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클 사막에는 매일 다른 돌이 눈을 뜬다 - 17,000km 가장 찌질한 로드트립 여행기
박힘찬 지음 / 하모니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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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구글 지도에 피나클 사막을 검색하는 일이었다. 우리집 주변을 보여주던 지도 위에 피나클 사막을 검색하니 단숨에 초록으로 가득찬 벌판의 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조금씩 지도를 축소하며 피나클 사막을 한 눈에 담아 보았다. 도라에몽의 주머니에서 꺼낸 '어디로든 문'을 열고 순식간에 방 안에서 호주로 떠난 듯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이 책은 호주로 로드트립을 떠난 두 남자-라고 쓰고 한 남자의 처절한 여행 일기라 읽어야 할- 이야기이다. 얼마나 치열하고 처절한 로드트립인지 웃고 있으면서도 이 상황에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막막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슴 한 켠에 조금 남아 있던 로드트립의 낭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래도 되나 싶은 일기를 읽으며 내 일이 아니라 참 다행이다 생각했다. 새삼 젊은이들(?)의 패기와 열정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여행이여도 부러웠다. 풍족하지 않은 여행을 떠날 용기, 일단 부딪혀보자 하는 기세,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건강함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 누군가 와서 자동차 한 대와 생존할 정도의 자금을 줄테니 자네 떠나볼텐가 묻는다면 손사레를 치며 몇 걸음 물러설 것이 분명하다. 나이를 먹을 수록 찌질하고 처절한 여행보다는 조금은 여유롭고 안전한 여행이 좋다. 값이 나가더라도 편안하고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푹신한 침대에 묻혀 하루의 여독을 풀고 싶고 숨막히게 꽉찬 일정보다는 체력에 맞는 정도의 일정을 소화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농담 섞인 그의 일기가 많이 부러웠다. 노는게 제일 좋아도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총 6부로 나누어진 그들의 로드트립을 따라가다 보면 호주의 다양한 장소를 알 수 있는데, 나에겐 도라에몽의 '어디로든 문' 겪인 구글맵을 통해 호주 일정을 쫓다보니 확실히 여행을 따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기대한 곳이 상상보다 기대 이하인 적도 있고 그닥 기대하지 않은 장소가 인생의 장소가 되는 날도 있고 우연히 만난 만남이 뜻밖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때도 있다. 들여다보면 찌질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 투성인 여행일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일정을 이어가고 하루의 끝에 꾸준히 쓴 일기만 봐도 이미 그들의 여행은 풍성하고 좋은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여러 이야기를 가지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것이 결국은 여행의 가장 좋은 마무리가 아닐까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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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처럼, 열두달 여행 - 여행마니아 수 언니가 추천하는 국내 감성여행지 84
홍수진 지음 / 푸른향기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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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 휴가와는 관련없는 삶을 살아온지 오래라 여름은 그저 일하는 날 중에 불과하지만, 이맘쯤 되면 다들 '여름휴가'로 떠들썩한 날들이겠다. 나와 상관없지만 지인들의 여름 휴가 목적지는 어디고 왜 그곳으로 결정했는지 궁금해하는데 내가 떠날 수 없음을 지인들의 떠남으로 채우는 까닭이다. 그런 연유로 이맘때 읽게 된 <버릇처럼 열두 달 여행>은 누군가의 휴가를 엿보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제목 그대로 1월부터 12월까지 계절에 맞게 떠나기 좋은 국내 여행지와 숙소, 카페에 대한 정보들이 들어있는 책이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 목차를 꼼꼼히 보며 내가 다녀온 여행지는 몇 개가 있는지 체크했다. 그렇게 지난 여행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반가운 여행지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도 있었고 가보고 싶은 도시도 있었다. 읽으면서 아는 장소가 나오면 여기는 이 계절보다는 다른 계절이 훨씬 좋다거나 이 길보다는 반대쪽 길이 걷기엔 더 좋았다거나 하는 오지랖을 부리기도 하고, 맞아 여기 정말 그런 기분으로 오래 앉아있었지 맞장구를 치거나 나의 지난 여행을 떠올리며 문득 추억을 꺼내어보기도 했다. 좋아하는 장소가 나오면 괜히 동지를 만난 것 같아서 히죽히죽 웃으며 내가 왜 이 곳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한 번 더 떠올리는 순간이었고, 가보고 싶은 장소를 만날 땐 옆에 끼고 있던 메모지를 꺼내 꼼꼼하게 메모하며 다음을 기약하기도 했다.


다 꼼꼼하게 읽었지만 특히 집중해서 본 페이지를 고르라면 가감없이 7,8,9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나는 중이면서도 다가오는 달이라서 좀더 집중한 까닭도 있지만 더운 날에는 '어디도 가지 않고 집에 있기'가 미션이라도 되는 냥 집에 널부러져 있거나 시원한 실내를 찾아 좀비처럼 떠도는 날이 많아 도대체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하는 도움을 받기 위함도 있었다. 뜨거운 여름, 더위를 피해 실내로 파고들지 않고 조금은 밖의 뜨거움을 만끽할 여행지를 찾아 떠나볼까 싶다. 바다로, 산으로, 들로, 계곡으로.


본격적인 열두 달이 끝나고 나면 꽃의 개화 시기가 적힌 페이지가 나오는데, 나는 이 페이지를 오래 보았다. 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꽃따라 걷는 길이 모두 천국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꽃을 좋아해서 개화시기는 대충 알고 있지만, 개화에 맞춰 어디로 떠나면 좋을지 모를때 참고하면 좋겠다. 어디로 떠날까? 생각하며 고민하기보다는 꽃의 개화시기를 알아두었다가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니 왠지 나의 추천 열두 달 여행지를 적고 싶어서 적다가 채워지지 않은 달들을 바라보며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름에는 어디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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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종례 - 맛있는 학교생활을 위한 다정한 레시피
이경준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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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와 '종례'의 각각의 뜻은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쪽지종례'라는 두 단어의 만남이 고개를 갸우뚱 하게 했다. 궁금한 마음으로 펼쳐들었다가 책장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자꾸 글자가 젖어들었던 책. 그제사 표지에 적혀있던 신통해 카피라이터의 한 줄이 이해가 된다. '이렇게 종례를 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 말이다.

담임을 맡게 된다면 학생들에게 짧은 편지를 써서 종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한주의 마지막은 쪽지종례로 이어졌다. 어색해 하던 아이들이 주를 거듭할 수록 차분히 쪽지를 읽어내리는 상상만으로 나는 조금 뭉클했다. 의례 나이가 많으면 시전되는 '언니는~' '엄마는~' '아빠는~' '선생님은~' 같은 시작이 아니라 '너'와 '나'로 불리는 것도 좋았다. 수평적인 관계에서 말을 걸고 싶었다는 선생님의 깊은 배려가 좋아서 그대로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언제나 무뚝뚝하고 무섭기만 했던 6학년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사진을 한 장씩 찍어 인화하여 그 뒷장에 마지막 인삿말을 적어준 적이 있다. 활짝 웃고 있는 내 사진 뒷면에는 '차경이의 웃는 얼굴이 참 좋았어. 너의 웃는 얼굴은 주변을 환하게 해. 졸업 축하해.' 겨우 그 몇 마디가 내내 가슴에 남아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읽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안고 중학생이 되어 더 많이 웃는 아이가 되었다. 그때의 기억외에는 12년동안 단 한 번도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일지 다정하게 쓰여진 쪽지종례가 내내 눈물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선생님이 내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세워 편애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답변과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고 조언해주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상담한다고 불러 장래희망을, 성적을, 진학할 학교를 다그치는 선생님이 아니라 나라는 한 인격체를 존중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거라는 믿음. 그것이 자꾸 눈물을 쏟은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즐거운 대화로 주말을 채우렴. 나는 네가 자존심과 자존감을 모두 갖추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더 바랄게 없겠다. 행복한 사람이 되렴. 쪽지의 다정한 끝마침 덕분에 중고등학생이 된 것처럼 용기를 얻고 힘을 얻었다.




시간과 장소를 나눈 까닭은 모두 편안해지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해. ‘시간‘과 ‘장소‘의 규칙을 이해하고 지키는 것. 이걸 한 단어로 말하면 ‘교양‘이거든. 시간과 장소의 규칙을 잘 지키며 하는 말과 행동이 차곡차곡 쌓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교양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돼. 교양인이 된다면, 어디에서도 존중받고 환영받는 사람이 도리 수 있단다.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교실과 운동장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지켜보자. - P19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단다. 네가 쉬운 일, 어려운 일을 맡는다는 것은 상이나 벌을 ㅂ다는 게 아니야. 운이 좋아서 쉬운 일을 맡은 것도 아니고, 벌을 주거나 믿음직해서 어려운 일을 준 것도 아니야.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일은 없거든. 쉬운 일을 맡긴 이유는 네가 여유를 갖고, 곁을 살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어.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과 책임감이 돋보이게 되거든. 나만 즐거운 일은 순간적일 때가 많아. 그렇지만 힘겨움을 견디고 경험하는 즐거움은 주변까지 번져나가게 돼. 나는 너희들 한 사람이 세상에 즐거움을 퍼뜨리는 하나의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어. - P23

혹시, 내가 선생이라는 습관에 젖어서 너를 ‘학생‘으로 대하며 다치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만년필이나 붓처럼 섬세한 사람을 분필, 유성매직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내가 좋지 않은 선생 습관에 젖어 있다면, 언제든 얘기해 주렴. 나도 마음으로 애쓰면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니? - P36

사람은 다른 사람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을 때 진짜 어른이 된단다. - P40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할 때 즐거운지 슬픈지. 화는 언제 내고, 친구들을 대할 때 사람마다 다른 태도로 대하고 있지 않은지. 너의 모습을 스스로 관찰해보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 자기 모습을 돌아보는 사람은 한 걸음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거든. - P47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것은 어렵다. 한 사람을 관찰하고 마음 쓰는 일에 내 시간을 써야 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이 일종의 업무나 일이 되면 안 된다. 절대로 마음에 닿을 수 없다. 표정과 몸짓, 어투와 말을 읽고 상상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그 사람 마음 근처에 다다른다. 상처 입은 마음은 다른 사람이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글 같은 상처의 숲을 뚫고, 근처까지 다가와 준 사람의 마음기척이 느껴질 때, 스스로 치유하게 되는 것 같다. - P57

나는 네가 우연에 의존하지 않길 바라. 뜻밖의 좋은 결과에는 겸손할 줄 알고, 의외의 낮은 결과를 마주해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어. 그렇게 몇 년 지내며 진짜 실력을 닦으면, 머지않아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 P93

편하게 고여 있지 말고 시도하렴. 실수해도 되니까, 그냥 한번 해보렴. 불안과 두려움에 지지 말자. 나이와 상관없이 독서하고 여행해야 더 깊은 사람이 된단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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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이는 마음은 그냥 거기에 두기로 했다
권진희 지음 / 하모니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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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는 책이었다.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하여,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제는 지나간 계절처럼 잊혀졌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읽으면서 나 역시 오랜만에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낯선 여행지에서 당황한 순간에 히어로처럼 나타나 다정을 베풀던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의 절반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저 웃으며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던 순간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 거리를 무시하고 자주 파고 들어와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들, 그리하여 잊혀진 사람들.

그러고보면 삶에 사람이 없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혼자라고 느끼던 그 순간마저도 혼자인 경우는 드물었고 언제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관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던 20대가 지나고 어느정도 나를 지키는 범위 내에서 나만의 관계의 철학(?) 같은 것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관계가 발에 걸려 넘어지는 날이 잦았다. 다정이라는 말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아 다정해지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나는 결국 다정에 이끌려 유야무야 흘러가는 날도 많았다. 인생은 내 선택의 연속이라는데 관계에서만큼은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관계가 늘 힘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이유없이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그렇게 되려고 애썼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 나에게 말로 상처를 줬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저렇게 말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되고 오래됨을 무기로 나를 난도질하는 지인을 보면 사람에게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것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관계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관계를 통해 내가 원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관계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흑백으로 담긴 사진들이 오히려 좋았다. 떠오른 사람들이 현재 진행형인 경우보다는 스쳐지난 경우가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지나간 계절들에게 안부와 다정을 담아 편지를 적고 싶어졌다. 짙은 초록으로 내달리다 네가 생각났어,로 시작하는 편지에 나와 너의 안녕보다는 지나간 시간들의 그리움과 그때의 풋풋했던 우리의 추억을 나열하고 그립다고 모든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단호함을 넣어 부디 평안하라는 끝 인사로 마무리하는 이기적인 편지. 물론 전해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사람을 상처 입히는 건 재능이나 소질이 아니라 친밀도에 비례한다. 많은 관계에서 친밀한 무례에 쉽게 상처받아왔다. 그 상처는 쉽게 낫는 것이 아니어서 흉터가 되지 못하고 착실하게 적립되어 안에서부터 나를 좀먹어 들어가기도 했다.

번번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외로우니 사람이 그리워서 혹은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질질 끌려 다니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 주고받는 감정의 색과 질량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내 애정을 무기삼아 무례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보다 내가 지치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 그때부터 아직까지 모든 우리는 천천히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지 않은 거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 P83

여행 동안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인연이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 덕분으로 어제보다 오늘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기 위한 시도를 한다. 또 만날 당신들에게 나 역시 근사한 선물이 되려고. - P101

인간이 겪는 많은 일들이 희석되고 잊힌다. 그렇게 결국 잊힐지 모르는 일들을 가지고 당신의 아픈 구석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 말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서. - P142

고여 있다고 여겨지는 나의 시간들. 어떤 결과물을 남기지 않기에 그 득실을 계산하기 어려운 그런 시간들을 사람들은 쉽게 무시하고 평가한다. 남 일에 오지랖 부리며 함부로 말하는 그 사람들이 덜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런가 나 지금 괜찮은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괜찮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도 오늘은 선물이라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같은 고민을 겪는 또 다른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 P144

상실을 상상하면 공허하고 두려운 것들은 원한 적도 없이 가진 것들이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어떻게 가졌는지 몰라서 잃는다면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마음을 쏟게 되어버린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의 상실을 떠올리고는 너무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이제껏 내가 사랑한 많은 것들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이미 아는데,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안팎으로 한결 간소하고 청빈한 생을 살았을 텐데.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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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 까미노 - 스물아홉, 인생의 느낌표를 찾아 떠난 산티아고순례길
김강은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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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나 진짜 산티아고 걸으러 가야 할까 봐'였고 두 번째는 나의 스물아홉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첫 번째 생각은 작년 말부터 올해를 가득 채워 산티아고를 부추기는 수많은 콘텐츠가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스물아홉에 순례길에 오른 작가의 나이 때문이었다. 아직 아홉수라곤 9살, 19살, 29살 세 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유독 29살이 힘들었던 것은 10대부터 20대를 모두 지나오면서 겪은 다양한 시행착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끝없이 이어져 오던 시행착오를 울며 견디다 보니 어느새 20대의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 편으로 아무것도 이루어둔 것이 없는데 벌써 30대라니,라는 생각이 29살의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의 29살도 참 많이 힘들었더랬다. 남들처럼 내가 벌써 서른이라니!라는 생각에 힘들었다기보다는 20대부터 쭉 이어오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많이 방황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주변의 "왜?"로 시작하는 말들을 견디는 일이 유독 힘들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때의 나에게 산티아고 여행길에 오를 것을 추천하고 싶어졌다.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묵묵히 걸으며 새로운 시작을 고민하고 때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걷다 보면 함께 걷는 사람들이 생기고 의지하고 그렇게 또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지 않을까 하면서.


오랜 벗과 각자의 고민을 안고 14kg의 배낭을 메고 걷는 일.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굳이 실천에 옮긴 적은 없어서 그녀들을 많이 부러워했다. 여러 방면에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오랜 벗과 겨우 1박 2일을 떠나는 여행길마저도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잦은데 800km를 함께 걷는 일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때론 짠하고 때론 뭉클해서 마지막에 겨우 전한 고마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 오랜 벗들에게 자네 나와 산티아고를 가지 않겠나? 물음을 던지면 과연 몇 명이 긍정하며 바로 가방을 짊어질까 생각해봤다. 긍정은커녕 바로 곡소리부터 나오지 않을까. 휴가를 못 내서... 야근에 치여서... 돈이 없어서... (눈물)


사실 같은 여행지를 다녀오고도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들은 한없이 애틋하고 왜인지 동지애가 샘솟아 금방 친해지고 더 의지하게 되는데 일반 여행보다 훨씬 더 몸이 힘들고 고단한 산티아고를 향한 길 위의 인연은 얼마나 반갑고 애틋할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뭉클하다. 서로에 의지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면 어느새 또 만나게 되는 순례자들의 만남을 보며 자주 웃었다.

<스페인 하숙>이라는 예능을 보며 체크인하는 순례자들이 이런 말을 참 많이 했다. "곧 일행이 올 거예요", "여기서 또 만나네요" 사람마다 걷는 속도가 다르고 체력이 다르다. 누군가는 새벽의 길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오후의 빛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곳에 오래 머물다 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길을 걷지만 함께 걷는 것을 강요하지 않을 것. 혼자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 것. 그게 참 좋았다.


넓게 펼쳐진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 힘들어도 계속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홉수, 까미노>를 읽으며 실린 풍경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마치 내가 800km를 걷는 순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도를 내어 걷는 날엔 나도 속도를 내어 책장을 넘기고 조금 천천히 걸을 때는 나도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그때마다 반기는 풍경이 좋아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는데 들었던 이야기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만화 <원피스>의 완결에 대해 왈가왈부 말이 많은 와중에 알고 보니 원피스는 없었다는 말이 가장 충격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의 결말 역시 비슷한 느낌인데 충격보다는 이제는 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원피스를 찾아 떠난 여정이었지만 그 여정에서 만난 멋진 동료와 추억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 앞으로를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 그리고 답을 찾아 떠난 까미노에서 진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길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과 추억과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아 앞으로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이 어쩌면 같은 의미였다는 걸.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해야 할 일들을 만들고 그것들에 쫓겨 왔던, 그러나 정작 행복과는 멀어져 가던 나는 오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보다 행복이란 감정을 쫓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이 순간의 우리는 어떤 속박과 굴레도 없는 자유로운 순례자였다. - P34

산티아고라는 한 지점을 향하는 까미노는 보통의 여행이랑 다르다. 많은 것들이 다르겠지만, 그중 가장 매력적인 차별점은 여행이라는 카테고리보다는 더 협소해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유대감을 주지만, 군대나 동아리 같은 집단보다는 개별적인 목적과 경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길을 걷기에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개개인의 경험이나 느낌이 조금씩 달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참 좋다. 이 길이 종교적인 길이라고 해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속 재료가 모이니 더 맛있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어느덧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다국적 순례자들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의 맛깔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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