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면, 재판을 받는 영수의 모습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영수가 가진 욕망의 분출이 거대한 욕망에 의해 제거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둘러 조세희가 이 단편을 완성한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영수의 욕망이 실패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재판 받는 영수를 지켜보는 경훈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영수가 바란 한가지 욕망의 실현이라면, 또 다른 욕망 또한 실현 되었다.

나는 은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머릿속부터 변혁시키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나는 그들이 살아가는 사람이 갖는 기쁨•평화•공평•행복에 대한 욕망들을 갖기를 바랐다. 나는 그들이 위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190면)

아이러니하게도, 영수의 재판 과정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공원들을 통해, 영수의 욕망은 실현된다. 공원들에게, 기쁨•평화•공평•행복에 대한 욕망들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인간이라면 품게 되는 당연한 욕망을 방해하는 것들에 익숙해져서, 욕망 없는 기계로 작동하던 이들에게, 영수의 재판과정은 자신들을 바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자신이 난장이인 줄 알고 있는 자들이, 스스로를 묶어놓은 것이 자신임을 깨닫는다면, 그들은 거인의 모습을 한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단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박노해, 창작과 비평, 1999년 봄호, 134~135면)

새로운 프롤로그 – 현실의 경계 종단하기 -

이제 칼을 가지고, 뫼비우스의 띠를 종단하는 여행을 마쳤다. 다시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가 보인다.

소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뫼비우스의 띠가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구조를 이룬다지만, 소설은 어떤 모습을 띄우게 되는가. 수학 선생이 떠난 후의 세계는 어떠할 것인가. 영수가 죽고 난 후, 은강 그룹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모습을 띄게 될 것인가? 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소통의 가능성을 내재한 경훈이나, 경애와 결혼 함으로서 변혁을 꿈꾸는 윤호, 그리고, 영수를 통해 욕망을 꿈꿀 수 있게 된 노동자들에 의해, 노사간의 이익을 생각하는 산업평화의 희망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담긴 조세희의 염원과는 달리 현실의 역사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총에 의해 무너진 이후, 다시금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역사의 반복이라는 말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무게의 고통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지운 것이었다.

이 소설은 그 동안, 거듭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그늘로 인해, 그 대립적 특성만이 부각되었다. 조세희는 결코 대립을 통한 공멸을 목적에 두고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동전의 양면을 보더라도, 동시에 양면을 ‘바로 볼 수 는 없다’. 한 면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다른 면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면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한 면을 바로 보기 위해, 다른 면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첫 단편 칼날이 발표 된지 사반세기가 넘은 지금, 다시 바라보는 난•쏘•공의 생명력은 여기에 있었다.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유라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그럼에도 쉽게 잊어버리는 ‘생존권’에 대한 쉬지 않는 바로보기를 조세희는 욕망한다. 그의 욕망이 독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한, 난•쏘•공 신화에 담긴 욕망의 고동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