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발견]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봄 이야기(Conte De Printemps, 1990)'
● 바야흐로 계절은 봄이다. 4계절이 인간의 인생으로 비유된다면, 봄은 바로 탄생기, 즉 시작의 지점에 해당한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계절, 봄은 그래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다리게 되는 설레임의 계절이기도 하다. 홍상수 감독은 일찍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에서 계절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를테면 봄의 인사동과 겨울의 인사동은 단순히 계절이 다르다기 보다는 완전히 다른 세계, 혹은 다른 시공간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은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오게 된다. 봄이라는 계절을 영화의 직접적인 소재로 삼은 영화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제목으로만 보자면 오즈 야스지로의 ‘조춘'이나 ‘만춘'과 같은 영화들도 떠오르지만, 계절을 소재로 다룬 에릭로메르의 사계절 연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봄 이야기'는 누구도, 어떤 사건도 기다리지 않는 한 평범한 여교사가 겪는 작은 일탈의 순간을 다룬다. 그러나 그 일탈은 인물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결국 무언가가 일어난 듯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설레임과 모호한 감정이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철학 선생인 잔느는 봄이 한창인 어느 주말, 머물 곳이 없게 된다. 남자친구의 집은 차분한 주말을 보내기에는 너무 어질러져 있고, 자신의 집은 이미 친구가 월요일까지 남자친구와 함께 머물겠다며 차지했다. 충동적으로 잘 모르는 친구의 파티에 간 잔느는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나타샤라는 소녀를 만난다. 나타샤는 첫눈에 잔느에게 호감을 갖고 그녀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한다. 사실 나타샤의 진짜 속셈은 따로 있다. 홀로된 아버지가 현재 사귀는 젊은 여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나타샤는 잔느와 아버지를 맺어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의 감정을 넘겨짚을 뿐, 구체적인 사건은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에릭 로메르는 ‘봄 이야기'에서 통상적인 로맨스의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깨뜨린다. 결국 잔느에게도, 나타샤에게도, 나타샤의 아버지에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감, 그리고 두려움과 곤혹스러움이라는 감정 그 자체이다. 에릭 로메르는 바로 이러한 감정이 봄이라는 계절적 지표를 통해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느냐 아니냐는 적어도 에릭 로메르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봄의 본질은 그 기대와 설레임으로 이루어진 감정의 세계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http://www.naeilshot.co.kr/news/view.asp?num=2372&Sfield=&Sstr=&page=1&cate_news=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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