었던 살리에르지만, 그 역시도 모차르트의 천재성 앞에서는 눈물로 탄식하며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살 때 협주곡을, 7살 때 교향곡을, 12살에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의 미들네임이자 이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아마데우스’의 뜻이 ‘신이 가장 사랑하는’이라는 사실은 천재와 범인의 경계란 분명한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임을 다시금 확인시킨다. 천재가 될 수 없었던 범인은 지독한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신을 저주했고, 천재를 증오했다. 결국 살리에르의 마지막 선택은, 모차르트의 트라우마인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을 악용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등의 걸출한 작품들을 배출했던 18세기에 그의 작품의 질적인 우수성과 청중들의 기호가 정확하게 반비례했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귀족의 궁정에 소속된 ‘하인’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으므로, 귀족 밑에서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과 인기를 믿고 자유롭게 음악을 하길 원했던 모차르트는 평생을 가난 속에 허덕여야만 했다.

이 세상 모든 평범함을 대표하는 살리에르의 적(敵)이자, 시대의 수용 범위를 뛰어넘는 엄청난 재능을 가졌던 모차르트는 끝내 ‘음악의 형태로 당겨쓴 유언’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 세상 떠나는 날,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아무도 그의 저승길을 배웅해주지 않았다. 지금도 모차르트의 무덤이 어딘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그 흔한 묘비 하나 없다. 시대가 외면해버린 천재의 ‘초라한 죽음’과 천재가 될 수 없는 ‘범인의 번뇌’, 신은 둘 중 어느 쪽에게 더 가혹했던 걸까.


그러나 산 것은 그들이고 죽은 것은 나입니다

예수교 신부들 | 미션 The Mission
18세기 남미. 정확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지역에서 발생한 일이다. 거대한 폭포 위쪽 지역에 자리 잡은 과라니 족의 터전에 예수교 신부들은 복음을 전파하려 하지만 문화의 차이로 번번이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신부는 폭포수 절벽을 오른다. 그의 연주에 감동한 과라니족은 그를 받아들이고, 정글에서 나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군다. 그리고 한 사람, 한때 용병이자 노예상으로 과라니족을 사냥했던 로드리고는, 자신의 여자를 동생에게 빼앗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동생을 찔러 죽인 뒤 허망한 세월을 보낸다. 결투 중 일어난 살인은 심판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나, 그는 그 자신을 더 가혹히 벌한 채 식음을 전폐한다. 가브리엘 신부는 로드리고를 과라니족의 터전으로 안내하고, 비로소 자신의 죄책감을 힘겹게 떨친 그는 한때 자신의 사냥감이었던 과라니족의 위로를 받으며 통탄의 눈물을 흘린다.
추기경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미션’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강대국들의 개척 혹은 침범의 역사를 드러낸다. 교회는 스스로의 번창을 위해 이들의 눈치를 보며, 신이 아닌 자신들의 안전에 따라 움직인다. 합법적으로 노예소유가 불가한 스페인은 포르투갈에 과라니족의 영토를 넘긴 뒤 불법적 노예거래를 해 자기 배를 불릴 생각에 가득 차있다. 이에,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는 다른 길을 택한다. 자신의 죄를 씻어준 이곳을 지키기 위해 다시 칼을 잡은 로드리고는, 끝까지 신부로서 저항하겠다는 가브리엘에게 축복을 바라지만 그는 축복대신 자신이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그의 손에 쥐어준다.

그들은 뜨거웠으나 무력하였기에, 책 속에 쓰인 정복의 역사는 영화 속에서 되풀이 된다. 스페인은 ‘목적이 있었으므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변명하고, 포르투갈은 ‘안타깝지만 우리 같은 무역 국가는 어쩔 수 없다’ 위선을 떤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진행을 맡은 무기력했던, 그러나 고심했던 추기경의 목소리와 그의 맺힌 눈물은 ‘미션’을 ‘종교영화’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준다. 기독교의 역사 또한 승자의 역사로서 해석할 수 있지만, 포괄적인 ‘정복의 역사’ 그 비극을 얘기하는 영화는 지금의 현실에도 존재하는 세 인물을 통해 되살아난다.


시대를 거스른 비운의 여인

까미유 끌로델 |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9세기 프랑스. 자신의 자질과 재능에 대해 의심을 품는 까미유는 이미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조각가 로댕을 만난다. “당신은 마음으로 조각하지. 하지만 그건 틀린 방법이야.” 스스로를 몽상가라 불렀지만, 로댕의 조수가 되고 그의 연인이 되며 까미유는 삶의 활력을 얻는다. 로댕과 같은 꿈을 꾸며, 같은 작품을 만드는 그녀는 재능을 알아주는 아버지와 동생 폴의 변함없는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다. 로댕과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까미유의 삶은 임신과 낙태를 겪으며 한 순간에 뒤틀린다. 로댕과의 관계도 파국을 맞고, 조각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의 까미유 끌로델의 삶도 망가진다. 이젠 나 자신을 위해 일하겠다며 마지막 공동작품인 ‘칼레의 시민들’만을 남겨둔 채 로댕을 떠나는 까미유.

로댕은 뒤늦게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쓰지만 그녀는 이미 내적으로 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폴도 자신의 꿈을 좇아 멀리 미국의 뉴욕으로 떠난다. 파리 도심의 에펠탑은 점점 완성되어가고, 그 아래 까미유의 삶은 로댕을 비난하며 더 망가져간다. “당신이 내 모든 걸 가져갔죠, 내 젊음과 작품들을!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마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름의 성공을 거둔 남동생 폴만을 믿고 의지하는 까미유. 데뷔 때부터 그녀를 지지하던 화랑 주인 블로의 도움으로 일어서는가 싶었으나 결정적인 순간 폴의 부재에 그녀의 불안한 눈망울은 흔들린다.

짧은 시간 예술혼을 불태웠으나 결국 마지막까지 로댕의 빛에 가려야했던 그녀는 30년이나 정신병원에 격리되어 살다 생을 마감했다.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로댕에게서 독립하고자 했던 조각가 까미유는 결국 정열적인 여류 예술가에 관대하지 못한 사회의 억압에 부딪쳐야 했다. 고흐와 같은 삶을 살았으나 고흐처럼 인정받지 못한 그녀를 철저히 외면했던 당대 세인들의 통념은 그녀가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로댕, 사랑, 가족이 아닌 시대가 그녀를 옭아맨 것이다.

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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