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의 주제는 ‘창조론’과 관련한 판타지 세계입니다. 제목만으로도 내용을 짐작하시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그래도 몇 가지 주절거리며 써보려고 합니다. 혹시 지겨우시면 사심 없이 넘겨주십시오.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판타지 소설을 읽다보면 다른 그 어떤 소설에서 보던 것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이런 구절을 접하게 뵙니다. ‘여신 누구누구’의 손에 창조된 ‘무슨 무슨’ 대륙 . 혹은 세 여신 ‘누구’, ’누구‘, ‘누구’의 싸움으로 세상이 혼란에 빠졌다거나, 혹은 ‘신의 의지에 따라’, 혹은 ‘무슨 무슨 신의 지팡이’ ….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대다수의 판타지 소설이 취하고 있는 세계관 혹은 신관(神觀)은 명백하게 ‘창조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창조되었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창조의 주체가 되는 신들이 여신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굳이 남신과 여신을 구분할 의도는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창조론’에 뿌리를 둔 신들의 세계이니까요.
아마도 우리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신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로마 신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다른 이름으로 익숙한 북유럽 신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어디에도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인간과 신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이러 저러한 일들이 있었다… 라고 만 전해지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의 궁금증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판타지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그 ‘창조’라고 하는 개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하는 것이지요. 분명 이것은 기독교의 ‘창조론’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중세를 거치면서 서구의 사고관은 ‘창조론’으로 굳어졌고, 비록 근세로 넘어오면서 다윈의 ‘진화설’이 지극히 놀라운 센세이션과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말입니다. 중/고등학교, 혹은 대학 과정의 많은 지식을 섭렵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이미 진화론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이 ‘창조론’의 진의를 다시 파악하고 '신적 존재‘의 가능성을 상당한 확률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진화론을 포기한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판타지 세계의 ‘창조론’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가사의라고 한다면 불가사의라고 말할 수 있지요. 아마도 독자의 대다수는 기독교를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원래 소설이란 종교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 한 작가의 종교관에 대해서는 독자가 언급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퍼센트를 차지하는 ‘창조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학설이 정설이냐…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 원론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대신 저는 이러한 것이 우리 의식 속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마치 여과 없는 깔때기로 물이 떨어지는 것을 그렇게 빨아들이듯 독자들은 작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물론 독자분들은 글을 읽으면서 그것에 반론을 가지기도 하고 비평을 하기도 하고, 혹독한 비난을 보내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글을 읽는 도중에 그것으로 문제를 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제가 곧잘 들먹이곤 하는 말을 써 봅시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한환모’에서 다루는 주제이므로 ‘한국인’의 정서에 맞추어서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신화라고 한다면 ‘단군신화’에 국한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삼국의 시조에 대한 탄생 설화가 있고 그것이 모두 비정상적인 탄생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고려하도록 합시다. 자, 그러면 한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하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인간들의 삶에 끼여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끼여들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인간사에 개입하는 것은 ‘환웅’과 그를 따라온 네 신하들이고, 말이 낳았다고 하는 박혁거세나 상자에 담겨왔다는 가야의 여섯 시조 역시 다소 신화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창조’되었다던가 ‘만들어졌다’라고 하는 부분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자신의 본질을 버리고 인간으로 변모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껍질 벗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후 웅녀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대에서의 그녀의 역할은 크게 두드러지지 못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환웅은 고조선의 건국 설화에서 단군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 언급되었을 뿐이고, 그 이후의 인간을 다스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군’임을 주목해봅니다. 고구려의 건국왕이 되었던 ‘주몽’ 역시 그 어머니 ‘유화부인’이 해모수와 관계해서 낳은 아들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신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영웅들은 모두 신과 인간의 ‘사생아’라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제우스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 헤라클레스는 매우 뛰어난 영웅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타지 세계에서 서로 다른 종족간에 태어난 어떤 생물체는 매우 금기시되는 것들입니다. 특히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네피림’은 존재해서는 안될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억측이라면 억측이고 과장이라면 과장된 표현이지만 중세의 기독교가 끼친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엄격하게 규제되어진 중세의 기독교 사회에서 ‘사생아’라는 것처럼 흔하고 거부되었던 존재는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생아’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비정상적인 부모의 성적(性的)관계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과 관계했을 발생하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중세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고 특히 중세 말엽의 십자군 전쟁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치러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전혀 다른 세계와의 접점에서 얻어지는 산물인 ‘사생아’는 교회에 상당한 위기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민족과 이념이 다른 두 세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 틀림없지요. 그런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황과 교회로서는 상당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이교도들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타락한 신부들에 의해 태어났던 모든 아이들… 그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그들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들의 결합을 지극히 경멸스러운 ‘사생아’로써 표현했을 것이 분명하고 그러한 것들이 오늘에까지 유전되는 것이지요.
다소 전개의 도약이 심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이 시점에서 그러한 신들의 ‘사생아’에 관한 우리들의 생각도 조금은 바뀌어도 좋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그것이 나쁘기만 한 것이라면 우리의 단군 할아버지와 주몽 할아버지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
신들의 세계라는 것이라 해도 인간들의 관점에서 본 것임만큼 부조리하고 세련되지 못한 억지가 숨어있음을 구석 구석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신들의 ‘정의’라는 것도 자기들의 ‘편의주의’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러한 것들은 작가가 구상한 ‘불완전한 이상향’에 대한 숨겨진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지도 합니다만. 어쨌든… 완전하지 못한 판타지와 신들의 세계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그것이 완전한 것인 줄 착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인간들은 모두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펴, 날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는 생물이니까요.
다소 두서 없이 달려왔습니다만… 뭐, 제가 생각하는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있는 생각들에 대한 정리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나쁘다 어떻다, 혹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그마한 ‘고찰’ 정도로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다른 의견을 가진 분이 계시면 주저 없이 게시판에 올려주세요. 사고의 공유를 갖는다는 것은 말 이상의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다음에는 조금 더 즐거운 주제로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참고) 본 칼럼은 '한국형 판타지 클럽'에 기재되었던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