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서두에서 저자는 이 책을 서술하게 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그가 1972년 열대의 섬 뉴기니 해변을 거닐고 있었을 때 우연히 만난 얄리라는 정치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13,000여 년 전,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각 인종 (또는 대륙)간에 나타난 불평등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저자의 집필 동기인 셈이다. 이 정도 되면 프로젝트 팀이라도 하나 꾸려 진행해도 버거울텐데, 자신의 역사, 문화, 의학, 지리 등 각 분야의 지식을 적절히 버무려 하나의 먹음직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 놓았으니,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는 책 표지의 수식어가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간만에 이렇게 두꺼운 책을 소화해 낸 나도 자랑스럽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인종간 또는 대륙간 불평등은 총, 균 , 쇠를 누가 먼저 만들어 사용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민족간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걸까? 가장 흔한 설명은 민족 간의 내재적 능력을 드는 경우다. 인종간에 잠재하는 내적 능력 차이가 현재의 인종간 불평등을 낳았다는 것인데, 이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적용한 경우라 하겠다. 하지만 이는 그저 결과를 보고 원인을 추측한 것에 불과하며, 암묵적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시키는 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견해를 단호히 거부하며(‘역겹다’라는 표현을 썼다), 인종간 불평등의 원인을 지리적 환경으로 돌린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을 환경으로 돌려 버리는 것은 책임을 회피한다는 느낌을 주며, 인간 고유의 창의성이나 노력을 완전히 무시한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저자의 흥미진진한 얘기와 풍부한 사료들을 근거로 한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이런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을 축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각 지역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지구상의 일부 지역에서만 야생 식물의 작물화와 야생 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선택받은 그 지역은 유목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 등 정주(定住)형 사회로 변하게 된다. 잉여식량의 저장은 인구 증가를 초래하고 권력은 중앙집중화 된다.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비생산자 계급(정치가, 발명가, 전사 등)을 탄생하게 하며, 이렇게 조직화된 사회가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사회와 충돌했을 때 우리는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 (여기서의 ‘충돌’은 종교간 이간질을 부추기는 헌팅런類 문명충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총, 균, 쇠와 같이 기술과 무력을 보유한 민족이 그렇지 못한 민족을 침략하여 지배할 수 있었고, 그러한 역학 구조가 오늘날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세균에 대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특히 세균의 입장에서 그들의 숙주인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가 생존 기계인 인간을 바라보는 그것과 흡사하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염병을 들자면 홍역, 결핵, 천연두, 콜레라, 흑사병 그리고 현대의 에이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모두 우리와 가까이 생활하는 동물들, 특히 가축들에게서 변형, 전염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가축의 동거(?) 생활이 병균과 인간간의 치명적 숙명관계를 야기한 것이다. 어떤 병균이 퍼져 해당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 그 중 항체 형성에 성공한 사람만이 살아 남게 되며 그 형질은 후손에 유전된다. 그러나 다시 이를 극복한 세균이 다시 나타나지만, 인간 역시 결국 이를 물리칠 수 있는 면역력을 만들어 낸다. 이런 상호 진화를 거듭해 가며 인간과 세균은 공존해 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과 균은 천적 관계가 되는데, 서로 완벽한 협력자가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해당 균이 면역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퍼지는 경우인데,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으로 전염병이 퍼져 원주민의 대부분을 몰살시킨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실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숫자보다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숫자가 월등히 많다고 하니 실제 신대륙 약탈, 정복의 주인공은 세균일지도 모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나 피사로의 잉카 정복과 비슷한 사례를 동양에서 들자면 15세기 정화의 원정이 있다. 몽고의 압제 아래 추락한 왕조의 명예를 되돌리고 국위를 과시하고자 명은 7차례에 걸쳐 대규모 원정을 내보냈는데, 시기적으로 콜럼버스보다 90년 앞선데다가 선단의 규모나 선박 구조면에서 콜럼버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정도로 우세했다. 그런데 왜 콜럼버스나 피사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저자는 당시 중국과 유럽의 서로 다른 상황으로 그 차이를 설명한다. 저자의 설명을 빌리자면 중국은 이미 통일이 된 상태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에, 추가적인 영토확장의 필요성이 없었다. 오히려 통일된 땅덩어리를 현상 유지하는 게 지상 과제였을지 모른다. 중국이라는 땅 덩어리는 유럽 전체와 맞먹지 않는가. 또한 정화의 원정은 영토 확장이나 부 획득과는 거리가 먼, 대외 과시용이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유럽은 항상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국가간 끊임없는 경쟁관계가 유지되었으며 외부로 눈을 돌려야 하는 경제적 동기가 있었다 . 중국은 이미 정치적으로도 통일된 국가였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경직화될 수 밖에 없고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부족했다. 그래서 어떤 정치적 결단이 내려지면 그것은 실행에 옮겨질 수 밖에 없고, 제 길을 다시 찾아 가기란 쉽지 않다. 그에 반해 유럽의 대외 진출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국가가 어떤 업적을 성취하게 되면, 다른 국가들은 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중국과 유럽 양자 사이에 각자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다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현재의 중국과 유럽을 비교함으로써 유럽의 체제가 더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견해라 볼 수 없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중국과 인도의 경제력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흥망성쇠의 과정을 겪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국가의 멸망을 강력한 외침과 내부의 부패라 배웠지만 이건 무의미한 결론일 뿐이다. 국가가 성장한 사유와 쇠퇴한 사유가 혹시 같은 이유일 수 있지 않을까? 즉 어느 국가가 어떠 어떠한 이유로 흥하게 되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주변 여건이 변하면 그것이 오히려 국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국가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때 죽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것도 단지 시기상의 차이일지 모른다.. 이 책의 제목처럼 미국은 총(2차 대전)으로 일어선 나라다. 그런 미국이 오늘날 행하는 저 오만하고 무책임한 대외정책을 보노라면, 다음 격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