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말 (경쾌한 에디션)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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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지닌 가치를 논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수전 손택이라는 인물이 대담의 형식을 취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살아 생전 그는 미디어와 다른 이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데 신경을 쏟았던 사람으로, 그 어떠한 매개와 설명, 보충, 삭제 등 없이 인터뷰 전체가 오롯이 드러난다는 사실은 우리를 그러한 통제를 벗어난 그와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글만으로 접근가능한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의 리얼한 모습을 어느 정도는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지식인 셀러브리티에 대한 흔한 가십성 관심과 관음증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절제되고 정리된, 그래서 미처 가 닿지 못했던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이 어느샌가 대화 사이로 출현하고 마는 것이다. 인터뷰어인 조너선 콧은 수전 손택이 가진, 인간이라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편견 등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질문을 던지고, 손택 역시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화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대답을 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에게로 데려간다. 이는 온전하게 통제될 수 없는 '말'를 매개로 벌어지는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이며, 이는 명확하게 진실의 미학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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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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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특유의 문체를 간직한 훌륭한 번역을 통해, 우리는 1960~70년대 프랑스의 한 소녀가 어떻게 중산층의 한 가정에서 아내, 엄마로서의 역할을 체화해 나가게 되는지 알게 된다. 작가의 표현처럼, 가족 내 성 역할의 전통에 붙들린 '얼어붙은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한 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과정에서 가족들(시댁 식구들, 남편)은 전통적인 성 역할 규범을 체화하고 이를 자신들의 일상적인 관계를 통해 재생산하는 행위자로 출현한다. 즉, 규범은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늘 관계를 통해서 상호 영향 하에서 하나의 상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규범'과 '상식'이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저항은 그것이 사소한 형태일지라도 쉽게 진행되지 못한다. 우리는 상식을 벗어난 자, 예의가 없는 자 앞에서는 최소한의 관용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회의 실체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억압인지에 대한 각자의 판단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일상의 공간은 사실상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인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연대기에서 '과도기'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그녀의 마지막 '소설'에 해당하면서도,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의 어딘가"에 해당하는 글쓰기의 단초를 보여준다. 제목이 Une femme gelée가 아닌 La femme gelée이며,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얼어붙은 여자'의 구체적인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확증한다. 그녀는 구체적인 경험, 과정, 사물 등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는 거의 모든 여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의 보편성 속에 그러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60~70년대 프랑스 사회와 현재 한국 사회의 시공간적 차이는 결혼 생활에 내재한 가정 내 성 역할 규범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라고 하는 현실 앞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아니 에르노는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쓴 새로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함께 살아가는 이 모험에서, 우리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고, 서로의 사랑 속에서도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부여한 특권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 소녀들, 여성들의 임무다."


오랜만에 아니 에르노의 문체를 고스란히 간직한 번역서를 읽고 나니, 같은 출판사의 출간 예정작들도 살펴보게 되는데, 아니 에르노의 최근 작이라 할 수 있는 <소녀의 기억>이 리스트에 있다. 아마도 이 만족감을 번역될 책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벌써부터 나는 소리 죽여 나 자신에게 이상한 연재소설을 들려주면서, 실제의 나를 지워버리고 우아함과 연약함으로 가득 찬 다른 소녀로 대체한다. - P73

질서와 평화. 낙원. 10년 후, 나는 반짝거리는 조용한 부엌에서, 딸기와 밀가루가 있는, 그 이미지 속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죽어간다. - P85

순응주의와 수동성에 있어서, 대학에서 양성평등은 완벽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을 위한 공부와 남성을 위한 공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 P151

나는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불확실한 존재다. 사람들은 처녀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반면에 결혼한 여자에게는 남편, 아이들, 아파트, 세탁기 등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 P163

나는 나를 걱정하는 듯한 이런 기만적인 방식을 증오한다. 시어머니의 끝없는 친절, 마치 모래 함정 같은 친절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달달하고 달콤하게, 유치하면서도 거짓되게, 비슷한 방식의 대답을 강요한다. - P188

어린 시절과 이전의 몇 년간의 리듬, 공부할 때의 충만하고 긴장된 순간들, 그리고 머리와 몸이 갑자기 둥둥 떠나니다 풀어지고, 휴식이 이어지는, 그런 리듬은 나에게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 P213

당신은 왜 그렇게 불평을 해, 미혼모들과 이혼한 여자들은 저녁에 자기희생을 선물할 남자조차 없잖아. 그러나 여러 번,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면서, 나는 나의 아이아 아닌, ‘그의 아이‘를 산책시킨다는 이상한 느낌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를 안심시키는, 위생적이고 조화로운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하나의 부품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 P222

두렵고, 허둥지둥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여성의 인내심, 그들은 그것을 애정이라 부른다. 나는 둘째 아이를 잘 키우고, 세 개 학급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장을 보고 식사를 만들고 고장 난 지퍼를 바꾸 달고, 아이들의 신발을 사는 경지에 이르렀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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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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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조용한 서재의 침묵이 아닌 여러 명의 아이들이 울어대는 거실 한복판에서 쓰여진 것 같은, 고단한 삶의 순간순간을 힘들지만 누구보다 위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자가 알려주는 어떤 우아함. 삶에 대한 성숙한 태도가 진정 무엇인지를 미문(美文)이 아닌 어떤 태도로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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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삶 쏜살 문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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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내겐 문학이란 그저 단어 선택이 정확하고 문장 구성이 유려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대변됐다. 미문(美文). 그 질서가 만들어내는 모종의 문화적 풍경 속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대 소설의 기본 요소로 여겨지는 특성들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적인 것'을 문학이란 영역에서 일정한 규범과 속성들로 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앙티 로망'(사르트르가 나탈리 사로트의 『미지의 여인』의 서문을 써주면서 붙인 명칭)이나 '누보 로망', '새로운 사실주의' 등에 눈을 뜨게 된다.(물론, 우리는 누보 로망이라는 단어가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작가들과 문학비평가들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확정된 역사를 알고 있다.)


프랑스에서 누보 로망이란 새로운 흐름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문학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은 예의 그렇듯 그러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작가군을 일별하고 그러한 범주화의 토대 위에서 그들의 비평과 연구가 갖는 맥락화를 정확히 하려 했다. 물론, 이러한 명명은 늘 그렇듯 저항을 낳는데, 명명의 권위 밖에 존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작가들 중 사뮈엘 베케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라스의 이 책을 기존의 범주인 에세이로 구분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글은 친절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지만,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순도 높은 진실의 지대로 우리를 훌쩍 데려간다. 속절없이 대면한 적 없는 진실의 세계에 일순간 당도하는 것이다.


뒤라스의 글에선 고독과 광기의 냄새가 풍긴다. 그것은 또한 술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물질화되기도 한다. 바로 그 힘으로 그녀는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사실은 발설하지 않았을에 가까운) 현실 그 자체, 진실 그 자체를 써내려 간다. 그런 글을 접하면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장을 훔쳐본 것만 같아 이상하게 뒤를 돌아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읽는 이가 준비할 새도 없이 삶의 본질을 향해 돌진하고 기존의 생각을 압도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새겨넣는 듯한 광기 어린 투쟁적인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카프카의 「변신」,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의 독서가 그렇듯, 이 세계가 한순간 낯설어지고 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세계를 낯설게 하기.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밤늦게 온 마지막 손님」, 작가의 글쓰기에서 술이 갖는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술」, 『죽음의 병』의 해설에 해당하는 「남자」, 비참한 삶이 구원되지 못하는 기이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성찰인 「단수하러 온 남자」, 그녀가 갖고 있는 파리에 대한 생각 및 관계를 가장 밀도 높게 서술하고 있는 「파리」, 일곱 문장으로 구성된 사랑의 단상인 「편지」. 이런 글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특히, 「단수하러 온 남자」는 우리가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베케트 등의 글에서 접했던 부조리한 현실의 배면에 존재하는 기이한 정조와 특유의 멜랑콜리를 담고 있는, 사회학적 폭로를 연상케 하는 문학적 고발에 해당하는 수작으로 여겨진다.


끝으로, 번역자 윤진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한다. 역주는 책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정확성을 갖추면서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바로 그런 방식처럼 번역 또한 이뤄졌다. 뒤라스의 문체인지 번역자의 문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글들. 역자를 따라 갖게 되는 독서 목록으로 생겨나는 길의 여정도 흥미로울 것만 같다.

개별적인 부분에 지체하지 말고, 말의 고속도로를, 말의 일반적인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의미를 벗어나기, 아무 데도 가지 않기, 아는 혹은 모르는 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저 말하기만 하기, 그러다 무턱대고 수많은 다른 말들 틈에 이르기. 그럴 수 없다.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는 없다. 아는 이 책이 바로 그런 고속 도로이기를, 동시에 어디든 갈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랐지만, 이 책은 어디든 다 가고자 하지만 한 번에 단 한 곳밖에 가지 못하는, 누구나 그렇고 어느 책이나 그렇듯이 다시 왔다가 다시 떠나야 하는 그런 책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책은 써질 수 없다. - P17

언제나 혹은 거의 언제나, 모든 유년기에, 그 유년기에 이어진 모든 삶에, 어머니란 광기의 표상이다. - P63

나는 글을 쓰기 때문에 좋은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랬다. 남자들은 글 쓰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낯선 땅이다. - P84

모든 것이 글쓰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반대로, 글쓰기는 열려 있다고, 모든 것을 뚫고 간다고, 설사 문이 닫혀 있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글쓰기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문이 있다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떤 닫힌 문 앞에서는 글쓰기가 멈춰 서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잠재적으로 바르트 방식의 글쓰기가 들어 있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고, 그것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때로, 문학상을 받은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설에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 P100

오래전부터, 옛날부터, 수천 년 전부터 침묵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문학도 여자들의 것이다. 문학 속에서 여자에 대해 말하든, 여자들이 문학을 하든, 아무튼 여자들의 것이다. - P116

사랑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이 말뿐이라 해도, 사랑은 늘 살아간다. 최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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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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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랬다. 한국의 번역 상황이 만들어놓은 인식의 조건이 나로 하여금 그를 프랑스 학계의 대가들과 대담을 나눈 학술 전문 기자로, 더 나아가 프랑스 지성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지성사가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일반적인 경로를 통해 인식하게 된 디디에 에리봉은 이미 한 대학의 교수로서, 2009년 발간된 이 저작으로 유럽 학계는 물론 영미권 학계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이는 유럽은 물론 미국에 이르는 각국에서 초청강연을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가령, 독일 빌레펠트 대학의 '엘리아스 강연'에 초청된 디디에 에리봉의 모습(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3531)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비판이론의 갱신이란 과제 앞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데 있어 에리봉은 자신의 사회적 궤적이 만들어낸 역사 앞에 자기자신을 불러 세웠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분열된 아비튀스 habitus clivé'라 불렀던 계급탈주자 지식인의 인식론적 조건과 아니 에르노가 글쓰기 속에서 '부끄러움/수치심 honte'으로 명명했던 하층 노동자 계급 출신의 정동적 상황을 모두 고려하면서, 기존의 심층심리학적 분석(특히, 정신분석학에 유래한)이 지니고 있는 설명의 기능주의적 측면을 공박하는데 할애되었다(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갈래가 존재하는데, 정신분석학이 품고 있는 '정상성' 규범을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서전인 <말>에서 아버지 부재의 상황으로 인해 절대적 자유를 희구하게 된 자전적 경험으로 가볍게 논박한 바 있다. 당시의 독일어권 유럽 사회의 가부장제적 억압에 대해서는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에서 '계급횡단자 transclasses'란 개념을 통해 계급의 상승이동 뿐만 아니라 하강이동 모두를 인식론적 특성에 집중해 일반화하려는 (철학자들의) 일련의 시도에 대해서도 사후적인 비판적 목소리가 되길 원한다. 에리봉은 '계급횡단자' 개념이 급격한 사회적 이동을 이룬 사람들의 인식론적 특성/강점에 대해 집중하는 데 대해 우려를 보인다. 이는 기존의 '계급탈주자' 개념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많은 부분 소거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이론(특히, 부르디외, 푸코)의 전문가로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역자의 해제는 그가 동원하고 있는 문헌의 범위와 인용의 정확성으로 인해 한국의 독자들이 아직 대면하지 못한 '비판이론가'로서의 디디에 에리봉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구현하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책의 내용을 잘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쓰여질 그 어떠한 리뷰도 그가 작성한 해제 너머를 보여주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에리봉이 자신의 이론적 관점/자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결한 입장들을 대변하는 누군가의 비판을 통해서 책에 대한 비판적 리뷰가 쓰여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논쟁을 부르는 이러한 비판적 리뷰가 에리봉이 원했던 학문적 대화의 첫 포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석학(가부장제 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련의 '정상성' 규범들), 랑시에르('지식인/대중'의 본질주의적 이분법에 대한 비판을 주로, 마르크스, 사르트르, 알튀세르, 부르디외 등에 가하고 있는데, 그는 <알튀세르의 교훈 >(1974)을 통해 정식으로 알튀세르와 결별한 이듬 해 <논리적 반역 Les Révoltes logiques>이란 학술지를 창간해서 "노동-철학, 혹은 프롤레타리아-지식인의 관계를 재구성하는데 집중"(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와의 대담[2003])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노력의 일차적 결산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을 국가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고, 1983년에는 <철학자와 그 빈자들 Le Philosophe et ses pauvres>을, 1987년에는 <무지한 스승>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문화연구(프랑스의 사회학자들[파스롱과 그리뇽]이 비판했던 그들의 일종의 민중추수주의적 인식론)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에리봉의 이 책은 비판이란 지적 도전을 부를 것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과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2009)가 거의 동일한 시기에 한국에 번역/수용된 것이다.

에리봉에 따르면, 모욕은 소수자가 자신의 욕망과 행동과 존재 그 자체에 수치심을 갖게 만든다. 그런데 이 과정은 소수자가 세계 및 타자와 맺는 관계 지평을 형성하고, 상처받은 취약한 의식을 생산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모욕의 효과가 그 발화 행위에 앞선다는 것이다. 모욕의 언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모두에게 체화되어 주체성을 구조화하는 성적/인종적/사회적 지배질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경멸과 배척의 다양한 언어는 소수자에게 그가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힌 것, 그가 ‘언제나-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시킬 따름이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무의식적 학습과 미시적 사회화 과정에 의해 개인의 신체와 의식 속에 장착된 정동을 계속 전율하게 만든다. 모욕의 힘은, 부르디외식으로 말해, 불평등한 지배질서와 위계 구조가 작동하는 사회세계의 역사와 그것들을 체화하고 내면화한 개인의 역사 간의 만남에서 나온다. - P311

개인의 정신 현상과 사회적인 것을 정초하는 초월적 상징 법칙의 존재에 준거를 두는 정신분석학은 ‘정상성‘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가족적/이성애적 질서를 뒷받침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에리봉의 입장은 아주 명확한데, 그것은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의 ‘보수 정치적 활용‘과 ‘분석적 원리로서의 효용‘을 구분하자는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그러한 구분은 오래 지탱되기 어려우며, 정신분석학의 개념 구조 자체가 분석 도구로서보다는 권력 장치로서의 기능이 훨씬 크므로, 우리는 그 체계를 송두리째 기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리봉은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이론적 공격의 과녁으로 겨냥하고 꼼꼼히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라캉은 남성적/이성애적/가족주의적 질서를 수호하는 정신분석학의 규범화 기능을 설파하며, 그의 텍스트는 반페미니즘적/동성애 혐오적 개념과 명제 들로 가득 차 있다. - P318

지배의 사회학과 그것이 설파하는 결정론은 저항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닐까? 에리봉은 오히려 정치적 행동의 전망과 가능성, 그리고 그 난점과 한계를 규정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사회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지식을 정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민중과 지식인의 ‘지적 평등‘을 논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관점이라든지, 노동 계급 문화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리처드 호가트나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영국 문화연구자들의 경향을 ‘지적 포퓰리즘‘으로 평가절하한다. 우리가 계급 불평등으로 인한 무지와 빈곤의 냉혹한 현신을 직시할 줄 알아야 실질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 P322

에리봉은 의지, 결정, 의식화에 의해 사회적 제약, 규범, 정체성 등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퀴어 이론은 순수한 환상, "극도의 단순한 관념론"이 되어버린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한 이론은 흔히 버틀러에 대한 오독에 바탕을 두는데, 에리봉이 보기에 버틀러가 말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은 사실 순전한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비투스 개념에 가깝다. 성 정체성은 우리가 배역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연극도 마음대로 실행하는 ‘놀이‘도 아니고, "재연réitération을 통한 역할의 체화"이기 때문이다. 에리봉은 버틀러가 재연의 과정에서 지배적 규범을 변형 또는 전치시킬 수 있는 재의미화의 가능성에 주목한 반면, 자신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재생산되는 구조의 역사적 관성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각으로는, ‘불화하고 일탈하는 정체성‘ 또한 일정하게 코드화되어 있으며, 우리는 역사로부터 쉽게 풀려날 수 없는 것이다. - P323

에리봉은 비판 이론이 연구자의 삶과 경험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자기참조적autoréférentielle"이며, 이론은 연구자의 경험에서 그 힘과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그에게 비판 이론과 자기 분석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자기‘는 ‘언제나-이미‘ 사회세계의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 ‘비개인적인 자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리봉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판 이론과 자기 분석은 모두 일종의 "수치전honto-biographie"이다. 연구자는 그 자신을 삶 속에서 억압하며 수치스럽게 만드는 예속화 양식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이론적으로 형식화한다. 따라서 자기 분석은 사회 분석이자 정치 분석politico-analyse일 수밖에 없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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