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술을 위해서 가족과 인생을 버렸다. 이 문제만 놓고 얘기하고 싶다. 난 그런 선택을 내린 스트릭랜드를 혹평하고 싶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누가 말했던가. '인생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 결론이라면 그런 철학은 하지 않겠다 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술을 위해서 한 가정을 파괴해야 한다면 그런 예술은 하지 않겠다'라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예술을 지상 지고의 대상으로 숭상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예술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조미료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나는 물론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예술은 우리 삶의 부속물이지 그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존귀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예술이 인간의 정신과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인간의 정신,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 정서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그것이 표현되었느냐 아니냐가 아닌 것이다.

오래된 일(사건)이지만 한 사진작가가 여자에게 독을 먹이고 죽어가는 장면을 촬영했던 적이 있었다.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사진작가에게서 혐오스런 이기적 탐욕만을 느꼈을 뿐이다. '죽음에 직면한 고통, 죽음의 문턱에 선 인간의 리얼한 표정' 등은 대상을 죽이면서까지 담아내야 모습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을 창작활동이라 하지 않는가.

아프리카에 한 부족이 있는데, 그들은 종교의식에 처녀의 몸에서 벗겨낸 등가죽에 태어난 지 1년이 못된 때 어린아이의 피로 쓴 부적을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처녀성을 간직한 고귀한 처녀를 제물로 삼고, 아직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순결한 생명의 정수로 우리들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역설한다고 한들 그것을 그들의 주장대로 이해해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예가 너무 극단으로 흐른 것 같지만, 요지는 이렇다. 너무 극단으로 치우친 종교를 우리는 '사이비'라 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목숨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살지 않았다. 나는 살기 위해서 소설을 썼을 뿐이다.' 한 여류 소설가가 한 말이다. 나는 그가 (경제적, 사회적으로)어려운 상황을 버티며 글을 쓰고 있는 점을 높게 사면 샀지 소설을, 문학을, 예술을 하찮게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스트릭랜드도 가정을 지키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일찍 죽지 말고 오래 예술을 '즐기듯이' 했어야 했을 것이다.

여담) 이미 작고한 우리나라 화가가 청각장애인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그림을 그려서 팔았다. 그런데 문제가 됐다. 너무 많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졌다나? 이런 바보 같은 평이 어디 있는가. 예술을 '숭배'하는 배부른 바보들의 생각이라고 일갈하고 싶다.

그 화가가 인간을 향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그림이 더 정감이 간다. 고갱, 고흐의 그것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