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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를 뽑다
제시카 앤드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작가와 강렬한 빨간색 표지를 보고 호기심부터 일었다.
제목도 독특해서 과연 어떤 내용의 소설일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번역가로서의 호기심부터 발동해서 원제를 보았더니 원제는 '젖니'라는 명사만 있었다.
MILK TEETH.
그럼 왜 한국에서 출간할 때는 원서 제목에도 없는 '뽑다'라는
동사를 굳이 붙여서 제목을 지었을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소설을 읽어나갔다.
(원서 표지가 좀 더 강렬한 이미지이다. 한국 표지를 보고 나서 이미지를 찾아서인지
한국 표지가 더 예쁘고 소설의 이미지를 더 잘 표한한 듯이 느껴진다)
소설은 좀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 1부, 2부, 3부, 4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에서는 짧은 챕터로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의 1부는 런던에서 '당신'과의 만남
2부는 '당신'이 먼저 바르셀로나로 갔고, 당신과 한 달을 지냈다가
다시 나의 런던 생활로 돌아온 '나'
3부는 다시 '당신'에게 다시 갔다가 바르셀로나의 다른 장소에서 혼자 보낸 시간
4부는 '당신'과 다투고 홧김에 말없이 시골로 떠나 버린 '나'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주인공 '나'라는 여성은 28세로 유복하지도 않고,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며
욕망을 숨기고 움츠러들며 지내다 십 대 후반에는 친구를 따라 방탕하게 살았다.
그러다 지금의 연인을 만나 혼란스러워한다.
연인을 사랑하지만 마음껏 표현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설명하거나 표현하는 데에도 서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다툼으로 연인과 멀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지내왔는지 말할 용기도 없다.
어쩌면 양가감정이 생기면서 더 혼란스러워지는 건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좋지만, 자신을 잃고 싶지는 않고
이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때로는 자유분방했던 삶이 그립기도 한 여성.
작가는 이런 주인공의 심리를 정말 잘 표현해 내었다.
이 주인공이 쓴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챕터의 길이가 정해져 있지는 않으나 짧은 것은 한 페이지 분량 정도인 곳도 있고
긴 곳은 대여섯 장 정도로 챕터별 길이가 길진 않다.
마치 숏폼을 보는데 익숙하여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는
요즘 세대(작가가 30대 초반이다)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주인공 '나'가 현재 상황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개 소설은 일상에서 비일상의 사건이나 요소가 생기면서 전개되는데
이 소설은 '나'의 일상에 단순한 사건이나 요소가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연인을 따라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가서 자신의 상황을, 마음을
돌아보면서 어떻게든 자신을 찾으려 하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 여성을 다른 나라에 보냄으로써 휘몰아치는 감정과 심리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한 장치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최근 읽은 책 중에 이렇게 많은 인덱스를 붙인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역서를 읽으면 두 가지 이유로 원래 문장이 궁금해지는데
번역이 매끄럽거나 혹은 뭔가 어색하게 느낄 때이다.
이 책은 정말 매끄러워서 번역가 이름을 여러 번 봤다가
다시 여러 번 문장을 읽고 인덱스 테이프를 마구 붙이고
연필로 줄도 많이 그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같은 여성으로서 주인공 '나'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되기도 했다.
이토록 너를 사랑해 주는 남자인데 왜 확신을 못 가지는 거야?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가
그래 남자가 네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너로서 온전히 네 삶을 지켜야지.
그런데 네 삶은 그럴 가치가 있는 거야?
그저 이 남자 옆에서 행복한 삶을 살면 안 되니? 하는 마음도 같이 들었다.
이런 점이 주인공 '나'가 계속 고민했던 문제일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인덱스를 붙인 문장을 보면서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들겠다 싶었다.
또 다른 문장을 찾아서 연필로 줄을 긋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과 결이 비슷한 다른 책이 한 권 떠올라서 잠시 소개를 해보자면
《지나친 고백》이란 제목의 책으로 섭식장애로 힘들어하던 작가의
실제 상담 내용을 에세이로 쓴 책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과는 확연히 다른 탄탄한 직업을 가진 여성이지만
섭식 장애가 있고 끝없이 사랑으로 고민하는 점은 비슷하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다 읽고 나면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책이 있다.
《젖니를 뽑다》도 그러하다.
두 번, 세 번 읽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때마다 계속 줄치는 문장이 늘어날 것 같다.
#인플루엔셜출판사 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쓴 리뷰입니다.
하나의 삶을 떠나 또 하나의 삶으로 스며드는 것이 정말이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본다. - P134
내 안에는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견고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있다.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며 가장자리만 맴도는 것에, 사진의 주변부에 찍힌 낯선 사람,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정체불명의 여자라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 P135
길을 잃은 단어 하나가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오래된 동전처럼 우리 사이의 허공을 맴돌고 있다. - P299
상당히 큰 돌 부스러기가 피부에 박혀 있다. 흔들리는 젖니를 비틀어 잇몸에서 뽑아내듯, 살짝 비틀어 조심스럽게 파내고 나니 아주 작고 축축한 구멍이 남는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잡고 굴리며, 만약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지니고 다녔을지 궁금해진다. 내 피부가 치유되며 그 작은 돌조각 위로 자라서 그것을 내 안에 가두는 것을 상상해 본다. 그것이 덧날지, 아니면 내 몸이 그것을 분해할지 궁금하다. 어쩌면 나는 그것이 거기 박혀 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지니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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