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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눈을 떴는데 낯설게도, 너무 평범한 내가 너무 반복적인 일상을 살고 있었어. 유치한 멘트지만 ‘그 화려했던 꿈들은 다 어디 간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부모님, 친구들, 하물며 내가 방금 베고 잔 베개에 까지 심통이 났지. ‘이런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왜 날 가만히 두고 있어. 못났다고 하지, 더 해보라고 윽박이라도 질러보지. 나한테 거는 기대가 고작 이 정도였어?’ 그래. 아마 이건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거야. 이런 생각 들지 않아? 젊음이란 게 사막 한 가운데 같아. 한발 더 내딛는 것이 허무하리만치 막막하고, 뒤 돌아가는 방법은 없어. 아주 짜증나던 어느 날 책상 위에 엎질러진 우유처럼 다시 담기란 불가능하고, 끈적거림 없이 닦아내는 것에는 큰 결심 같은 게 필요하지.
석사 논문주제를 이미 두세 번 갈아치운 핀도 아마 그랬을 거야. 새로운 주제를 택하면 마치 여섯 살 때 ‘니꿈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그랬던 것처럼 환상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지지부진 하고 있는 지금이 참기 힘들어,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친구 샘과도 잠시 떨어져 있기로 했지. 핀에겐 결과가 필요했어. 자신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는 보증이. 그녀는 상황적인 변명을 들어 샘을 되돌려 보내면서, 다시 돌아갈 거라고 안심시키면서, 속으로 이런 얘길 했는지 몰라. ‘샘. 내가 너로 될까? 사랑이란 것도 변하는 거라며. 그렇다면 내가 너 하나 보고 생을 살아도 될까? 너도 다 알고있을텐데 왜 그렇게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니.’
퀼트 모임에 모인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짧게 끝나버리거나, 결국은 엇갈려 버린 자신의 사랑 얘길 들려줘. 그녀들의 사랑은 저마다 빛났어. 알잖아, 그 감정이란 게 어떤 건지. 그 사랑을 절정삼아 여기까지 계속된 삶들도 다 소중했어. 난 버릇처럼 ‘그렇다고 니 인생이 해피해질 것 같아?’ 하고 묻던 질문을 잠시 그쳤어. 넘쳐흐르고 있던 허무감을 채 다 닦아낼 순 없었지만, 또 미련한 변덕을 부려 모래를 털어내고 주저앉아 있던 방향으로 걸어 나갔어.
사실 폭풍우치듯 치열했던 방황도 이제는 끝났는지 몰라. ‘치열하지 않냐’고 자랑하며 위안 삼을 수 있던 그 때도. 여전히 불안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왜 불안한지 알게 됐으니까.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하지 못할지도 몰라.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모자랄 그런 티 없이 해맑은 웃음을 너에게 보일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 모래바람으로 까끌한 길 함께 걸어주면 정말 기쁠 거 같아. 어떤 표정이 나올진 몰라도,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웃음을 네게 보여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