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재발견]내 연인은 스파이였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오명(Notorious,1946)'
● 폴 버호벤 감독이 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가 오랜만에 만든 신작 ‘블랙북'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 로맨스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스파이는 강인한 남성이 아닌 기구한 운명에 내몰린 한 유대인여성이다. 그녀는 계획적으로 나치 장교에게 접근하지만 뜻밖에도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되는 상대를 사랑해버린 비운의 연인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긴박감 넘치는 상황으로 인해 더욱 보는 이의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이런 소재의 영화들이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절대 절명의 상황이 남녀 간의로맨스를 더욱 애틋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 히치콕의 영화 중에서도 이러한 소재를 다룬 걸작이 있다. 바로 불세출의 할리우드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캐리 그랜트가 함께 호흡을 맞춘 영화 ‘오명'이다.
‘오명'은 단순히 스파이 영화라는 소재적인측면을 넘어서는 히치콕 감독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히치콕의 영화들의몇몇 유명한 장면들은 현대 영화 감독들에 의해 무수히 참조되어 왔다. ‘오명'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여주인공 알리샤가 포도주 창고 열쇠를 훔친 채 파티에 참석하는 장면은 히치콕 영화를 창조적으로 참조하기로 유명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에서 요원들이 잠입한 파티 장면으로 고스란히 재현된 바 있다.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들 이외에도 ‘오명'은 한 편의 복잡한 로맨스 영화로도 손색이 없는 플롯을 지니고 있다. 정부 요원 데블린(캐리 그랜트)와 나치 협력자였던 아버지의 딸 알리샤(잉그리드 버그만),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나치주의자인 세바스찬 간의 미묘한 삼각관계는 보는 내내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알리샤와 데블린은 서로에게 마음을 두고 있지만 나치협력자의 딸과 정부 요원이라는 관계로 인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결국 알리샤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세바스찬의 아내가 되어 그의 뒤를 캐는 스파이 노릇을 하기로 한다. 데블린과 알리샤는 가끔 접선해서 정보를 주고받으며 의혹과 애정이 뒤섞인 태도를 취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방탕하고 자유분방하게 그려지는 알리샤는 영화 속에서 서서히 그 힘이 약화되고 길들여진다. 이는 차가운 금발 여성에 대한 히치콕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오명'은 히치콕이 즐겨 사용하는 ‘오인된 사람'이라는 모티브를 여주인공 쪽에 놓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는 속임수와 함정이 난무하는 스파이의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러브스토리로서 현재의 어떤 영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오명'은 히치콕의 서스펜스 영화의 근간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의 영화들 중에서도 특별히 로맨틱한 사랑의 무드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영화이기도 하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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