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공주 1
최후식 지음 / 시공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무협소설을 약십년 넘게 읽었다. 그래서, 남들만큼은 무협소설을 읽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제 무협소설을 읽지 않은지 수년이 지났다. 무협이란 장르에 싫증이 나서라기보다, 김용과 양우생이라는 태산과 그밑에 준거하는 작은 산들의 형세를 파악한 이후부터는, 더이상 저 앞의 광활한 대륙의 산들에 익숙해진 나의 눈에 찰 만한 작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용의 절필(그러고보니 수십년이 넘었다.)과 함께 무협소설이란 장르 속에서 더 이상의 현과 속을 넘나드는 작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용을 뛰어넘는 태산이 없다는 점) 생각해본다.

장르문학이 가지는 여러가지 핸디캡중에 하나가, 너무나 형식미가 지나쳐 아무나 그 틀에 맞추어 글을 쓰면, 어느정도의 완성도는 보여줄 수 있다는 비참한 현실에 있다.(이러한 구조주의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 능력있는 인재가 이 장르에서 계속 배출되지 못함이 근본적인 문제다.

물론 이것은 무협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1970년대 말 조세희씨가 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이란 작품이 비평가들에 의해 100년내의 최고의 작품이란 평판을 듣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재능이상의 노력과 사회적 환경(조세희씨는 기자시절 재개발지역에 있는 난장이 가족과 같이 식사를 하던 중, 철거반이 들이닥치는 경험이, 이 작품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이 이루어져있지 않는 한, 수십년을 지나도, 태산을 앞지르는 작품은 쉽게 나오기 힘든 것이다.

이 작품 표류공주는 나에게 태산과 견줄만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 책의 저자 소개를 보면 30대의 회사원으로 첫 작품이라고 쓰여있었다.(수년전 읽은 책임에 기억에 의존했다.)그의 어떤 사회적 환경이 이런 수작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었는지 참으로 궁금하기 그지 없다. 전체 4권중 1~3권을 읽을 때까지만 하여도, 여러가지로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아마추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벌써 3권이 지났는데 마지막 권에서, 과연 명작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등.

전체적으로 3권까지의 내용은 신인작가로서의 신선함과 과거 수많은 무협 작품들의 몽타주적인 혼합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이리 나약하고, 고생하는 것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들이 이끌어가는 패턴이 아니다. (고생하다가 고난을 딪고 일어선다는 패턴은 많지만, 고생하다가 더 고생한다는 구조는 결코 상업적이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기인들과의 만남과 약초들의 복용등 깔끔하지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전개.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느낀 감정은, 태산의 작품들을 읽었을 때와 같은 감동이었다. 더구나, 이 작품을 통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폭이라는 것이, 비극에서 절정을 이루는 카타르시스라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마지막에 가서야 이 책의 제목이 왜 '표류공주' 일 수 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3권까지의 이야기가 단순히 즉흥적인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화룡점정을 위한 단계로서 조금씩 준비되어 온 것임을 알게 될 때, 범상치 않은 작가의 탄생을 기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읽어왔던 책들 중, 태산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세손가락안에 꼽는 책이다. 엔딩에서 보여지는 두 주인공의 현재 삶에 대한 묘사만을 두고 보자면, 무협 소설 중에서 최고다.

여담을 하자면, 발행된 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이 책을 읽었다. '표류공주' 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느 섬의 철딱서니 없는 공주가 항해를 하는 모험 이야기' 일 것이다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절대 그렇지 않으니 나와같은 오해로 읽지 않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책을 다 읽고 덮을때쯤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이정도로 절묘하고, 아름다운 제목도 흔하지 않다. 이곳 이외에는 구하기 힘들어진 이책을 통해 무협물의 새로운 부흥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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