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삶 쏜살 문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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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내겐 문학이란 그저 단어 선택이 정확하고 문장 구성이 유려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대변됐다. 미문(美文). 그 질서가 만들어내는 모종의 문화적 풍경 속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대 소설의 기본 요소로 여겨지는 특성들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적인 것'을 문학이란 영역에서 일정한 규범과 속성들로 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앙티 로망'(사르트르가 나탈리 사로트의 『미지의 여인』의 서문을 써주면서 붙인 명칭)이나 '누보 로망', '새로운 사실주의' 등에 눈을 뜨게 된다.(물론, 우리는 누보 로망이라는 단어가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작가들과 문학비평가들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확정된 역사를 알고 있다.)


프랑스에서 누보 로망이란 새로운 흐름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문학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은 예의 그렇듯 그러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작가군을 일별하고 그러한 범주화의 토대 위에서 그들의 비평과 연구가 갖는 맥락화를 정확히 하려 했다. 물론, 이러한 명명은 늘 그렇듯 저항을 낳는데, 명명의 권위 밖에 존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작가들 중 사뮈엘 베케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라스의 이 책을 기존의 범주인 에세이로 구분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글은 친절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지만,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순도 높은 진실의 지대로 우리를 훌쩍 데려간다. 속절없이 대면한 적 없는 진실의 세계에 일순간 당도하는 것이다.


뒤라스의 글에선 고독과 광기의 냄새가 풍긴다. 그것은 또한 술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물질화되기도 한다. 바로 그 힘으로 그녀는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사실은 발설하지 않았을에 가까운) 현실 그 자체, 진실 그 자체를 써내려 간다. 그런 글을 접하면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장을 훔쳐본 것만 같아 이상하게 뒤를 돌아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읽는 이가 준비할 새도 없이 삶의 본질을 향해 돌진하고 기존의 생각을 압도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새겨넣는 듯한 광기 어린 투쟁적인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카프카의 「변신」,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의 독서가 그렇듯, 이 세계가 한순간 낯설어지고 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세계를 낯설게 하기.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밤늦게 온 마지막 손님」, 작가의 글쓰기에서 술이 갖는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술」, 『죽음의 병』의 해설에 해당하는 「남자」, 비참한 삶이 구원되지 못하는 기이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성찰인 「단수하러 온 남자」, 그녀가 갖고 있는 파리에 대한 생각 및 관계를 가장 밀도 높게 서술하고 있는 「파리」, 일곱 문장으로 구성된 사랑의 단상인 「편지」. 이런 글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특히, 「단수하러 온 남자」는 우리가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베케트 등의 글에서 접했던 부조리한 현실의 배면에 존재하는 기이한 정조와 특유의 멜랑콜리를 담고 있는, 사회학적 폭로를 연상케 하는 문학적 고발에 해당하는 수작으로 여겨진다.


끝으로, 번역자 윤진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한다. 역주는 책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정확성을 갖추면서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바로 그런 방식처럼 번역 또한 이뤄졌다. 뒤라스의 문체인지 번역자의 문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글들. 역자를 따라 갖게 되는 독서 목록으로 생겨나는 길의 여정도 흥미로울 것만 같다.

개별적인 부분에 지체하지 말고, 말의 고속도로를, 말의 일반적인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의미를 벗어나기, 아무 데도 가지 않기, 아는 혹은 모르는 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저 말하기만 하기, 그러다 무턱대고 수많은 다른 말들 틈에 이르기. 그럴 수 없다.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는 없다. 아는 이 책이 바로 그런 고속 도로이기를, 동시에 어디든 갈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랐지만, 이 책은 어디든 다 가고자 하지만 한 번에 단 한 곳밖에 가지 못하는, 누구나 그렇고 어느 책이나 그렇듯이 다시 왔다가 다시 떠나야 하는 그런 책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책은 써질 수 없다. - P17

언제나 혹은 거의 언제나, 모든 유년기에, 그 유년기에 이어진 모든 삶에, 어머니란 광기의 표상이다. - P63

나는 글을 쓰기 때문에 좋은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랬다. 남자들은 글 쓰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낯선 땅이다. - P84

모든 것이 글쓰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반대로, 글쓰기는 열려 있다고, 모든 것을 뚫고 간다고, 설사 문이 닫혀 있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글쓰기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문이 있다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떤 닫힌 문 앞에서는 글쓰기가 멈춰 서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잠재적으로 바르트 방식의 글쓰기가 들어 있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고, 그것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때로, 문학상을 받은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설에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 P100

오래전부터, 옛날부터, 수천 년 전부터 침묵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문학도 여자들의 것이다. 문학 속에서 여자에 대해 말하든, 여자들이 문학을 하든, 아무튼 여자들의 것이다. - P116

사랑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이 말뿐이라 해도, 사랑은 늘 살아간다. 최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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