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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point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연합군에 밀려 퇴각할 무렵.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희생양이 된 레이첼(캐리스 밴 허슨) 가족은 비밀리에 탈출을 시도하다 처참하게 몰살당하고, 그녀만 홀로 살아남았다. 나치즘이라는 인간 멸시적 체제에 염증을 느낀 레이첼은 적군의 본지로 침투해 수장인 문츠 장교의 연인이 되고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등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레이첼은 문츠 장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문츠 장교 역시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인 ‘블랙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존했던 것으로, 정부 정책 차원에서 국가 기밀로 비밀유지가 되는 파급력 강한 1급 정보들을 담고 있는 문서를 가리킨다. ‘원초적 본능'으로 유명한 폴 버호벤 감독은 극중 레이첼 캐릭터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의 기록을 본 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물음표가 되어 남아있는 몇몇 실제 상황을 뼈대로 그 위에 가설에 가까운 픽션을 두툼하게 덧붙였기 때문에 온전한 실화라고 볼 수는 없지만, 총알과 배신이 빗발치는 그 격렬한 시대를 통과하고 살아남은 한 여자의 역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뜻 깊은 경험일 것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레이첼 일행이 펼치는 레지스탕스 행동으로 유추해볼 때 사회성 짙은 전쟁영화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하지만 실제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물을 통해 지나온 역사를 회고하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하다.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다양한 인물군상의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전쟁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명암을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받기도 한다. 역사라는 것이 2시간 가량의 영화 속에 농축되기엔 워낙 어마어마하기 때문인지 야심 많은 감독에 의해 비교적 세밀하게 잘 짜인 구성 속에서도 종종 생략이나 비약이 눈에 띄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되는 순간이 있는 반면 느린 호흡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그간 폴 버호벤 감독이 보여줬었던 스타일과는 좀 괴리가 있지만 첩보, 전쟁, 사랑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얼룩진 인상적인 드라마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