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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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보다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지돈이 그러하듯 '인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자 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소망을 연상시키는 고다르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파이니는 "언젠가 그가 모든 것을 다른 곳에서 빌려온 영화를 꿈꾸었다면 <콜라주 드 프랑스> 전시는 아마도 이 꿈을 실현시켜 주었을 것"(Païni, 2006: 420~426)이라고 말한다.


이상길, <상징권력과 문화>(컬처룩, 2020), 197쪽.

정지돈의 이 소설집 제목 또한 영화제목에서 차용된 것이고, 그에게 문학장의 공인된 제도적 인정의 세례를 가능케 했던 단편 "건축이냐 혁명이냐"도 르코르뷔지에의 인용이다. 그렇다. 만약 그가 어떤 목적, 기획 하에 자신의 문학을 밀고 나간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몇 가지 길들 중 하나는 마땅히 바로 저 인용문에서 발견한 벤야민의 소망과 고다르의 구상을 연상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지돈의 작업은 한 평론가와의 대담이 확인시켜주듯, 문학적 전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저 충실하게 문학적 과거를 정리하고 이해한 자가 보일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인 것이다. 벤야민과 고다르가 '예술적 현재'에서 그러하듯, 차라리 정지돈은 자신을 후위라고 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삼십여 년 전에 출현했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거의 사멸(혹은, 잠행)한 듯한 '포스트모던'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논픽션과 에세이, 자서전 등과 같은 형식을 넘나드는 듯하지만, 그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 형식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한 세계의 탐구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가 동료들과 함께 이름붙인 (로베르토 볼랴뇨의 '밑바닥사실주의-내장사실주의'에 대한 패러디인) '후장사실주의'란 개념은, 그가 명시한 것처럼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라면, "세계의 인용"인 문학에 대한 탐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재로선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탐구'로 한정될 뿐인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그들의 활동을 통해서 서서히 현실화, 실체화될 것이다. 


다만, 그들의 정체성을 굳이 문학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면, 1950년대 프랑스에서 본격화하기 시작한 누보로망, '새로운 리얼리즘'의 이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즉, 모든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의 성격, 의미, 형식 등을 새롭게 정립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세계를 탐구하는 일종의 인식의 방식으로서 취해지는 소설, 아니 글쓰기 말이다. 그러므로, 정지돈과 그의 동료들은 결코 전위일 수는 없다. 그들은 자처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들이 현재 한국문학의 전위라면 그건 어떤 태도를 통해서일 것이다. '후장'사실주의라는 패러디 조어(造語) 자체가 그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누군가의 평가에서 '태도'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는 사항이 또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은 제법 전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한국적인' 전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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