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판타지란?
<청룡도> - 강서대묘
내가 생각하는 판타지란 이러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다. 전적으로 사적인 의견이라 생각하시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판타지란 실로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것이 바로 판타지다!!'라고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범위를 정의할 수 없다. 판타지란 영어의 의미그대로,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어떤 것, 혹은 상상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판타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쓴 소설조차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판타지다. 요괴들이 주종을 이루는 일본 만화나
영화, 혹은 그들의 신화 세계가 판타지이고 복희와 주나라, 달기와 강태공 등으로 이루어지는 얘기, 혹은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귀신들의 이야기 또한 판타지가 될 수 있다. 그야말로 제약이 없고 제한이 없는 것이 판타지의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에 쓰여지고 있는 대부분의 통신 소설들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많은 독자들이 판타지에 질리거나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답습'이라고 하는 것에는 창작의 요소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란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철저하게 작가의 철학으로 재창조되어진 세계다. 그리고 그랬을 때만이 판타지는 본래의 매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 그럼 한국적 혹은 동양 판타지란 무엇인가?
톨킨에서 비롯되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켈튼 족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고대의 켈튼(우리가 바이킹이라 부르는 민족이다.)인들은 영광스럽게 싸우다 죽는 것이 최고의 영예라 생각했다. 물론 그러한 사상은 후일의 '기사도'와 함께 어루러져서 전장에서 죽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죽은 이후에는 전사들의 명예의 전당이라는 '발키리'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곳에서 엘프족의 신앙과도 같은 '조화사상'이 비롯되었다)과, 숨겨져 있는 보석을 찾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여기서 드워프들의 성격이 정해졌다)이라 여겼다. 그리고 오랜 신화의 대상이었던 고대 민족들은 더 나은 세상을 바라고 혹은 그들의 이상향을 찾아 인간들의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이 톨킨이 깔아놓은 기본적인 사상이다.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과연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판타지란 무엇인가? 단순히 톨킨의 세계관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사상의 유전이 없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는 그 뿌리와 맥을 달리한다. 그래서 '한국적' 혹은 '동양' 판타지라 불리는 것은 조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판타지란 단순히 한국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한국인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점에서 한국 사람이 쓴 판타지는 아무리 톨킨 식의 세계를 바탕으로 쓰여져도 한국 판타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가가 한국인인 이상 우리의 의식 속에 박혀 있는 '한국인' 특유의 사상은 완전히 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한국인의 사상과 철학을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자.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잇점으로 활용하자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민족들과는 구분되는 '감정'의 요소들이 있다. 이른바 '한' 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단순히 그것을 억눌린 것,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대한 절망 따위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더 유쾌하고 고결한 생각으로 승화시켜 보자. 그러면 그것은 불교의 '해탈'이라는 사상과 접목이 가능해진다. 물론 고통을 버리고 수행을 함으로써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한 안식으로 접어드는 것은 인도인의 사상이지만 이미 그것은 오래 전부터 우리 속에 녹아 들어있다. 그 점을 활용할 필요가 있어진다. 그와 함께 人生은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
그 윤회를 생각하면 톨킨의 세계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용들과 드워프, 그리고 엘프들은 모두 인간 세상을 떠났다. 혹은 멸종했다. 그러나 윤회를 거듭하는 동양인들에게 있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들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단 한번의 잘못으로 세상이 어긋나버린다던가 영웅이 나타나 모든 인간을 구제한다? 우습다. 우리 역사에는 그런 인물은 없다!
물론 이것만이 한국 판타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많은 젊은 작가들이 다른 사람의 지적 소유물을 제약없이 사용하는 것에는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톨킨의 세계는 톨킨의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훔치는 행위'이다. 여기서 '각성하라!'라고 외치는 내 말은 어쩌면 바보 같고 우스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주) 이 글은 '한국형 환타지 모임'에 게재되었던 것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