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삶 쏜살 문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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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내겐 문학이란 그저 단어 선택이 정확하고 문장 구성이 유려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대변됐다. 미문(美文). 그 질서가 만들어내는 모종의 문화적 풍경 속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대 소설의 기본 요소로 여겨지는 특성들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적인 것'을 문학이란 영역에서 일정한 규범과 속성들로 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앙티 로망'(사르트르가 나탈리 사로트의 『미지의 여인』의 서문을 써주면서 붙인 명칭)이나 '누보 로망', '새로운 사실주의' 등에 눈을 뜨게 된다.(물론, 우리는 누보 로망이라는 단어가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작가들과 문학비평가들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확정된 역사를 알고 있다.)


프랑스에서 누보 로망이란 새로운 흐름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문학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은 예의 그렇듯 그러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작가군을 일별하고 그러한 범주화의 토대 위에서 그들의 비평과 연구가 갖는 맥락화를 정확히 하려 했다. 물론, 이러한 명명은 늘 그렇듯 저항을 낳는데, 명명의 권위 밖에 존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작가들 중 사뮈엘 베케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라스의 이 책을 기존의 범주인 에세이로 구분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글은 친절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지만,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순도 높은 진실의 지대로 우리를 훌쩍 데려간다. 속절없이 대면한 적 없는 진실의 세계에 일순간 당도하는 것이다.


뒤라스의 글에선 고독과 광기의 냄새가 풍긴다. 그것은 또한 술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물질화되기도 한다. 바로 그 힘으로 그녀는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사실은 발설하지 않았을에 가까운) 현실 그 자체, 진실 그 자체를 써내려 간다. 그런 글을 접하면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장을 훔쳐본 것만 같아 이상하게 뒤를 돌아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읽는 이가 준비할 새도 없이 삶의 본질을 향해 돌진하고 기존의 생각을 압도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새겨넣는 듯한 광기 어린 투쟁적인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카프카의 「변신」,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의 독서가 그렇듯, 이 세계가 한순간 낯설어지고 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세계를 낯설게 하기.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밤늦게 온 마지막 손님」, 작가의 글쓰기에서 술이 갖는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술」, 『죽음의 병』의 해설에 해당하는 「남자」, 비참한 삶이 구원되지 못하는 기이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성찰인 「단수하러 온 남자」, 그녀가 갖고 있는 파리에 대한 생각 및 관계를 가장 밀도 높게 서술하고 있는 「파리」, 일곱 문장으로 구성된 사랑의 단상인 「편지」. 이런 글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특히, 「단수하러 온 남자」는 우리가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베케트 등의 글에서 접했던 부조리한 현실의 배면에 존재하는 기이한 정조와 특유의 멜랑콜리를 담고 있는, 사회학적 폭로를 연상케 하는 문학적 고발에 해당하는 수작으로 여겨진다.


끝으로, 번역자 윤진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한다. 역주는 책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정확성을 갖추면서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바로 그런 방식처럼 번역 또한 이뤄졌다. 뒤라스의 문체인지 번역자의 문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글들. 역자를 따라 갖게 되는 독서 목록으로 생겨나는 길의 여정도 흥미로울 것만 같다.

개별적인 부분에 지체하지 말고, 말의 고속도로를, 말의 일반적인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의미를 벗어나기, 아무 데도 가지 않기, 아는 혹은 모르는 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저 말하기만 하기, 그러다 무턱대고 수많은 다른 말들 틈에 이르기. 그럴 수 없다.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는 없다. 아는 이 책이 바로 그런 고속 도로이기를, 동시에 어디든 갈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랐지만, 이 책은 어디든 다 가고자 하지만 한 번에 단 한 곳밖에 가지 못하는, 누구나 그렇고 어느 책이나 그렇듯이 다시 왔다가 다시 떠나야 하는 그런 책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책은 써질 수 없다. - P17

언제나 혹은 거의 언제나, 모든 유년기에, 그 유년기에 이어진 모든 삶에, 어머니란 광기의 표상이다. - P63

나는 글을 쓰기 때문에 좋은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랬다. 남자들은 글 쓰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낯선 땅이다. - P84

모든 것이 글쓰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반대로, 글쓰기는 열려 있다고, 모든 것을 뚫고 간다고, 설사 문이 닫혀 있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글쓰기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문이 있다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떤 닫힌 문 앞에서는 글쓰기가 멈춰 서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잠재적으로 바르트 방식의 글쓰기가 들어 있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고, 그것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때로, 문학상을 받은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설에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 P100

오래전부터, 옛날부터, 수천 년 전부터 침묵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문학도 여자들의 것이다. 문학 속에서 여자에 대해 말하든, 여자들이 문학을 하든, 아무튼 여자들의 것이다. - P116

사랑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이 말뿐이라 해도, 사랑은 늘 살아간다. 최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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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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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랬다. 한국의 번역 상황이 만들어놓은 인식의 조건이 나로 하여금 그를 프랑스 학계의 대가들과 대담을 나눈 학술 전문 기자로, 더 나아가 프랑스 지성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지성사가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일반적인 경로를 통해 인식하게 된 디디에 에리봉은 이미 한 대학의 교수로서, 2009년 발간된 이 저작으로 유럽 학계는 물론 영미권 학계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이는 유럽은 물론 미국에 이르는 각국에서 초청강연을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가령, 독일 빌레펠트 대학의 '엘리아스 강연'에 초청된 디디에 에리봉의 모습(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3531)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비판이론의 갱신이란 과제 앞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데 있어 에리봉은 자신의 사회적 궤적이 만들어낸 역사 앞에 자기자신을 불러 세웠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분열된 아비튀스 habitus clivé'라 불렀던 계급탈주자 지식인의 인식론적 조건과 아니 에르노가 글쓰기 속에서 '부끄러움/수치심 honte'으로 명명했던 하층 노동자 계급 출신의 정동적 상황을 모두 고려하면서, 기존의 심층심리학적 분석(특히, 정신분석학에 유래한)이 지니고 있는 설명의 기능주의적 측면을 공박하는데 할애되었다(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갈래가 존재하는데, 정신분석학이 품고 있는 '정상성' 규범을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서전인 <말>에서 아버지 부재의 상황으로 인해 절대적 자유를 희구하게 된 자전적 경험으로 가볍게 논박한 바 있다. 당시의 독일어권 유럽 사회의 가부장제적 억압에 대해서는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에서 '계급횡단자 transclasses'란 개념을 통해 계급의 상승이동 뿐만 아니라 하강이동 모두를 인식론적 특성에 집중해 일반화하려는 (철학자들의) 일련의 시도에 대해서도 사후적인 비판적 목소리가 되길 원한다. 에리봉은 '계급횡단자' 개념이 급격한 사회적 이동을 이룬 사람들의 인식론적 특성/강점에 대해 집중하는 데 대해 우려를 보인다. 이는 기존의 '계급탈주자' 개념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많은 부분 소거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이론(특히, 부르디외, 푸코)의 전문가로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역자의 해제는 그가 동원하고 있는 문헌의 범위와 인용의 정확성으로 인해 한국의 독자들이 아직 대면하지 못한 '비판이론가'로서의 디디에 에리봉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구현하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책의 내용을 잘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쓰여질 그 어떠한 리뷰도 그가 작성한 해제 너머를 보여주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에리봉이 자신의 이론적 관점/자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결한 입장들을 대변하는 누군가의 비판을 통해서 책에 대한 비판적 리뷰가 쓰여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논쟁을 부르는 이러한 비판적 리뷰가 에리봉이 원했던 학문적 대화의 첫 포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석학(가부장제 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련의 '정상성' 규범들), 랑시에르('지식인/대중'의 본질주의적 이분법에 대한 비판을 주로, 마르크스, 사르트르, 알튀세르, 부르디외 등에 가하고 있는데, 그는 <알튀세르의 교훈 >(1974)을 통해 정식으로 알튀세르와 결별한 이듬 해 <논리적 반역 Les Révoltes logiques>이란 학술지를 창간해서 "노동-철학, 혹은 프롤레타리아-지식인의 관계를 재구성하는데 집중"(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와의 대담[2003])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노력의 일차적 결산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을 국가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고, 1983년에는 <철학자와 그 빈자들 Le Philosophe et ses pauvres>을, 1987년에는 <무지한 스승>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문화연구(프랑스의 사회학자들[파스롱과 그리뇽]이 비판했던 그들의 일종의 민중추수주의적 인식론)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에리봉의 이 책은 비판이란 지적 도전을 부를 것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과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2009)가 거의 동일한 시기에 한국에 번역/수용된 것이다.

에리봉에 따르면, 모욕은 소수자가 자신의 욕망과 행동과 존재 그 자체에 수치심을 갖게 만든다. 그런데 이 과정은 소수자가 세계 및 타자와 맺는 관계 지평을 형성하고, 상처받은 취약한 의식을 생산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모욕의 효과가 그 발화 행위에 앞선다는 것이다. 모욕의 언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모두에게 체화되어 주체성을 구조화하는 성적/인종적/사회적 지배질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경멸과 배척의 다양한 언어는 소수자에게 그가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힌 것, 그가 ‘언제나-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시킬 따름이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무의식적 학습과 미시적 사회화 과정에 의해 개인의 신체와 의식 속에 장착된 정동을 계속 전율하게 만든다. 모욕의 힘은, 부르디외식으로 말해, 불평등한 지배질서와 위계 구조가 작동하는 사회세계의 역사와 그것들을 체화하고 내면화한 개인의 역사 간의 만남에서 나온다. - P311

개인의 정신 현상과 사회적인 것을 정초하는 초월적 상징 법칙의 존재에 준거를 두는 정신분석학은 ‘정상성‘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가족적/이성애적 질서를 뒷받침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에리봉의 입장은 아주 명확한데, 그것은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의 ‘보수 정치적 활용‘과 ‘분석적 원리로서의 효용‘을 구분하자는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그러한 구분은 오래 지탱되기 어려우며, 정신분석학의 개념 구조 자체가 분석 도구로서보다는 권력 장치로서의 기능이 훨씬 크므로, 우리는 그 체계를 송두리째 기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리봉은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이론적 공격의 과녁으로 겨냥하고 꼼꼼히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라캉은 남성적/이성애적/가족주의적 질서를 수호하는 정신분석학의 규범화 기능을 설파하며, 그의 텍스트는 반페미니즘적/동성애 혐오적 개념과 명제 들로 가득 차 있다. - P318

지배의 사회학과 그것이 설파하는 결정론은 저항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닐까? 에리봉은 오히려 정치적 행동의 전망과 가능성, 그리고 그 난점과 한계를 규정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사회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지식을 정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민중과 지식인의 ‘지적 평등‘을 논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관점이라든지, 노동 계급 문화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리처드 호가트나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영국 문화연구자들의 경향을 ‘지적 포퓰리즘‘으로 평가절하한다. 우리가 계급 불평등으로 인한 무지와 빈곤의 냉혹한 현신을 직시할 줄 알아야 실질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 P322

에리봉은 의지, 결정, 의식화에 의해 사회적 제약, 규범, 정체성 등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퀴어 이론은 순수한 환상, "극도의 단순한 관념론"이 되어버린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한 이론은 흔히 버틀러에 대한 오독에 바탕을 두는데, 에리봉이 보기에 버틀러가 말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은 사실 순전한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비투스 개념에 가깝다. 성 정체성은 우리가 배역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연극도 마음대로 실행하는 ‘놀이‘도 아니고, "재연réitération을 통한 역할의 체화"이기 때문이다. 에리봉은 버틀러가 재연의 과정에서 지배적 규범을 변형 또는 전치시킬 수 있는 재의미화의 가능성에 주목한 반면, 자신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재생산되는 구조의 역사적 관성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각으로는, ‘불화하고 일탈하는 정체성‘ 또한 일정하게 코드화되어 있으며, 우리는 역사로부터 쉽게 풀려날 수 없는 것이다. - P323

에리봉은 비판 이론이 연구자의 삶과 경험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자기참조적autoréférentielle"이며, 이론은 연구자의 경험에서 그 힘과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그에게 비판 이론과 자기 분석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자기‘는 ‘언제나-이미‘ 사회세계의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 ‘비개인적인 자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리봉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판 이론과 자기 분석은 모두 일종의 "수치전honto-biographie"이다. 연구자는 그 자신을 삶 속에서 억압하며 수치스럽게 만드는 예속화 양식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이론적으로 형식화한다. 따라서 자기 분석은 사회 분석이자 정치 분석politico-analyse일 수밖에 없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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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살다 (문고본) - 소설을 쓰기까지 먹고 듣고 읽고 느끼고 배우고 경험한 소설가의 모든 것 마음산 문고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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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삶에 대해 쓰인 책들 중 지금까지 이 책만큼의 흥미를 끌었던 책은 <작가란 무엇인가>, <소설가의 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정도였던 것 같다.


우연히 들르게 된 작은 동네책방에서 발견하게 된 책은 출판사의 이름을 보고 일단 믿을 만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고, 문고판으로 판형을 바꿔 재발행될 정도면 출판사의 자신감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출판사의 자신감은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유효한 성질의 것이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 익히 우리가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발견했던 소설가로서의 이승우가 아닌 명실공히 '에세이스트 이승우'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뒤늦은 발견은 나의 과문함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으나, 다른 요인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승우 선생의 에세이를 크게 기대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을 잘 쓰는 일과 에세이를 잘 쓰는 일은 분명 다르고, 그 두 가지 형식의 글을 다 잘 다루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들 또한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웠던 건 에세이의 문체적 특징이 예의 그의 소설을 닮아 있었다는 점이다. 연필로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려 쓴 것 같은 문장들. 내 기억이 맞다면, 엔젠가 어떤 팟캐스트 방송에서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나사못'에 비유했던 것 같다. 한 곳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구체성과 정확성, 성찰성을 확보하는 글쓰기 말이다. 2000년대 중반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유유히 흐르는 글은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글이 얼마나 신중하고 공들여 쓰여졌는지를 독자의 체험으로 되돌려주는 글쓰기. 


지금부턴 이렇게 기록해두어야 할 것 같다. 에세이스트 이승우.

아무도 제 스스로 자라지는 않는다.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와 환경의 자식이다. 그런 뜻에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고향의 자식일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고향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아, 나는 인정해야겠다. 고향의 물과 바람과 흙이 나를 키웠다. - P24

소설의 주제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소설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이를 테면 동물이나 식물, 바다나 산, 혹은 악마나 신에 대해 꽤 길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람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는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조차도 실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 P54

고독은 무형의 정신이다. 그저 조용한 것이 아니라 부러 조용해지는 것이고, 다만 혼자인 것이 아니고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침잠. 주변에 귀 막고 현상에 눈 감고 오직 깊이 가라앉음으로써 귀와 눈을 막고 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깊이 가라앉아 있는 자기 안의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다. 더 깊이 내려가는 자는 더 깊은 자기와 만난다. 그럴 때 고독의 일부가 된 우리의 내부에서 그윽한 빛이 피어오른다. 통찰력과 창조의 에너지는 그렇게 생성된다. - P78

내 소설이 잉태된 대표적인 자궁으로 나는 흔히 기억과 책과 공간을 든다. 기억은 얇거나 두껍고 멀거나 가깝고 사소하거나 거창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소설 속으로 들어올 때 원형을 환기시키지 않는 기억이란 없다. 얇든 두껍든, 멀든 가깝든, 사소하든 거창하든, 기억되는 그것이 인간 조건의 어떤 부분을 증거하지 않는 법은 없다. 그 때문에 기억은 언제나 결정적이고 때로 치명적이기도 하다. 소설가의 기억이 소설을 만든다. 소설가의 어떤 얇거나 두꺼운, 멀거나 가까운, 사소하거나 거창한, 그러나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기억이 소설의 배아다. 기억할 것이 없는 사람은 소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소설 역시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설이 기억의 형식이라는 말은 그런 뜻에서 옳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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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1톤의 독서
스가 아쓰코 지음, 김아름 옮김 / 에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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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평지나 분지도 아니고 봉우리도 아닌, 이탈리아 중세도시 오르비에토에서나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형을 우선 떠올려보자. 말하자면, 스가 아쓰코는 자신의 에세이로 그 누구도 쉽게 이르거나 침범할 수 없는 요새 같은 문학의 장소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영문학과 사회학을 거쳐 번역가, 연구자, 문장가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십여 년 간의 유럽 체류가 만들어놓은 자장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펼쳐진다. 이 에세이 역시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해 생활을 꾸렸던 이탈리아 서점을 중심으로 맺었던 인연들,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다. 


<먼 아침의 책들>(한뼘책방, 2019)이 책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 특유의 자전적 에세이를 보여주고 있다면, 이 책은 일종의 소품으로 좀 더 직접적인 서평에 가까운 형태의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뒤로 갈수록 책 그 자체에 몰입해들어가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스가 아쓰코라는 '문장가'의 진면목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랜 독서 생활과 문장에 대한 특유의 감식안을 바탕으로 갖게 된 유려한 문체는 읽는 이를 지그시 응시하는 느낌을 선사할 만큼 편안하게 느껴지고, 유럽문화에 대한 관심과 십여 년의 이탈리아 생활은 유럽과 일본을 넘나들며 책 이야기를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한국도 민주화 이후 해외 여행 전면 자유화가 되었지만,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에서 보여지는 코스모폴리턴 특유의 해박함과 여유를 느끼게 해주는 에세이는 흔치 않다. 자신이 다룰 수 있을 시기가 도래했을 때 에세이를 통해 문학의 세계로 들어선 사람이기에 가능한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독서가 스가 아쓰코의 문학적 고원으로 통하는 길을 터줄 수 있다면, 번역된 다른 책들은 분명 독자를 그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 역시 송태욱 선생이 번역한 <먼 아침의 책들>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섬‘이라는 장이 그렇다. 작가는 "섬들이 저마다 고유한 역할과 얼굴을 갖고 있다"라는 글머리로 시작해 무라노는 까마귀 섬, 부라노는 화려한 색채의 민가와 인종의 섬이라는 식으로 차례차례 정의 내린 후 다음과 같은 내적 성찰이 넘쳐나는 문장을 건넨다.
"섬은 또한 고독과 정숙의 장소, 적어도 그런 느낌을 기대받는 장소다. 스스로 나아가거나 혹은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모습을 감춰야 하는 인간은 같은 부류끼리 모여 특정 섬으로 향한다. 죽은 자는 산 미켈레로 향한다. (...) 죽은 자 옆에서 자기 몸의 격리를 요구하거나 요구받는다. 여기서 인종이란 수도사와 병자, 병사다." - P27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답을 찾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경쟁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 믿는 방향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로지 자신에게 충실한 그런 일들을 근본적으로 잊은 게 아닐까. - P166

직선적 시간이나 장소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선생님의 이야기 방식이 디테일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디테일로 인해, 살아온 시대나 보아온 풍경, 더 나아가 교양의 수준이 확연히 다른 나조차 뒤처지지 않고 선생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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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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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폭력적인 가부장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방식으로서의 문학, 아버지와의 불화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증언으로서의 문학,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엄연한 자기 자리를 갖기 위한 인정투쟁으로서의 문학. 카프카 문학의 기원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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