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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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랬다. 한국의 번역 상황이 만들어놓은 인식의 조건이 나로 하여금 그를 프랑스 학계의 대가들과 대담을 나눈 학술 전문 기자로, 더 나아가 프랑스 지성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지성사가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일반적인 경로를 통해 인식하게 된 디디에 에리봉은 이미 한 대학의 교수로서, 2009년 발간된 이 저작으로 유럽 학계는 물론 영미권 학계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이는 유럽은 물론 미국에 이르는 각국에서 초청강연을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가령, 독일 빌레펠트 대학의 '엘리아스 강연'에 초청된 디디에 에리봉의 모습(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3531)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비판이론의 갱신이란 과제 앞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데 있어 에리봉은 자신의 사회적 궤적이 만들어낸 역사 앞에 자기자신을 불러 세웠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분열된 아비튀스 habitus clivé'라 불렀던 계급탈주자 지식인의 인식론적 조건과 아니 에르노가 글쓰기 속에서 '부끄러움/수치심 honte'으로 명명했던 하층 노동자 계급 출신의 정동적 상황을 모두 고려하면서, 기존의 심층심리학적 분석(특히, 정신분석학에 유래한)이 지니고 있는 설명의 기능주의적 측면을 공박하는데 할애되었다(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갈래가 존재하는데, 정신분석학이 품고 있는 '정상성' 규범을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서전인 <말>에서 아버지 부재의 상황으로 인해 절대적 자유를 희구하게 된 자전적 경험으로 가볍게 논박한 바 있다. 당시의 독일어권 유럽 사회의 가부장제적 억압에 대해서는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에서 '계급횡단자 transclasses'란 개념을 통해 계급의 상승이동 뿐만 아니라 하강이동 모두를 인식론적 특성에 집중해 일반화하려는 (철학자들의) 일련의 시도에 대해서도 사후적인 비판적 목소리가 되길 원한다. 에리봉은 '계급횡단자' 개념이 급격한 사회적 이동을 이룬 사람들의 인식론적 특성/강점에 대해 집중하는 데 대해 우려를 보인다. 이는 기존의 '계급탈주자' 개념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많은 부분 소거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이론(특히, 부르디외, 푸코)의 전문가로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역자의 해제는 그가 동원하고 있는 문헌의 범위와 인용의 정확성으로 인해 한국의 독자들이 아직 대면하지 못한 '비판이론가'로서의 디디에 에리봉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구현하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책의 내용을 잘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쓰여질 그 어떠한 리뷰도 그가 작성한 해제 너머를 보여주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에리봉이 자신의 이론적 관점/자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결한 입장들을 대변하는 누군가의 비판을 통해서 책에 대한 비판적 리뷰가 쓰여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논쟁을 부르는 이러한 비판적 리뷰가 에리봉이 원했던 학문적 대화의 첫 포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석학(가부장제 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련의 '정상성' 규범들), 랑시에르('지식인/대중'의 본질주의적 이분법에 대한 비판을 주로, 마르크스, 사르트르, 알튀세르, 부르디외 등에 가하고 있는데, 그는 <알튀세르의 교훈 >(1974)을 통해 정식으로 알튀세르와 결별한 이듬 해 <논리적 반역 Les Révoltes logiques>이란 학술지를 창간해서 "노동-철학, 혹은 프롤레타리아-지식인의 관계를 재구성하는데 집중"(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와의 대담[2003])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노력의 일차적 결산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을 국가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고, 1983년에는 <철학자와 그 빈자들 Le Philosophe et ses pauvres>을, 1987년에는 <무지한 스승>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문화연구(프랑스의 사회학자들[파스롱과 그리뇽]이 비판했던 그들의 일종의 민중추수주의적 인식론)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에리봉의 이 책은 비판이란 지적 도전을 부를 것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과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2009)가 거의 동일한 시기에 한국에 번역/수용된 것이다.

에리봉에 따르면, 모욕은 소수자가 자신의 욕망과 행동과 존재 그 자체에 수치심을 갖게 만든다. 그런데 이 과정은 소수자가 세계 및 타자와 맺는 관계 지평을 형성하고, 상처받은 취약한 의식을 생산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모욕의 효과가 그 발화 행위에 앞선다는 것이다. 모욕의 언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모두에게 체화되어 주체성을 구조화하는 성적/인종적/사회적 지배질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경멸과 배척의 다양한 언어는 소수자에게 그가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힌 것, 그가 ‘언제나-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시킬 따름이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무의식적 학습과 미시적 사회화 과정에 의해 개인의 신체와 의식 속에 장착된 정동을 계속 전율하게 만든다. 모욕의 힘은, 부르디외식으로 말해, 불평등한 지배질서와 위계 구조가 작동하는 사회세계의 역사와 그것들을 체화하고 내면화한 개인의 역사 간의 만남에서 나온다. - P311

개인의 정신 현상과 사회적인 것을 정초하는 초월적 상징 법칙의 존재에 준거를 두는 정신분석학은 ‘정상성‘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가족적/이성애적 질서를 뒷받침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에리봉의 입장은 아주 명확한데, 그것은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의 ‘보수 정치적 활용‘과 ‘분석적 원리로서의 효용‘을 구분하자는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그러한 구분은 오래 지탱되기 어려우며, 정신분석학의 개념 구조 자체가 분석 도구로서보다는 권력 장치로서의 기능이 훨씬 크므로, 우리는 그 체계를 송두리째 기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리봉은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이론적 공격의 과녁으로 겨냥하고 꼼꼼히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라캉은 남성적/이성애적/가족주의적 질서를 수호하는 정신분석학의 규범화 기능을 설파하며, 그의 텍스트는 반페미니즘적/동성애 혐오적 개념과 명제 들로 가득 차 있다. - P318

지배의 사회학과 그것이 설파하는 결정론은 저항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닐까? 에리봉은 오히려 정치적 행동의 전망과 가능성, 그리고 그 난점과 한계를 규정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사회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지식을 정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민중과 지식인의 ‘지적 평등‘을 논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관점이라든지, 노동 계급 문화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리처드 호가트나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영국 문화연구자들의 경향을 ‘지적 포퓰리즘‘으로 평가절하한다. 우리가 계급 불평등으로 인한 무지와 빈곤의 냉혹한 현신을 직시할 줄 알아야 실질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 P322

에리봉은 의지, 결정, 의식화에 의해 사회적 제약, 규범, 정체성 등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퀴어 이론은 순수한 환상, "극도의 단순한 관념론"이 되어버린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한 이론은 흔히 버틀러에 대한 오독에 바탕을 두는데, 에리봉이 보기에 버틀러가 말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은 사실 순전한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비투스 개념에 가깝다. 성 정체성은 우리가 배역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연극도 마음대로 실행하는 ‘놀이‘도 아니고, "재연réitération을 통한 역할의 체화"이기 때문이다. 에리봉은 버틀러가 재연의 과정에서 지배적 규범을 변형 또는 전치시킬 수 있는 재의미화의 가능성에 주목한 반면, 자신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재생산되는 구조의 역사적 관성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각으로는, ‘불화하고 일탈하는 정체성‘ 또한 일정하게 코드화되어 있으며, 우리는 역사로부터 쉽게 풀려날 수 없는 것이다. - P323

에리봉은 비판 이론이 연구자의 삶과 경험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자기참조적autoréférentielle"이며, 이론은 연구자의 경험에서 그 힘과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그에게 비판 이론과 자기 분석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자기‘는 ‘언제나-이미‘ 사회세계의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 ‘비개인적인 자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리봉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판 이론과 자기 분석은 모두 일종의 "수치전honto-biographie"이다. 연구자는 그 자신을 삶 속에서 억압하며 수치스럽게 만드는 예속화 양식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이론적으로 형식화한다. 따라서 자기 분석은 사회 분석이자 정치 분석politico-analyse일 수밖에 없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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