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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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이 얽히고 설킨 글, 작가의 의도를 꽁꽁 숨긴 지독한 은유의 글, 내용 전개가 사건 위주가 아닌 관념 위주의 글들을 읽으면 내 머리는 복잡해진다. '어렵다'는 탄식을 나도 모르게 수없이 쏟아낸다.

특히나 사건을 통해서 저자의 집필의도(주제)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통해서든, 설명조의 문장을 통해서든 말해버리는 책을 읽을 때는 왠지 나의 생각이 강요당한 것 같은, 상상력을 제한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소설을 통해 뭔가를 꼭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것 같은 글을 읽을 때면 콩나물 교실에 있는 것 같은 답답증을 느낀다.

책장을 덮었으되 나는 아직 모르겠다. 멸치가 뭔지......

순수문학? 멀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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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 장승업 - 상
민병삼 지음 / 이손(구 아세아미디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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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피땀 어린 역작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라 한다면 소설 <오원 장승업>은 소설로서의 맛이 덜하다. 사고무친의 거렁뱅이에서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화가로서 굴곡이 심한 생을 살다간 사람의 일생을 그린 작품치고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고무친의 고아, 거지에서 한국 화단의 기인, 대가의 생을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린 인물이라서 그 소재는 독자로 하여금 대단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소설 <오원 장승업>은 그 이야기의 내용이나 전개가 너무 평이하다.

구한말의 시대적 배경, 천주교 박해에 대한 설명 등은 과연 이용후의 이야기인지, 장승업의 이야기인지...... 독자에게 너무 큰 허탈감을 안겨주는 구성이다. 또한 극적 에피소드가 없었다는 점,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도록 '쪼이는 맛'이 없는 너무 평탄한 전개였다는 점 등등......

실재했던 인물을 소설로 다루면서 사실에 입각해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말이지만 그 원칙에 소설의 재미가 짓눌려버렸고, 극적 에피소득가 거의 없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사실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정신과 연구 노력의 흔적, 속담 등을 맛깔지게 섞은 문장은 장인의 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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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1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 민음인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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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내가 첫번째 서평자네? 어쩐 일이지? 이 좋은 책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은 것인가? 흠, 좋은 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라도 서평을 자알 써야겠구먼. ^^;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랄까......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은 후 책장을 탁 접고 나면 가슴이 뿌듯해지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책에는 세 종류가 있다. 우선 첫번째는 읽고 난 후 여태껏 뭘 읽었는지 내용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 심심풀이 땅콩 같은 그저 그런 책이 있고, 두 번째는 읽는 중간중간에도 쓰레기 같은 책을 보고 있다는 혐오감과 남사스러움에 부들부들 떨지만 책값이 아까워 끝까지 읽다가 읽고 난 후에는 기어코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리는 책이 있다. 세 번째는 책다운 책인데, 우선 읽는 중간에도 여러 사람 앞(나처럼 출퇴근길의 전철 안)에서 이 책을 펴고 읽고 있다는 것 자체가 왠지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옆에서 기웃거리는 사람에게 '함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며, 다 읽은 후에는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키가 한 뼘은 자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바로 요 책이 그런 책이다.

많이, 자주는 보지 못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터라서 '그럼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여진단 말인가' 하는 궁금증을 풀 수 있을까 해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고 보너스까지 주었으니, 영화(물론 책도 해당된다)를 옳게 보는 혜안을 얻은 듯한 기분이 그것이다. (이제 영화는 꼼짝 마라! 다)

대부분의 영화 팬들은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던지 그 방법적인 것을 궁금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와 감독을 비롯한 영화제작진들이 어떤 의도로 영화를 만들었는가를 알고 본다는 것은 단지 눈앞에 전개되는 화면과 스토리를 쫓으며 수동적으로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지 않을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외하고 이 하나만을 건진다고 해도 대단한 소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계속 볼 것이며, 책에 버금가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시나리오를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려 한 것이지만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설명을 위해서 저자가 예로 든 많은 영화의 속뜻을 음미하다보면 파란 만장한 인생사를 압축한 '책 속의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는 글쓰는 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중심사상이 읽으면 읽을수록 절실히 공감하게 된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울고 웃고 하는 이유가 화면의 현란함에 있지 않고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의 절절함에 있듯이 말이다.

이 책은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다. 아니, 쉽게 훌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훌륭한 이야기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 즉 세계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이런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은 작가의 외로운 임무이다' ''재능은 사실에 대한 지식과 아이디어들에 자극받아야 한다. 연구하라. 재능에 영양을 공급하라' '실제로 가장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영화적 경험은 사건에 대한 반응과 그를 통해 얻는 내적 통찰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에서 얻어진다' 등등 거의 매 쪽마다 저자의 확신에 찬 정언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머리가 저릿해지는 한 줄의 글 때문에 멈칫거리고,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데는 여타의 책보다 두세 배의 시간을 할당해야 한다. 그 공은 흐믓한 보람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을 항상 가까이에 두고 이 책의 원칙들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보고 또 봐야 겠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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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처럼 행동하라 - 탁월한 CEO들에게서 배우는 10가지 행동원칙
데브라 벤튼 지음, 신완선 옮김 / 더난출판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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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적인 것을 선호하고 논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서구인들은 문제에 대해서 왜, 어떻게라는 식의 근원과 직접적인 방법을 요구하는 날카로운 질문 던지기에 익숙하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리해낸다. 이 책 'CEO처럼 행동하라'도 그런 서구인의 사고 행동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CEO. '그들은 사회적으로 명망받으며 부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니 그들처럼 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보통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처럼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을 이 책은 많은 CEO들의 사례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책의 부피는 얼마 되지 않지만 참으로 많은 내용을 핵심적인 사항만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을 다른 두 명과 돌려가며 읽은 후 서로 책에 대해 토론을 했다. 나머지 두 명은 '별로'였다는 반응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너무 보편적인 내용을 나열했다'는 것이다. 나는 소중한 말들이 너무 많기에 노트 3장에 정리를 했다. 감동받았던 내용을 잊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 '자신의 행동지침을 수립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원칙을 세우고 그를 지키라는 것이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성공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에디슨은 발명에 '미쳤다'가 그 분야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다. 빌게이츠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추구하여 세계 제일의 거부가 됐다.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서 '미치고', 남이 비웃는다고 해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의 근원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CEO들은 행동지침을 지키는 데 명수였던 것이다.

'행동지침'이란 바로 사물을 보는, 세상을 대하는 자신의 확고한 원칙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줏대'라고나 할까. CEO들은 자신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 사람은 먼저 자신의 줏대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반대로 자신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도 없고, 있더라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결코 CEO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거 쉽구만. 행동지침 하나만 세우면 된다니'하고 쉽게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이 글(행동지침)이 나오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파커앨범의 CEO인 존 크렙스가 한 말이다. 그의 행동지침은 딱 세 줄이다.

이 책은 CEO들이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를 알려주는 대신 진정한 성공이란 인격적인 성숙이다 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그것을 각 CEO들이 어떻게 완성시켰는가를 제시한 바가 더 큰 것 같다. 그 점에 더 이 책을 읽은 의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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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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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해서 가족과 인생을 버렸다. 이 문제만 놓고 얘기하고 싶다. 난 그런 선택을 내린 스트릭랜드를 혹평하고 싶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누가 말했던가. '인생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 결론이라면 그런 철학은 하지 않겠다 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술을 위해서 한 가정을 파괴해야 한다면 그런 예술은 하지 않겠다'라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예술을 지상 지고의 대상으로 숭상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예술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조미료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나는 물론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예술은 우리 삶의 부속물이지 그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존귀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예술이 인간의 정신과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인간의 정신,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 정서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그것이 표현되었느냐 아니냐가 아닌 것이다.

오래된 일(사건)이지만 한 사진작가가 여자에게 독을 먹이고 죽어가는 장면을 촬영했던 적이 있었다.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사진작가에게서 혐오스런 이기적 탐욕만을 느꼈을 뿐이다. '죽음에 직면한 고통, 죽음의 문턱에 선 인간의 리얼한 표정' 등은 대상을 죽이면서까지 담아내야 모습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을 창작활동이라 하지 않는가.

아프리카에 한 부족이 있는데, 그들은 종교의식에 처녀의 몸에서 벗겨낸 등가죽에 태어난 지 1년이 못된 때 어린아이의 피로 쓴 부적을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처녀성을 간직한 고귀한 처녀를 제물로 삼고, 아직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순결한 생명의 정수로 우리들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역설한다고 한들 그것을 그들의 주장대로 이해해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예가 너무 극단으로 흐른 것 같지만, 요지는 이렇다. 너무 극단으로 치우친 종교를 우리는 '사이비'라 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목숨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살지 않았다. 나는 살기 위해서 소설을 썼을 뿐이다.' 한 여류 소설가가 한 말이다. 나는 그가 (경제적, 사회적으로)어려운 상황을 버티며 글을 쓰고 있는 점을 높게 사면 샀지 소설을, 문학을, 예술을 하찮게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스트릭랜드도 가정을 지키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일찍 죽지 말고 오래 예술을 '즐기듯이' 했어야 했을 것이다.

여담) 이미 작고한 우리나라 화가가 청각장애인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그림을 그려서 팔았다. 그런데 문제가 됐다. 너무 많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졌다나? 이런 바보 같은 평이 어디 있는가. 예술을 '숭배'하는 배부른 바보들의 생각이라고 일갈하고 싶다.

그 화가가 인간을 향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그림이 더 정감이 간다. 고갱, 고흐의 그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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