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음악처럼]기억하지 않아도 봄

행잉록에서의 소풍(Picnic at Hanging Rock)

‘1900년 2월 14일, 성 발렌타인의 날에, 애플야드 대학의 학생들이 빅토리아주 마케돈산 행잉록으로 소풍을 갔다. 그 날 오후, 일행 중 몇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장 호주다운 호주영화라 손꼽히는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마치 사건을 실화로 착각하게 하는 이 한 문장과 함께 시작합니다. 금기와 규율로 가득한 여학교를 배경으로, 후일 ‘장화, 홍련’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모티프가 된 이 작품은 음악 역시 오리지널 트랙 없이 강렬한 임팩트를 내뿜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소녀(혹은 처녀)들의 불안한 정서와 맞물려, 팬플룻과 클래식의 조화가 두드러진 까닭이죠.
루마니아 출신 팬플룻의 대가, 게오르게 잠피르(Gheorghe Zamfir)의 연주곡 ‘고독한 양치기(The Lonely Shepherd)'는 한마디로 ‘홀림’입니다. 바위산 행잉록에 매혹되는 소녀들, 또 사라진 소녀들의 잔영에 홀린 청년의 모습 위로 흐르는 이 곡은 때로는 차분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이어서 팬플룻 음이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소리인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하죠. 그래서 위압적인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인간 사회의 모습을 반추하기도 하고요.
행잉록에서 사라진 신비로운 소녀 미란다와 그녀의 친구들, 학교 여선생들은 모두 나름의 유대를 가지고 서로에게 기대며 엄격한 질서에 묶인 생활을 견딥니다. 이러한 그녀들의 관계에 맞물려, 또 하나의 주요 테마곡인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피아노 협주곡 제 5번 황제 2악장’이 인상깊게 쓰입니다. 사라진 이들을 찾는 마을 사람들의 수색장면에서 흐르는 이 곡은 긴박하기보다는 차라리 낭만적이어서, 미란다의 환상이 나타날 때와 같이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죠. 그 외에도 영화 초반, 들뜬 여학생들이 소풍을 떠나는 장면에서는 경쾌한 말발굽 소리에 섞여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평균율 클리비어 곡집 제 1권 제 1곡’이 흐르고, 여행 온 영국인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옆에서는 악단이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작은 밤의 음악(Eine kleine Nachtmusik)'을 연주하니, 이건 클래식의 클래식적인 사용이라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호주의 2월은 일년 중 날씨가 가장 좋은 때라고 하죠. 영화 속 여학교도 이내 시간이 흘러 3월이 되었습니다. 모호한 결말과 아찔한 풍경 때문에, 영화 속 3월은 이제 겨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우리와 같이 봄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조용히 흐르는 엔딩곡 ‘황제’ 아래로, 행잉록은 여전히 표정 없이 굳어있습니다.
사느라 바빠 기억하지 않았는데도 계절은 또다시 오고, 갑니다. 아득한 음악, 아득한 실종, 그리고 아득한 봄 냄새. 이젠 정말 3월입니다. 팬플룻과 클래식은 (그로테스크하지만) 봄과도 참 잘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요.

박수진 학생리포터 treetalk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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