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쥐라는 작품속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현실과 역사에 대한 충격이다.아돌프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그의 말의 진실여부를 떠나서 이책에 등장하는 유태인들은 쥐의 얼굴을 하고있으며, 독일인은 고양이, 미국인은 개, 폴란드인은 돼지의 얼굴을 하고있다. 이것은 얼핏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연상케한다. 그러나 동물농장의 권력투쟁보다 '쥐' 는 더 큰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상상력에의해 만들어진 허구가 아니라 작가의 아버지가 실제 2차대전중의 폴란드에서 살아남은(!)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실화이고 실제라는 측면에서 이책은 충격적인 내용들로 점칠되어 있다.

2부에서 주인공과 다른 유태인들은 독일인들에의해 화차안으로 입추의 여지도없이 끌려들어간다. 주인공은 고기를 걸어놓는듯한 양쪽고리에 자신의 담요를 걸쳐 공중에 앉아서 살아간다. 그 화차안의 200 여명중 25명 밖에 못살아 남았다. 몇날며칠인지 모를 시간동안 그곳에 쳐박아 둠으로서 나머지는 서서 질식사하거나 굶어 죽은것이다.

이때 독자인 나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왜 주인공의 좋은자리를 넘보지 않았나하고. 그러나 이내 알았다. 입추의 여지없이 움직일 공간이 없는곳이다. 쓰러질 자리도 없어서 쓰러지면 그위에 밟고 서야지 안그러면 깔려죽는다. 서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그림체가 간결하고 작가자신이 책을통해 무엇인가를 주장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는 양식탓에 충격적인 내용들이 담담하게 다가왔다가 그 담긴 의미의 잔학성에 몸을 떨게된다. 이 책에는 유태인이면서 독일인들의 편에선 앞잡이들의 모습도 뜻깊게 다루고 있다. 물론 이들의 결말또한 다른유태인들과 다를바 없이 쓸어없어진 유태인들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책을 읽기전만하여도 일제시대를 겪지않은 세대인 나는 식민지 시대의 친일파들에대해 거의 본능적인 저주를 하고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 쥐는 친독파적 행동을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독파인 유태인들의 환심을 사면서겨우겨우 생명을 영위해간다. 그곳에 옳고 그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느냐 죽느냐 라는 문제에있어 이성적 판단이 자리를 틈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의 아들인 만화가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유태인들은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대답한다.' '다들 너무나 굶었고 겁에 질리고 힘들어서 눈앞에 벌어지는 일조차 믿을수 없었지' 물론 때로는 몇몇의 인간들은 저항을 해서 가스실을 폭파시켰다. 그러나 그들또한 죽음을 피할순 없었다. 살아남은 자가 승자라고 기뻐하거나 죽은자가 죽었다고 슬퍼할 수 있는 간단한 상황이 아닌것이다. 죽은자는 죽은자대로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했고 살아남은 자또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것이었다. 과거 청산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하게 현상만을 두고 말하기엔 너무나 복잡한 사정이 겹쳐있다는 것이다. 살아남기위한 그들의 행위를 비난할수 있는가? 이것이 아픔이다. 그리고 단지 독일의 이야기일뿐이라고 생각하고 자유로울수 없는 나또한 내내 거북한 마음이 한자리에 존재함을 느낀다.

이책에서 기자가 작가에게 묻는다. '독일청소년들은 대학살이야기라면 이미 질릴정도로 듣고 봤습니다. 이사건들은 그들이 태어나기전에 있었던 일인데 왜 그들이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요?' '누구에게 이야기 할까요? 하지만 나치 독일하에서 번성했던 많은 기업들이 그 어느때보다 더 번창하고 있죠. 모르겠어요. 아마 모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껴야죠. 전부가! 영원히 말예요!'

사무엘 베케트의 '모든 말은 침묵과 무위에 묻은 불필요한 얼룩이다. '라는 말에 나는 달리 생각한다. 해답이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일 일지언정 계속 입에 오르내리며 화제에 남아있는한 언젠가는 그것을 해결하고 통쾌하게 가슴을 펼 날이 올것이라고 생각하다. 이책이 안겨준 화두를 이어갈 새로운 책을 기다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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