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즉, 지섭과 반대되는 인물상의 자들은, 명예와 칭찬, 그리고 상에 욕심을 부리며, 그들 사이에서 존경 받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정신적인 ‘난쟁이’이다.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일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성장을 멈춘 이’이다. 이들이, 극단적 대립의 위치에 존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대립적 위치에서 소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경훈이 사실은, 소통 가능성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처럼, 이 눈에 보이는 극단적 대립의 존재들을 좀더 심도 있게 바라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영수가 목표로한 회장이 아닌, 동생을 잘못 알고 죽였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명예와 칭찬, 그리고 상에 욕심을 부리며, 그들 사이에서 존경 받고 힘을 사용하려는 자들’에게, 명예와 칭찬, 상을 주는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동굴을 만들어 조장하는 자들은 누구이냐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 담겨있는 보이지 않는 조종자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성경이 승리자 로마제국에 적응하기 위해, 원복음(原福音) 에 있는 전투성향을 제거했다는 이야기처럼(마빈해리스, 2000, 170면), 조세희 또한, 극단적인 대립의 위치에 동굴 안에서 명예와 칭찬을 욕망하는 자들을 둘 수 는 있어도, 그 이상의 것은 드러내서 언급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탄압기구에 의해 내가 낼 책이 판금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면, 나의 작업은 쉬웠을 수도 있다. 하루 자고 나면 누가 잡혀갔고, 먼저 잡혀간 누구는 징벌독방에서 죽어가는 지경이고, 노동자들이 또 짐승처럼 맞고 끌려가는, 다시 말해 인간의 기본권이 말살된 ‘칼’의 시간에 작은 ‘펜’으로 작은 노트에 글을 써나가며, 이 작품들이 하나하나 작은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파괴를 견디고’ 따뜻한 사랑과 고통 받은 피의 이야기로 살아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조세희, 2000, 9~10면)

유신정권하에서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실을 바로보기’ 요구하는 그의 열망은,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난•쏘•공으로 태어난 것이다. 즉, 진정한 대립자는, 경제를 시녀로 거느리고 억압적 구조를 만들어낸 군부정권인 것이다. 78년 7월에 있었던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가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되기 한달 전인, 6월에 난•쏘•공의 초판발행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이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 준다. 조세희가 서둘러 12번째 단편을 발표하고, 단행본으로 낸 것은 독재정권 안에서, 침묵을 강요 당한 이의 욕망의 분출이다. 난•쏘•공은, 꿈꾸는 욕망과 욕망없는 기계를 욕망하는 독재정권과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권이 쿠데타에 의해 탄생했기에, 정당성을 국민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체제 정당성의 결여를 경제성장에 의한 체제 효율성의 제고로 상쇄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에게 노동자계층은 ‘배제’와 ‘억압’의 대상이었지만, 자본가 계급은 적극적인 ‘포섭’의 대상이자 동반자였던 것이다.” (김원동, 2002, 36면)

여기에, 인간(노동자)을 향한 ‘인간 바로보기’가 존재할 자리는 없다. 이미 태생에서부터, 이들은 약자가 욕망하는 것 자체를 용납한다면, 자신의 모든 기반을 잃어버릴 것으로 생각한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246면)

따라서, 영수의 욕망은 약자의 욕망을 용납할 수 없다는 지배계층의 욕망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생존권’을 주장한 영수가, 생존권을 지켜주는 법적 주체에 의해, 사형 판결을 언도 받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형벌의 주안점은 ‘교정’ •’감화’•’치료’에 있다. (미셸 푸코, 1995, 33면). 영수는 세가지 모두에 적용되는 자가 아니다. 사형판결문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사회로부터의 영원한 격리’ 라는 표현처럼, 사형만이 그에게서 사회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