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파안대소했다. 여대생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 1위로 뽑혔다는 본지의 설문결과를 첫 인사로 건넨 후였다. 조승우, 장동건, 강동원, 박해일, 조인성 등 젊은 스타들도, 설경구, 송강호 같은 쟁쟁한 후배들도 그의 이름 아래 있었다. 기분 좋은 소식에 아이처럼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는 이내 말과 함께 마음을 낮추었다. “영화 <라디오 스타>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 그리고 내가 그냥 무난한 사람이라… 날 뽑으면 무리가 없잖아.” 이것이 배우 안성기를 51년 동안 이끌어 온 힘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곧 대학생이 되는 큰 아들과 어젯밤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하며, 그는 스스로를 ‘옛날 스타일’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 하고 말로 표현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야. 그보다는 눈을 보면서 다른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식으로 교감을 나누려고 해. 어제는 무슨 얘길 했더라… 좋은 얘길 많이 했는데 생각이 안 나네….” 아들과 나눈 어제의 시간을 떠올리느라 골몰히 생각에 잠긴 그를 잠시 기다려 보다가, 그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청해 보았다. 그는 겨우 다섯 살 때 <황혼열차>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후 <십대의 반항> <얄개전> 등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 오다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즈음 연기를 접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배우를 할 생각은 없었다. “베트남어를 공부해서 베트남에 월어 교관으로 갈 생각이었어. 그곳에서 미래를 찾아보자 생각했지. 그런데 4학년이 되니까 철군을 하기 시작하는 거야. 더 이상 파병도 없었지.” 한국 경제가 꿈틀거리던 당시는 원서만 내면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지만, 공산화 된 베트남의 언어는 쓰일 데가 없었다.

 

그 즈음 다시 영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백수 시절이 시작됐다. “아유, 그 불안함은 대단하지. 다른 친구들은 회사 다닌다고 한 턱 낸다고 난리인데 난 맨날 집에서 용돈 조금씩 타쓰고 그러니까. 그래서 일부러 바쁘게 생활했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자전거를 타고 어느 지점을 돌아오기, 영어학원 가기와 같은 소소한 일들로 빼곡하게 시간표를 채웠다. 그중에는 일주일에 몇 번씩 프랑스 문화원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과, 매일 저녁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시나리오를 써 보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녁 먹고 한두 시간씩 앉아 있었지. 누가 청탁한 원고도 아니니까 서두를 것이 없잖아. 한 권을 써 나가면서 각 인물에 대한 생각도 하고, 대사나 지문, 카메라 앵글, 조명까지 생각해 보는 거야. 나도 모르게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게 되지.” 그렇게 보낸 시간은 이후 이장호, 배창호 감독을 만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작품에 참여하게 되어 더욱 단단한 팀워크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백수 생활에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어. 백수가 자꾸 왔다갔다 해서 식구들 눈에 띄면 마음 아플 거 아냐. 조용히 방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아니까 부모님 마음도 좀 나을 것이고. 펜과 원고지만 있으면 되니까 돈도 안 들고.” 껄껄 웃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더욱 친근하다.

 

그는 몇 작품에서 조연을 거쳐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로 대종상 신인 남우상을 타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그의 표현대로 ‘그냥 죽 걸어왔다’. 그렇게 쌓여 온 시간이 51년. 그의 발자취는 그대로 한국 영화사의 기록이다. “지금이야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갈 수 있네’ 생각하는 거지. 처음 5년, 10년까지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지. 막연했지.” 그를 영화를 ‘좋아했다’. 그에게 있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촬영 현장에서 연기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외의 따라오는 많은 것들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것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힘이다. “사실 현장에서 일하는 건 막노동인데, 그걸 즐기면서 한다는 건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는 뜻이거든. 인기라는 건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도 하만, 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엔 올라가고 떨어지고 할 여지가 없는 거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70년대 한국 영화 침체기, 80년대 격변기를 지나며 <성공시대> <만다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하얀 전쟁> 등으로 차곡차곡 필모그래피 쌓아 나가던 그는, 견고한 연기력에 다양한 캐릭터를 담아 낼 수 있는 유일한 주연급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상업적 변화가 시작되던 1990년대, 그는 40대 배우로서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했다. 배우 안성기에게 처음으로 주연이 아닌 역할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이제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이런 것이로구나,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는 거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 나는 영원한 주연이다, 하면서 작품성이 떨어져도 주연이니까 출연하면 배우로서 더 침몰할 수 있는 거지. 비중이 작다 해도 임팩트가 큰 캐릭터가 있어. 꼭 있어야 할 사람이네, 이 소리를 들으면 돼. 그러면 성공적인 것이고 오래 할 수 있어.”

 

그렇게 또 한 번의 터닝포인트를 돌아 10년쯤 흐른 2006년, 그는 영화 <라디오 스타>로 후배 박중훈과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공동수상했다. 박중훈은 그에게 가장 친밀한 영화 파트너이지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배우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쉽지 않은 길, 짧지 않은 세월 배우로서 그는 외롭지 않았을까? “몇 명 같이 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 내 바로 밑의 후배인 임성민이 계속 살아 있었다면 든든했을 것 같기도 해. 그런데 옛날에는 정말 살을 붙이면서 영화를 만들었어. 서로 부둥켜 안고 왔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다 식구라서 서로 위로하고 도움 주고, 그래서 외롭지는 않았어.” 그래서 연초 후배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을 때 그는 안타까웠다. ‘그 친구들이 죽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면…’ 하는 마음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찾아왔다면) 그 입장이 돼서 함께 고민해 보고 싶었어. 일단 말을 시작하면 그런 극단적인 행동까지 가지 않게 되잖아. 말을 하는 순간 고통이 덜어지니까.”

 

그가 후배들에게 안타까웠던 것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도 너무 단기적으로 승부를 내야 할 일로 본다는 것이었다. “일을 오래 하고 싶다면, 호흡을 길게 하고 싶다면 연기라는 본질로써 승부를 내야 해. 그건 아주 어렵지만 또 큰 감동을 주는 유일한 것이거든.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몰라 늘 막연하고 불안하지. 일하다가 아예 작품이 안 들어오는 때도 오고. 당연히 불안해지고 맘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지. 하지만 그 시간을 내가 도약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면 돼. 일부러라도 가져야 할 시간인데 즐기지는 못할망정 불안해할 필요는 없는 거야.” 준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고 나직하게 말하는 그의 말은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리고,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배우로 걸어온 51년의 시간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자신의 연기에 부족함을 느끼고, 연기에서 무엇을 ‘이룬다’는 표현을 조심스러워하는 배우다. “요새 다들 잘 울더라고. 하하. 나는 눈물 연기하는 건 자신이 없어. 멜로드라마적 감상이 모자라지. 미묘한 사랑표현도 굉장한 연기인데 그 부분이 아쉬워. 하지만 뭔가를 이뤄 가겠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냥 해 나간다고 하는 말이 맞지. 영화를 너무 좋아하니까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고 그게 가장 큰 행복인 것 같아.” 한국 영화사와 배우 안성기는 서로를 비추는 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많은 후배들과 관객들이 바라보고 사랑하는 큰 별이 되었다. 이제 한국영화계 최초 70대 주연배우를 볼 수 있는 날을 행복한 마음으로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50년간 자리를 지킨 그가 변함없이 넉넉하고 포근한 빛을 발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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