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페셜] serious, very serious 킬리언 머피 Cil

serious, very serious
킬리언 머피 Cillian Murphy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플루토에서의 아침을'에는 ‘헤드윅'의 존 카메론 밋첼, ‘나의 장밋빛 인생'의 아역배우 조르주 뒤 프레슨에 버금가는 아리따운 여장남자가
등장한다. 굴곡진 인생길을 홀로 외롭게 걸어가면서도 늘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는 이 사랑스러운 여자(이고 싶은 남자)는 여느 동화 속 주인공보다 훨씬 아름답고
황홀하다. 구름이 무성한 파란 하늘빛 영화포스터 속에서도 그는 분홍 우산을 쓰고 꽃무늬 가방을 들고 아찔한 높이의 하이힐을 신고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어…, 어디서 봤더라?' 묘하게 낯익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이 배우의 이름은 킬리언 머피.
킬리언 머피는 사실 오해하기 쉬운 배우다. 여느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처럼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닌 것도 아니고, 레드카펫 밟을만한 훌륭한 영화에 출연한 경험도 그리 많지 않고, 카메라세례에 익숙하거나 가십이 무성한 인기배우도 아니다. 게다가 왜소하고 서늘해 보이는 인상 때문인지 가까이 다가가서 말 붙이기까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의 첫인상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잔상을 남긴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좀처럼 잊혀 지지 않는다. 처음엔 단순히 보라보라섬의 바닷물을 얼려놓은 듯한 영롱한 비취색 눈동자와 유난스럽게 도드라진 광대뼈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 깊게 그를 관찰 해봐도 수사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기만 하고, 정답은 보일 기미조차 안 보인다. 보통 제3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연기를 통해 각인된 영화 캐릭터를 배우의 실제 이미지와 동일시하기 마련인데 무시무시한 악당도, 겁에 질린 순진한 소년도, 개구진 악동도, 달콤쌉싸름한 로맨티스트일 수도 있는 그를 하나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고 큰 모험이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그는 알면 알수록 더욱 모르겠는 사람이다.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형용사나 부사도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사실 킬리언 머피라는 배우의 이름이 세간에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트레인스포팅'으로 유명한 대니 보일 감독의 좀비영화 ‘28일 후(2002)'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부터다. ‘배우의 연기가 훌륭한가, 그렇지 못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흥행을 해야 배우가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불문율 같아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킬리언이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이름인 ‘Cillian'이 미국식 발음인 실리언이 아니라 킬리언으로 읽힌다는 것과, 특유의 눈 색깔이 말해주듯 그는 아일랜드의 남부의 소도시 코크 출신 배우다.
킬리언은 연기에 있어서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법 공부를 하며 변호사를 지망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는 냉소적인 유머와 심오한 음악세계로 많은 뮤지션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아왔던 ‘프랭크 자파'의 음악에 영향을 받아 ‘그린진스씨의 아들(Sons of Mr. Greengenes)'이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며 젊은 날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취미로'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디스코 피그'라는 연극에 출연했고 예상치 못하게 연기에 쏟아진 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호평에 큰 감명을 받아, 급기야 진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이 대목에서 ‘신은 불공평하다!'를 한 번 외쳐줘야 할 것 같다).본격적으로 극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기본기를 탄탄히 다진 킬리언은 5년 뒤 영화화 된 동명의 작품 ‘디스코 피그(2000)'에서도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 ‘디스코 피그'에 이어 두 번째로 출연한 영화 ‘온 디 에지(2000)'에서는 사춘기 시절을 관통하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년의 섬세한 내면연기를 훌륭히 선보였고, 그 후 출연한 영화가 그 유명한 ‘28일 후'다. 유혈이 낭자하는 좀비세계에서 쫓기고 맞고 밟히고 터지는 열혈청년을 연기한 그는 영화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특히 이 영화의 무삭제판 초반에 그의 ‘올누드'가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흥행가도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콜드마운틴(2003)'의 독일군 병사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3)'의 순수한 푸줏간 청년 같은 단역을 거쳐 같은 아일랜드계 배우이자 헐리우드의 섹시스타인 콜린 페럴과 함께 ‘인터미션(2003)'이라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영화의 허술한 연출과 저조한 흥행 성적이 문제가 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여전히 진지하고 고집스러운 그의 연기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여자 친구가 바람을 폈다고 의심하며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고, 직장에서 해고 될 위기에 처하자 상사의 머리에 통조림을 맞추며 환호하는 거친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치기와 무모함으로 무장한 악동'이라는 또 다른 신선한 이미지를 남기는 데 성공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킬리언이 로맨틱코미디에도 참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입증한 셈이었으니, 이 얼마나 소중한 발견인가.
버라이어티
본격적인 그의 연기 인생이 바로 이쯤부터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이 킬리언 머피를 게리 올드만에 버금가는 악당 전문 배우로 기억하는 것은 그가 ‘배트맨 비긴즈(2005)'의 조나단 크레인 박사, ‘나이트 플라이트(2005)'의 테러리스트 잭슨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악당 캐릭터의 역사를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사실 킬리언은 배트맨 역할을 지망하여 ‘배트맨 비긴즈'의 오디션을 보러 갔었지만, 배트맨 역할은 이미 모두 잘 알고 있듯 크리스찬 베일의 몫으로 돌아갔고, 그의 오묘한 눈 색깔에 매료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특별히 킬리언에게 사악한 악역 조나단 크레인 박사를 연기해 줄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가슴은 조금 아프지만 결과적으로는 ‘짧고 굵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이트 플라이트'에서 젠틀함과 악마스러움을 동시에 담아내던 그 종잡을 수 없던 얼굴도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서 킬리언의 연기는 악마, 사이코, 호러, 그로테스크, 잔인함 같은 도식적인 악마 이미지를 단번에 뛰어넘는다.
필모그래피의 정확한 순서로 보자면 그 다음 영화가 개봉을 앞둔 ‘플루토에서 아침을(2005)'이지만, 우리나라 개봉 순서로 따지면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이 먼저다. 주인공 데미안과 고향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비전문배우를 기용하기로 유명한 켄 로치 감독에게 덜컥 캐스팅된 걸 보면 그의 연기 인생은 어느 정도 우연의 법칙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지만, 킬리언의 섬세한 연기가 영화를 끌고 나가는 가장 중추적인 힘이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의 신념이 옳은가 그른가를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하며 나약하게 울부짖던 그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일랜드의 역사 그 자체로 비춰졌다. 이성도 감성도 모두 불식시키는 뜨거운 영화적 울림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관객들은 킬리언 머피라는 배우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짠' 하고 변신 중 인 듯하다. 짙은 화장에 샤넬 향수를 뿌리고 심각한 건 딱 질색이라며 윙크를 날리는 사랑스러운 여장남자 키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이나 했었나!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교태가 좔좔 흐르는 걸음걸이, 여자보다 더 예쁜 그녀의 얼굴은 그가 정말 ‘게이'가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하게 만든다. 그뿐 아니다. ‘28일 후' 이후 재회한 대니 보이 감독의 신작 ‘선샤인(2007)'에서는 태양을 지키는 정의의 사도로, 촬영단계에 있는 ‘Watching The Detectives(한제 미정)'에서는 루시 리우와 함께 로맨틱코미디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니, 뭇 여성 팬들 가슴 설렐 일만 남은 것 같다. 역시, 그에게 있어 정답은 없다. 예측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바로 배우 킬리언 머피의 본질이다.
평소 킬리언 머피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그를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혹자에게 그가 어떤 배우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한 마디로, 진지한 배우야”라는 대답이 날아왔다. 이토록 긴 이야기를 했지만, 필자 역시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진지한 배우'라는 표현 말고는 그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그러니 다소 상투적이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란다). 지금까지 총 11편의 영화에서 11가지 색깔로 변신했던 그는 어떤 영화,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지 항상 ‘진지함'을 잃지 않았고, 그것은 관객들에게 진심이 되어 전해졌다. 그러니 우리 그냥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하지 않기로 하자. 어차피 그는 처음부터 해부되거나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리 함께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킬리언의 눈은 그의 심장과도 같다고, 그 눈이 그의 연기의 근원이고 원천이라고, 그 신비로운 눈 안에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안희연 학생리포터 elliott19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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