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살다 (문고본) - 소설을 쓰기까지 먹고 듣고 읽고 느끼고 배우고 경험한 소설가의 모든 것 마음산 문고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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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삶에 대해 쓰인 책들 중 지금까지 이 책만큼의 흥미를 끌었던 책은 <작가란 무엇인가>, <소설가의 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정도였던 것 같다.


우연히 들르게 된 작은 동네책방에서 발견하게 된 책은 출판사의 이름을 보고 일단 믿을 만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고, 문고판으로 판형을 바꿔 재발행될 정도면 출판사의 자신감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출판사의 자신감은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유효한 성질의 것이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 익히 우리가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발견했던 소설가로서의 이승우가 아닌 명실공히 '에세이스트 이승우'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뒤늦은 발견은 나의 과문함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으나, 다른 요인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승우 선생의 에세이를 크게 기대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을 잘 쓰는 일과 에세이를 잘 쓰는 일은 분명 다르고, 그 두 가지 형식의 글을 다 잘 다루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들 또한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웠던 건 에세이의 문체적 특징이 예의 그의 소설을 닮아 있었다는 점이다. 연필로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려 쓴 것 같은 문장들. 내 기억이 맞다면, 엔젠가 어떤 팟캐스트 방송에서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나사못'에 비유했던 것 같다. 한 곳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구체성과 정확성, 성찰성을 확보하는 글쓰기 말이다. 2000년대 중반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유유히 흐르는 글은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글이 얼마나 신중하고 공들여 쓰여졌는지를 독자의 체험으로 되돌려주는 글쓰기. 


지금부턴 이렇게 기록해두어야 할 것 같다. 에세이스트 이승우.

아무도 제 스스로 자라지는 않는다.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와 환경의 자식이다. 그런 뜻에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고향의 자식일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고향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아, 나는 인정해야겠다. 고향의 물과 바람과 흙이 나를 키웠다. - P24

소설의 주제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소설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이를 테면 동물이나 식물, 바다나 산, 혹은 악마나 신에 대해 꽤 길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람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는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조차도 실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 P54

고독은 무형의 정신이다. 그저 조용한 것이 아니라 부러 조용해지는 것이고, 다만 혼자인 것이 아니고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침잠. 주변에 귀 막고 현상에 눈 감고 오직 깊이 가라앉음으로써 귀와 눈을 막고 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깊이 가라앉아 있는 자기 안의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다. 더 깊이 내려가는 자는 더 깊은 자기와 만난다. 그럴 때 고독의 일부가 된 우리의 내부에서 그윽한 빛이 피어오른다. 통찰력과 창조의 에너지는 그렇게 생성된다. - P78

내 소설이 잉태된 대표적인 자궁으로 나는 흔히 기억과 책과 공간을 든다. 기억은 얇거나 두껍고 멀거나 가깝고 사소하거나 거창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소설 속으로 들어올 때 원형을 환기시키지 않는 기억이란 없다. 얇든 두껍든, 멀든 가깝든, 사소하든 거창하든, 기억되는 그것이 인간 조건의 어떤 부분을 증거하지 않는 법은 없다. 그 때문에 기억은 언제나 결정적이고 때로 치명적이기도 하다. 소설가의 기억이 소설을 만든다. 소설가의 어떤 얇거나 두꺼운, 멀거나 가까운, 사소하거나 거창한, 그러나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기억이 소설의 배아다. 기억할 것이 없는 사람은 소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소설 역시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설이 기억의 형식이라는 말은 그런 뜻에서 옳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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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1톤의 독서
스가 아쓰코 지음, 김아름 옮김 / 에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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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평지나 분지도 아니고 봉우리도 아닌, 이탈리아 중세도시 오르비에토에서나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형을 우선 떠올려보자. 말하자면, 스가 아쓰코는 자신의 에세이로 그 누구도 쉽게 이르거나 침범할 수 없는 요새 같은 문학의 장소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영문학과 사회학을 거쳐 번역가, 연구자, 문장가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십여 년 간의 유럽 체류가 만들어놓은 자장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펼쳐진다. 이 에세이 역시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해 생활을 꾸렸던 이탈리아 서점을 중심으로 맺었던 인연들,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다. 


<먼 아침의 책들>(한뼘책방, 2019)이 책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 특유의 자전적 에세이를 보여주고 있다면, 이 책은 일종의 소품으로 좀 더 직접적인 서평에 가까운 형태의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뒤로 갈수록 책 그 자체에 몰입해들어가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스가 아쓰코라는 '문장가'의 진면목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랜 독서 생활과 문장에 대한 특유의 감식안을 바탕으로 갖게 된 유려한 문체는 읽는 이를 지그시 응시하는 느낌을 선사할 만큼 편안하게 느껴지고, 유럽문화에 대한 관심과 십여 년의 이탈리아 생활은 유럽과 일본을 넘나들며 책 이야기를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한국도 민주화 이후 해외 여행 전면 자유화가 되었지만,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에서 보여지는 코스모폴리턴 특유의 해박함과 여유를 느끼게 해주는 에세이는 흔치 않다. 자신이 다룰 수 있을 시기가 도래했을 때 에세이를 통해 문학의 세계로 들어선 사람이기에 가능한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독서가 스가 아쓰코의 문학적 고원으로 통하는 길을 터줄 수 있다면, 번역된 다른 책들은 분명 독자를 그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 역시 송태욱 선생이 번역한 <먼 아침의 책들>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섬‘이라는 장이 그렇다. 작가는 "섬들이 저마다 고유한 역할과 얼굴을 갖고 있다"라는 글머리로 시작해 무라노는 까마귀 섬, 부라노는 화려한 색채의 민가와 인종의 섬이라는 식으로 차례차례 정의 내린 후 다음과 같은 내적 성찰이 넘쳐나는 문장을 건넨다.
"섬은 또한 고독과 정숙의 장소, 적어도 그런 느낌을 기대받는 장소다. 스스로 나아가거나 혹은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모습을 감춰야 하는 인간은 같은 부류끼리 모여 특정 섬으로 향한다. 죽은 자는 산 미켈레로 향한다. (...) 죽은 자 옆에서 자기 몸의 격리를 요구하거나 요구받는다. 여기서 인종이란 수도사와 병자, 병사다." - P27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답을 찾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경쟁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 믿는 방향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로지 자신에게 충실한 그런 일들을 근본적으로 잊은 게 아닐까. - P166

직선적 시간이나 장소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선생님의 이야기 방식이 디테일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디테일로 인해, 살아온 시대나 보아온 풍경, 더 나아가 교양의 수준이 확연히 다른 나조차 뒤처지지 않고 선생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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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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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폭력적인 가부장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방식으로서의 문학, 아버지와의 불화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증언으로서의 문학,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엄연한 자기 자리를 갖기 위한 인정투쟁으로서의 문학. 카프카 문학의 기원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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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 -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 클래식 클라우드 23
신승철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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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의 형식을 품은 기행문이라는 참신한 기획을 필자 선택의 신중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로 증명해내고 있는 <클래식 클라우드> 총서는, 건축전공자들을 통해 번역된 르코르뷔지에의 저서들이 아니라 그에 대한 입문서가 왜 건축을 포함한 이 땅의 예술가들에게 필요한가를 본서의 독서 체험을 통해 증명해내고 있다.


르코르뷔지에의 생애사와 필자의 기행경험이 구분되지 않는 온전한 하나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올 때, 그것은 먼 이국의 예술가, 그리하여 몇 가지 외형적 스타일로만 기억되기 일쑤였던 그의 이미지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일신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르코르뷔지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과 이해의 폭이 얼마나 심층적인 것인지를, 또한 이를 일정한 형식으로 풀어내기 위해 '작가'적 노력에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궁극적인 미덕은 건축가, 예술가이기에 앞서 인간 르코르뷔지에를 이해하기 위한 책의 비판적 태도에 있다고 하겠다. 예컨대, 그가 자신의 성공욕구와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한때 가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그의 아내가 가진 본연의 특성을 지켜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비시 정권 지배 하의 프랑스에서 예술가로서의 꿈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일 등을, 수많은 논쟁과 뒷말을 인식하면서도 손쉽게 옹호하거나 체념하지 않는 '이해'의 중심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렇다고 이런 메타적 성격들만이 이 책의 가치를 말하게 하는 건 아니다. 한껏 적절하게 쓰여졌고 신중하게 다듬어졌을 문장들과 그 문장들을 말없이 뒷받침해주는 엄선된 이미지들은 그러한 구성 자체가 '글쓰기'라는 예술가적 실천을 통해 출현한 하나의 작품임을, 미적 세계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파리 6구 세브르가 35번지에서 3년 2개월 동안 르코르뷔지에와 함께 일했던 김중업의 건축언어가 역사를 매개로 어떻게 축적되고 전수될 수 있었는지 가늠해보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르코르뷔지에처럼 건축을 전공한 적은 없지만 유럽건축기행을 통해 그를 만날 수도 있을거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던 (오사카의 가난한 동네의 권투 선수였던) 안도 타다오가 철근콘크리트 공법을 서구의 기독교 전통이 아닌 아시아의 선불교 전통으로 재전유가능하게 한 고리도 탐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프랑스와 브라질이 맺고 있는 오랜 지적, 문화예술적 교류에 있어서 오스카 니마이어의 건축 언어에 새겨진 르코르뷔지에의 영향과 두 사람 간의 차이 등을 가늠해보는 것도 이 책의 독서가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외연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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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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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보다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지돈이 그러하듯 '인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자 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소망을 연상시키는 고다르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파이니는 "언젠가 그가 모든 것을 다른 곳에서 빌려온 영화를 꿈꾸었다면 <콜라주 드 프랑스> 전시는 아마도 이 꿈을 실현시켜 주었을 것"(Païni, 2006: 420~426)이라고 말한다.


이상길, <상징권력과 문화>(컬처룩, 2020), 197쪽.

정지돈의 이 소설집 제목 또한 영화제목에서 차용된 것이고, 그에게 문학장의 공인된 제도적 인정의 세례를 가능케 했던 단편 "건축이냐 혁명이냐"도 르코르뷔지에의 인용이다. 그렇다. 만약 그가 어떤 목적, 기획 하에 자신의 문학을 밀고 나간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몇 가지 길들 중 하나는 마땅히 바로 저 인용문에서 발견한 벤야민의 소망과 고다르의 구상을 연상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지돈의 작업은 한 평론가와의 대담이 확인시켜주듯, 문학적 전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저 충실하게 문학적 과거를 정리하고 이해한 자가 보일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인 것이다. 벤야민과 고다르가 '예술적 현재'에서 그러하듯, 차라리 정지돈은 자신을 후위라고 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삼십여 년 전에 출현했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거의 사멸(혹은, 잠행)한 듯한 '포스트모던'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논픽션과 에세이, 자서전 등과 같은 형식을 넘나드는 듯하지만, 그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 형식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한 세계의 탐구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가 동료들과 함께 이름붙인 (로베르토 볼랴뇨의 '밑바닥사실주의-내장사실주의'에 대한 패러디인) '후장사실주의'란 개념은, 그가 명시한 것처럼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라면, "세계의 인용"인 문학에 대한 탐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재로선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탐구'로 한정될 뿐인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그들의 활동을 통해서 서서히 현실화, 실체화될 것이다. 


다만, 그들의 정체성을 굳이 문학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면, 1950년대 프랑스에서 본격화하기 시작한 누보로망, '새로운 리얼리즘'의 이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즉, 모든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의 성격, 의미, 형식 등을 새롭게 정립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세계를 탐구하는 일종의 인식의 방식으로서 취해지는 소설, 아니 글쓰기 말이다. 그러므로, 정지돈과 그의 동료들은 결코 전위일 수는 없다. 그들은 자처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들이 현재 한국문학의 전위라면 그건 어떤 태도를 통해서일 것이다. '후장'사실주의라는 패러디 조어(造語) 자체가 그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누군가의 평가에서 '태도'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는 사항이 또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은 제법 전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한국적인' 전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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