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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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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을 읽다. 소설은 독고준의 일기와 그에 대한 감상이 주된 내용이라 고종석 선생님의 전작인 『히스토리아』나 『발자국』의 기록정신을 연상해봄직하다. 소설 속 일기의 선별은 앞의 두 책보다 좀 더 자의적(!)이다. 그 덕분에 회색인의 심미안을 엿볼 수 있다(독고준의 펜을 빌린 저자의 눈길이겠지만). 독고준의 일기는 1960년 4.19 혁명부터 2007년 대통령 선거까지 반백년의 기록이다. 독고준의 손자뻘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사이의 일기에 손이 머문다. 고려 시대 같은 아주 먼 과거보다 1970년대처럼 조금 지난 이야기가 오히려 더 멀게 느껴지다니 재미난 일이다. 한국 현대사 인물들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 탓만은 아닐 듯하고, 개관사정(蓋棺事定)을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다. 


독고준의 따님인 독고원은 아버지의 견해에 동조하거나 첨언하다가도 이따금 불편해한다. 어쩌면 저자의 복합적인 생각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이 있으면 저런 생각이 있게 마련이라는 담담한 상식을 말이다. 소설적 허구는 참신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존의 문제의식을 극적으로 포장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소설은 후자의 성격이 좀 더 강하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헛갈리는 것이 매력이다. 창의성과 과장성은 사회의 다수파(가 만든 법과 규범)의 시각과 어긋나기도 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분 중에 회색인이 많은 이유일 테다.  


독고준의 단정(斷定)하지 않는 단정(端正)함을 배우고 싶다. 시중(市中)에서 시중(時中)을 잡아보고 싶다. 나는 사람의 (노력을 포함한) 재주가 불공평하다는 걸 실감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람 가치의 우열을 따지는 건 매우 어렵고 조심스런 문제다. ‘독고준을 넘어서는’이란 목표도 좋지만 ‘독고준과 다른’ 매력을 만들어보는 것도 꽤 도전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설령 차별화(?)에 실패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다. 세상에는 지식 도매상보다는 지식 소매상이 많고, 지식 소매상보다는 지식 유통상이, 그보다는 지식 소비자가 더 많기 마련이다. 꽤 괜찮은 유통상이나 소비자가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무게가 많이 낮아질 거 같지는 않다.  


나는 삶은 한 번 뿐이라고 믿는다. 일전에 고 선생님께서 언급하시기도 하셨던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라는 명제를 지지한다. 그래서 한 번 밖에 없는 생을 가능한 한 옳고 아름답게, 착하고 재미나게 살고 싶다. 안연은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는 자라면 또한 그와 같아질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말씀하셨다. 순임금이나 자신이나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한 사람은 성인이 되고, 안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자책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이 위대한 문장을 변용해본다. 


 “독고준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회의하는 자라면 또한 그와 달라질 것이다.”
 
2010. 8. 19. 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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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08-20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했어요^^
 
제국의 뒷길을 걷다 - 김인숙의 북경 이야기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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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창덕궁 대조전을 거닐다가 새 모양으로 생긴 처마 빗물받이가 익살맞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마냥 좋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던 빗물받이가 있던 곳은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는 한일합병을 결의하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흥복헌 앞에 서니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다는 순정효황후의 통분이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가 김인숙은 내가 느꼈던 오묘한 감정을 일상에서 체화한 듯하다. 『제국의 뒷길을 걷다』(문학동네, 2008)는 북경이 천하의 수도에서 한 나라의 수도로 내려오는 여정을 묘사한다. 저자는 그 내리막길을 따라가며 어디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헤집고 오늘날에 주는 함의까지 따져본다. 역사에 대한 입체적이고 총체적 이해가 돋보인다. 기록의 이면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풍부한 사료 검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이따금 역사의 물결을 탓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없애겠다는 속셈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귀결의 최종 책임자를 당대 최고의 의사결정자로 삼는 것은 대개 온당하다. 그런데 그 최고 권력자에게 얹어지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일 때 필부필부의 가슴은 짠하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일까. 김인숙 역시 선통제 푸이의 이야기에서 지은 죄보다 더 과중한 벌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까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중국은 남의 나라 이야기니까 덜 고통스러워서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지만 그의 눈길은 충분히 촉촉하다. 어쩌면 모든 동정은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문화유산들이 약탈당할 때 가슴 아파하는 까닭은 중국 근대사의 굴곡과 고스란히 빼닮은 대한제국의 말로가 자꾸 포개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동병상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계시민 의식이 꽃피는 실마리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수용소에서 양말을 깁고 있는 푸이의 모습이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사진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저자도 지적하듯이 “두 차례의 침략과 삼전도의 굴욕 등으로 조선에 가혹한 모욕을 주었던 청나라(76쪽)”의 마지막 황제의 안쓰러운 신세를 한껏 통쾌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욱일승천 하던 기세가 가뭇없이 소멸하는 무상함은 옛 원한을 눅이는가 보다.


고려 공양왕은 폐위당할 때 자신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다고 말하며 울었다. 푸이는 그럴 투덜거림마저 내뱉기 전에 용상에서 내쳐졌다. 아무리 권세를 누렸던 이라도 선대의 죄과를 한 사람이 모두 짊어지는 연좌제는 불편하다. 한때는 우리를 괴롭혔던 이들의 후임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연좌제에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 오늘날을 사는 시민의 양식일 게다. 어떤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하는 수난을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 뒷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만리장성 아래 깔렸던 원혼들을 비롯해서 억울한 죽음이 무수한데 몇몇 위정자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건 일견 사치스럽다. 기록된 치욕보다 더 많은 수모가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고통까지 추체험하기에 우리는 너무 약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화된 추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애틋함이 배어나오지를 않는다. 이름 없는 민초의 아픔을 추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인(仁)의 확산이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구조라고 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가엾어 보일 때 순서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저자가 악명 높은 서태후에게도 연민의 시선을 보낼 때 역사에서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를 곱씹는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것이 서태후가 해군의 군비를 이화원의 증축에 유용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유용이 서태후의 탐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서태후에게 아부를 하기 위한 제삼자의 행동 때문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한 푼의 군비도 빼돌려지지 않았더라도 청이 일본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청나라가 좀 더 강력한 해군을 갖추었던들 쇠퇴해가는 길만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잔인한 말일까. 설령 이런 흐름이 눈에 보이더라도 서태후는 최선을 다해 억지로 거스르려고 했어야 옳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그리 하라고 만든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는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난을 감내해야 한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서태후가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에게 두 번의 삶이 없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연개소문의 자식들이 골육상잔을 벌이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버틸 수 있었을까. 최영과 정몽주가 별다른 실책이 없었더라면 고려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큰집이 무너지려 할 때 기둥 하나로 떠받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목난지(一木難支)임을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은 무모하다. 하지만 그 무모함이 때때로 눈부시다.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견지한 사람을 줄곧 외면하지 않음을 되새기는 것이 역사를 읽는 자세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18쪽)”이기도 하다.


물론 푸이와 그 둘레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시시한 것이었다. 예정된 실패였던 의화단이 품었던 꿈보다 더 초라한 바람이었다. 청 황릉의 도굴에 비분강개한 마음은 순정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선통제가 복위할 명분을 세울 수 없었다. 푸이가 만주국 수립에 협조한 것이 일본의 강압으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가 만주국 강덕제(康德帝)가 된 것은 단지 일본의 간계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푸이의 비극은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 제국민의 위한 제국을 꾀했더라도 시대정신은 제국을 거부했으리라. 일본 패망 이후 푸이는 전범 재판을 받고 사상개조라는 명목 하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중국 공산당은 마지막 황제에 대한 예우를 외면하고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이전 시대와 결별했다. 푸이의 전기에는 자신이 한 사람의 인민으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으나 그것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새사람이라면 그리 탐스럽지 않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일도 점점 나아져야 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60쪽)”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역사의 끝자락을 잡은 사람이더라도 야멸치게 업신여기는 건 사려 깊은 처사가 아니다. 폐허의 잔해를 수습하는 사람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보장이 없다. 건곤일척의 승부가 일단락되었다면 승자는 패자의 낡은 생각들을 향해 법적 책임을 넘어선 앙갚음을 하기보다는 자신과 패자 사이의 조심스러운 견줌을 시작해야 한다. 역사의 패자가 서서히 잊힐 여유를 품어서 역사의 비정함을 줄여야 비로소 승자가 될 자격을 얻는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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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젊은 영혼들의 기록
황광우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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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난 여드름이 결국 흉 질 모양이다. 발칵 짜증이 난다. 문득 1999년 계훈제님의 부고가 안쓰러워하던 어린 마음이 떠오른다. 나는 정치적 시비나 이념적 차이를 떠나 일평생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쓸쓸함에 많이 상심했다며 습관처럼 둘러댄다. 그런데 여드름을 향한 내 역정의 강도는 계 선생님의 만년을 따가워함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내게 민주화라는 건 여드름과 비슷한 존재였단 말인가.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에 소개된 황지우님의 「사육된 세대」를 읽다보니 새삼 스스럽다. 그렇지만 앞 세대 분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는 궁극적으로 사사롭고 소소한 일에 분개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니었냐며 투정을 부려본다.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높게 친다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지독한 인위였고, 인공미였다.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팬티와 살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이들의 피딱지를 먹고 자란 대한민국. 나는 피딱지 대신 여드름을 걱정한다. 딱 그만큼은 세상이 좋아졌다.


07년 9월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성명서에다 “출교자들이여, 나와 함께 군대로 갑시다”라는 막말을 했다. 흔히들 민주화 투쟁을 하던 분들이 군사독재와 싸우다 군사독재를 닮아갔다고 곧잘 험담한다. 자칭 순수한 비운동권을 내세우던 그들도 미워하면서 닮아버린 듯싶다. 글쓴이는 서두에 “1987년 7월 한 학생의 저승 가는 길이 슬퍼서 100만 민중이 모였다”라고 썼다. 제 학교 선후배 동기들이 쫓겨나는 걸 찬성한다는 학생들과 더불어 사는 나로서는 21세 이한열의 죽음에 그토록 많은 필부가 서글퍼 했다니 어색하다. 80년 5월과 87년 6월을 꼭짓점으로 삼아 그 전후의 시린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에 등장한 내 또래의 사람들은 도무지 이상했다.


학교를 부러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격증을 딴다. 부모님께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고 싶다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한다. 그런데도 위장 취업한 여대생의 언니는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라며 생활비를 보낸다. 이 요상함은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였는가를 방증한다. 동생을 내놓으면 형을 풀어주겠다는 연좌제가 섬뜩했다. 난사 당한 여성 시신 한 구를 놓고 두 어머니가 “내 딸이다”라고 다퉜다. 보안대 지하실에서 친구 이름을 적은 수첩을 씹어 먹어야 했다. 권인숙이 “간첩도 자궁에다 봉만 박으면 불어”라는 모욕을 당해야 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내가 그 시대를 추체험했다면 거짓말이다. 불가해하지만 과거로만 돌리기 힘든 시절이다. 상당 부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더 찾아보고 싶어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을 훑다가 콧등이 시큰해졌다.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을 묻혀 가지고 선착순으로 와야 할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 흔들렸을지 아찔하다. 개미가 가득한 방에 넣고 개미가 온 몸에 달라붙게 했다는 대목에서는 구역질이 나왔지만 밥맛을 잃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저녁밥을 맛나게 먹었다. 타인의 고통을, 과거의 아픔을 제것처럼 느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황광우님도 어떤 교훈이 아니라 과거를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만지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육군교도소에서 자행된 폭력에 침묵한 자신이 싫다며 빵을 똥통에 던졌다. 후회가 되어 화장실에서 빵을 꺼내 먹을 때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를 고통스레 바꾼다. 아! 이 분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하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다. 윤상원은 감칠맛 나게 노래를 잘 불렀고,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일기를 써내려 간 로맨티스트였다. 김남주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겠어요?”라고 넋두리하며 호구를 이었다. 내가 이 분들을 근엄한 투사로만 관념화하고 박제화하지는 않았나 반성한다. 이네들도 맞으면 아프고, 죽으면 슬프고, 배곯으면 고픈 똑같은 인간이었다. 물론 황광우는 통닭 대신 논어, 맹자를 달라고 했다. 윤상원은 도청을 나서지 않았고, 김남주는 우유곽에 시를 새겼다. 그러나 이들의 초인다운 면모가 인간다움을 가리지 못한다. 이 분들이 총칼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기에, 끝끝내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았기에 성스럽고 아름답다.


글쓴이는 “여전히 역사에서 ‘수’의 의미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라고 선언한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참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 <나이 서른에 우린> 가사처럼 세월의 무게라는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요즘은 말하기가 너무 쉽다. 쉽고 쉬운 입을 놀려 이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데 정성을 좀 보태면 어떨까. 물론 기억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식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이네들이 산화(散花)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용서하라고 한다. 나는 관용 권하는 사회는 식객의 도덕이며 마름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용서 이전에, 관용 이전에 기억을 논해야 한다. 기억하는 사람의 수, 통감하는 사람의 수를 늘려야 한다. 군부독재가 너무 어이없었기에 한 편이 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갈라서고 있다. 이 분화는 역사의 발전이지만, 최소한의 공통 분모는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가 본래 마땅한 것이 아니었음을 곱씹는다. 바위 앞에 선 달걀 같던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 가난한 자가 등불 하나를 켜는 심정으로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하루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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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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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탁(李鐸)이라는 분은 중국의 사마광을 본받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탁은 사마광이 “사람이 자기가 평생 걸어온 길을 만 사람 앞에서도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산다면 그는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다”라고 한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나도 나의 일을 남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결심했다. 아마 이탁이 자신의 평생 신조로 삼을 금언을 접한 책은 『소학』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나는 남보다 뛰어난 점은 없다. 다만 내가 평생토록 한 일 중에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을 뿐이다”라는 사마광의 말씀이 있다. 『소학』의 모든 글은 기존 문헌에서 추출했다. 경전이나 사서를 떠나 유가식 글쓰기에는 이처럼 편집물이 많다. 옛글을 가공하고 재구성해서 또 하나의 책을 내는 방식이다. 사마광의 이야기는 『송명신언행록』에 출전이 있다. 『송명신언행록』은 북송시대 160년 동안에 배출한 명신들의 언행을 모은 저서다. 무려 97명이 실려 있다. 우리가 배울 점이다.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을 읽다가 한국 고전을 국역하는 일과 더불어 선현들의 어록 혹은 언행록을 정리하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1884년 『소학』의 체계를 따와서 한국의 선현의 이야기로 엮은 『해동속소학』과 같은 책이 더 많이 늘어야 한다. 김종권 선생님이 편저한 『한국의 명언』이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펴낸 『한국선현위인어록』과 같은 작업이 그런 맥락이다. 여기다가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과 전작인 『죽비소리』도 힘을 보탠다.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출범하면서 고전 국역사업이 장기적이면서 체계적인 안목으로 이뤄지게 되어 기껍다. 계산을 하기 나름이지만 번역된 고전보다 번역되지 않은 고전이 많다는 건 모두 동의하는 바다. 번역은 되었다고는 하나 너무 고어투에다 편집이 조악해서 읽기가 어려운 고전도 많다. 고전을 국역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학술문화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의한다. 김용옥 선생님은 다산에 대한 학위논문은 수백 편이 넘는데 여유당전서는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을 통박하셨다. 무척 공감하며 고전 국역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리 빨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다산어록청상』은 다산의 글에서 귀감이 될만한 토막을 가려 뽑아 모양새 있게 정리한 책이다. 공부법과 독서법을 비롯해 다산이 풀어놓는 인생론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의 고갱이를 한마디로 줄여보라면 너무 잔인한 요구다. 열심히 착하게 살자 식의 멋없는 이야기만 맴돈다. 정민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이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는가?(29쪽)”라고 해도 좋겠다. 다산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했다. 물론 이건 다산만의 특징은 아니다. 옛사람들은 왜 그토록 인품을 강조했을까? 도덕적 자원을 과시함으로써 피지배층의 반말을 무마하고 지배층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게다. 『목민심서』 청심(淸心)조에서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大貪必廉)”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런 꿍꿍이셈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덕본재말(德本財末)을 강조하고 재승박덕(才勝薄德)을 경계하던 당대 분위기는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식견보다는 태도나 자세를 우선시하는 낯설음이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나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적 점진주의의 산물이다. 수기적 행위에 치열할수록 동시에 치인적 행위를 통달하게 된다는 논리다.


심심지 않게 불거지는 공직 부패를 바라볼 때 이내 갑갑하다. 고작 저렇게 살려고 그리 뼈 빠지게 공부하셨는지 좀 안타깝다. 나는 그 분들에게 그걸 좀 묻고 싶었다. 그러면 민망해서라도 달콤함과 향긋함에 몸과 마음을 함부로 팔지 않으려는 분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고마운 선배님께서 “공인이라면!”이라고 일갈하는 건 통쾌한 느낌은 있으나 현실적 효용은 거의 없다고 비판하셨다. 나는 돈 몇 푼에 흐트러지지 않는 분이 1%라면 5%로 늘기를 바라고, 5%라면 10%로, 10%라면 20%가 되는 식으로 의미 있는 숫자로 나아가는 모습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라고 우겼다.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 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을 죽음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나의 이런 바람은 제도나 시스템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제도와 의식은 거개 상보적이다. 부패를 미워하는 마음이 부패 방지 시스템을 다지지 않았는가. 성공을 자만하는 순간 툭 떨어진다는 다모클레스(Damocles)의 칼을 스스로 매달아 놓고 살피는 건 개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채제공의 몸가짐(46쪽)도 그런 정신의 발현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각성된 개인의 힘이 굳셈을 기대한다.


그렇다고 옛사람의 말을 빌어다가 도덕적 훈계를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옛 어록을 인용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기실 어록이라는 건 일정 부분 권위주의적 요소가 있다. 권위 없는 어록은 상상하기 힘들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 없다”라거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일개 경영학도인 내가 발설하는 것보다 유일한 박사님께서 설파하셨을 때 더 큰 힘을 얻는다. 금주령이 내려진 때에 세종대왕의 옥체를 염려한 신하들이 술을 들도록 간청한 일이 있다. 대왕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予則飮酒, 而禁人用酒可乎)?”라고 답했다.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는 우리네 지도자들에게 이 옥음을 늘어놓는 까닭도 결국 세종대왕의 광휘에 기대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 살아가는 문제를 재는 잣대로 어록을 끌어다 쓰는 건 더욱 위험하다. 앞서 본 이탁의 사례처럼 그건 개인 수준에서 그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근사한 문구 오려 붙이는 재미는 쏠쏠하다. 의사들이 진단서를 휘갈겨 쓰고, 공대생이 수식을 즐기는 것과 비슷한 심보다. 


나는 전고(典故)가 잦은 글쓰기가 권위에의 호소가 되기 일쑤며,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의도보다는 “좋은 걸 좀 배워보자”는 의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마음공부를 둘러싼 다양한 말씀과 사례들을 저마다 품으려는 정성을 너무 흘겨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령 『다산어록청상』을 읽고 갈무리 해둔 구절을 세밑 송년회 자리에서 써먹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담백함이 지나쳐 말라 비틀어져 가는 세태에 적절한 수준의 지적 허영이 순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겉멋에도 귀천이 있다면 너무 박절하겠지만 고전 인용 같은 겉멋이라면 어느 정도 권장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예기』, 『여씨춘추』를 발췌독한다고 했더니 친구에게서 “호사스럽다”라는 핀잔이 날아왔다.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책 좀 읽으라는 간곡한 충고도 곁들여서 말이다. 나는 차라리 이 팍팍한 삶에 호사스러움을 건사하고 싶다. 조금 투덜거리자면 고전을 읽고 일상에서 언급하는 게 왜 호사가 되고, 겉멋이 되고, 허영이 되어야 하는가. 그건 그만큼 우리가 옛것에 대한 홀대와 괄시 속에 살아왔다는 방증일 따름이다.


기파랑은 무척 기품 있는 인물이었나 보다. <찬기파랑가>를 감상하면 기파랑이 지닌 마음의 가장자리만이라도 따르려는 마음씨가 살갑다. 『다산어록청상』의 모티브가 된 <도산사숙록>도 이런 흠모의 소산이다. 사숙(私淑)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본보기 삼아 학문과 덕행을 쌓는 과정이다. 맹자가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숙을 통한 사제 관계는 매우 많다. 다산은 퇴계와 성호 이익을 사숙했고,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사숙했고, 김춘수는 릴케를 사숙했다. 간디는 소로(Thoreau)를 사숙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사숙했으며, 보들레르는 포(Poe)를 사숙했다고 한다. 우리 둘레를 보면 멋있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역할 모델에게서 영감을 얻고 성찰함을 발견한다. 칸트는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주위에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가 될 바지런함이 없지 않았는가 반성한다. 다산은 주희를 구박하는 재미에 살았던 모기령을 높게 보지 않았다(100쪽).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된다는 것, 앞사람을 극복하는 뒷사람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도전할 만하지만.


다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툭하면 중국의 일을 끌어다 쓴다.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168쪽)”라고 비판한다. 자식들에게 『고려사』 같은 한국 사서를 읽히려는 부정이 애틋하다. 정민 선생님과 같은 노고가 누적된다면 궁극적으로는 어린이들의 독서에 많은 보탬이 될 듯싶다. 미사여구로 분칠한 위인전에서 멈추지 말고 선현들의 어록을 익히고 평생의 신념이 될 경구를 만나게 한다면 더 흡족하리라. 기왕이면 그 폭이 넓어지길 희망한다. 정몽주의 <단심가>만 알지 말고 고려 말의 충신 변안열의 <불굴가>도 읊었으면 좋겠다. 성삼문에 그치지 말고 이개의 시조도 음미하며 올곧게 살기의 어려움을 곱씹으면 좋겠다. 정조대왕은 『홍재전서』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을 넘기며 대왕과 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만 노래하기보다는 퇴계 선생이 소장한 주자전서 사본 한 질이 너무 낡아서 글씨가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는 일화도 꺼내보면 어떨까. 새파랗게 어린 기대승과 서간문으로 엄밀하게 논쟁하면서도 고깝게 여기지 않고 선조 임금에게 기대승을 천거하는 그 넉넉함도 배워봄직하다. 인사를 맡은 사람이 『성학집요』 용현(用賢)편을 뒤적인다면 유쾌한 일이다. 서양의 그럴듯한 유언에만 눈을 돌리기보다 왕건이 “덧없는 인생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浮生自古然矣)”라고 유언한 내용도 모아두면 좋겠다. 이렇게 앞서 거닐었던 분들의 말을 기억해내고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노력이 마냥 무익하지만은 않을 게다.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문화사』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가슴이 짠하다.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에게 어떤 사람이 “후세의 사필(史筆)이 무섭지 않으냐?”고 따졌단다. 유자광은 의기양양하게 “누가 『동국통감』을 읽나?”고 응수했다. 『동국통감』은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단군 조선에서 고려 때까지의 역사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즉 누가 조선사를 읽어 내 행적을 기억하겠는가 하며 안심한 셈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더 애호하고 시시비비를 간직할 때 한가로운 소리가 아니라 실용적인 기능도 수행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도두보는 국민이 많은 나라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만만치 않을 듯하다. 흔히들 한국에는 영웅이 없다고 한다. 부러 영웅을 만드는 건 억지스럽다. 하지만 앞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하고 끊임없이 반추할 때 영웅보다 더 훌륭한 삶의 거울이나 나침반을 만들어 봄직하다. 오늘날의 이탁이 사마광도 좋지만 한국의 누군가를 우러르며 가슴 뛴다면 이 또한 반가운 일이다. 어색한 짜릿함보다 친숙한 푸근함을 꾀하자. 편집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좀 더 많은 편집자가 필요하다. 케인즈가 역설했듯이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思想)이다. 우리의 사상을 풍요롭게 할 편집의 만개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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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 2008-03-1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여가 단심가 불굴가는 우리글이 없던 때라 한자로 전해지는데

<하여가>와 <단심가>가 광해군 때의 문인 심광세(1577 1624)가 1617년에 엮은 영사악부(詠史樂府)인 해동악부(海東樂府) 소재 풍색오(風色惡)의 설명부분에 실려 전한다.

하여가를 번역하면 시조와 중장에 다른 부분이 있다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頹落 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하여가>

이런들 긔 엇더리, 뎌런들 긔 엇더하리 성황당 뒤담이 해인들 긔 엇더하리 우리도 이러히여 살어이신들 긔 엇더하리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與 - <단심가>



대은실기(大隱 邊安烈先生 實紀)에 전하고

창작경위는 1800년刊 원주변씨세보 (原州邊氏世譜)인 경신보(庚申譜) 권1 잡록부(雜錄附)에 수록되어 있다.



穴吾之胸洞如斗 貫以藁索長又長 前牽後引磨且 任汝之爲吾不辭 有欲奪吾主 此事吾不屈 -<불굴가>

가슴에 궁글 둥시러케 고 왼기를 눈 길게 너슷너슷 와 그 궁게 그  너코 두 놈이 두 긋 마조 자바 이리로 훌근 져리로 훌젹 훌근 훌젹  저긔



창작 당시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 한역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한역으로부터 재번역인지 아니면 애당초 창작시점 부터 구비전승 되었다가 청구영언에 실린 것일 수 있다



혁명을 꿈꾸며 의중을 떠보니



공양왕 원년(1389년) 10월 11일, 수시중(守侍中 문하부 종 1품 관직)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성계의 생일에 중요인사가 초대 되었다

이성계는 54세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崔瑩)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고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정몽주(52세)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문하부의 정2품 관직)로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이고 변안열(55셰)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한 영삼사사(領三司事 삼사의 정1품의 관직)로 사병 2만을 거느리고 있는 50대의 실력자들의 모임에 정사 이색(李穡)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22세의 이방원도 배석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이성계의 혁명 사업을 앞장서서 수행하던 이방원은 당대 인사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이방원 시 한 수를 읊으니 우왕이면 어떠하고 창왕이면 어떠하냐는 하여가이다

문관인 포은도 그 뜻을 읽고 굽힐 수 없음을 직설적으로 단심가로 화답하고 무관인 대은 또한 비유적으로 굴불가로 화답하여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강인한 절개를 굽힐 줄 몰랐다

두 사람의 절의를 담은 시를 듣고 난 이성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술잔을 들었다.

혁명을 계획하고 있던 이성계에게 고려의 충신 정몽주나 전장을 함께 누빈 변안열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 후 이방원은 두 사람을 제거하려 하였고, 마찬가지로 두 사람 또한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진력하였으나 결국 대은은 1년 뒤 우왕을 복위시키기 위한 모의와 관련되어 한양에 유배되었다가 사형되었으며 2년 후 포은도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가운데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출처] 하여가(何如歌) 단심가(丹心歌) 그리고 불굴가(不屈歌)/ 신후식
여말(麗末)의 문무(文武) 충신들





 
스승의 옥편 - 한문학자의 옛글 읽기, 세상 읽기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선발자의 이득’이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상대방에 앞서 신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기업이 얻게 되는 이익을 일컫는다. 이와 반대로 선발자가 터를 닦은 시장에 진입해 위험과 비용 부담을 줄이는 ‘후발자의 이득’이라는 말도 있다. 두 이점 가운데 어느 것이 크게 작용하느냐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시장 개척자들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닌 셈이다. 최근 산업자원부는 산업정책 패러다임을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에서 혁신 주도자(leading innovator)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선진국 따라잡기로는 중국 등과의 경쟁에 한계가 있으므로 원천기술과 창조적 인재에 바탕을 둔 핵심역량을 키우겠다는 포부다.


정민 선생의 『스승의 옥편』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혁신’ 생각이 났다. 글쓴이의 저작에 잇따라 흐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과 혁신 주도자라는 개념은 제법 닮았다. “전통의 계승은 지금 없는 변치 않을 옛것을 회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원래 있지도 않았다. 쉴 새 없는 변화 속에 변치 않는 정신의 가치를 깃들이자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책의 고갱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옛것을 바지런히 읽어 정갈하게 갈무리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18세기 지식인 탐구로 이어진다. 선생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에서 옛것을 흉내내기 급급했으면서 교조적 권위를 휘두르기 일쑤였던 기득권층을 비판한다. 그는 “민족문화의 주체성과 외래문화의 건강한 결합을 모색했던 지식인”들을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이라 평했다. 이 가능성이 사그라졌던 것에 대한 반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유가 거칠지만 옛사람이 선발자의 이득을, 오늘을 사는 사람이 후발자의 이득을 꾀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2등 상품이 1등이 되기 위해서는 10배 더 좋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선현과 한바탕 승부를 벌이자는 건 아니지만, 그네들의 다채로운 삶을 추체험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글쓴이가 틈틈이 한탄하듯이 기술의 진보가 정신의 고양으로 확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문화는 변화할 뿐 발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후고박금(厚古薄今)을 거부한다. 아울러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언급되는 전거들 상당수가 자잘한 일상생활의 섬세한 묘사다. 이를 통해 옛사람들의 고민 상당수가 현재도 여전히 끙끙 앓는 화두임을 보여준다.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내세웠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역사와 환경이라는 맥락은 부러 외면하기 힘든 규정력을 행사한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이라는 요소(要素)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선생은 전작 『책 읽는 소리』 후기에서 ‘그때 여기’와 ‘지금 저기’라는 두 좌표축을 균형 있게 도두볼 것을 주창한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그때 여기’, 다시 말해 ‘우리의 과거’를 보강한다면 보다 혁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동서고금을 통합하는 담론을 위한 저자의 제안을 세 가지로 나눠봤다.


첫째로 기록하는 습관이다. 『지봉유설』, 『성호사설』, 『임원경제지』 등의 백과사전식 저술이 그 실례다. 정조의 『일득록』을 완독하며 희열을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이 새록하다. 퇴계선생고종기의 꼼꼼함도 감동적이다. 선생은 단순히 적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읽는 초서( 書)를 통해 자기 나름의 잣대로 가름하여 식견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치밀한 기록은 일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책임성을 높여준다. 다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한답시고 자기 만족하는 건 경계할 일이다. 실상 선생의 글쓰기 작업 자체가 기록의 극치다. 라디오 진행자의 한마디나 식당에서 손에 잡힌 소식지도 메모해둔다. 생활 속의 단상도 잊기 전에 적어 두는 듯싶다. 자식의 효도는 어린 시절에 다했다는 넉넉함이 푸근하다. 조봉암 선생 무덤 앞 어록을 보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고, 차마 속일 수 없는 사람을 모시고 싶다는 바람을 토로할 때 사람냄새가 난다. 이는 마치 18세기 소품체(小品體)의 생활작문, 미시작문을 연상케 한다.


둘째로 위대한 일상성이다. 도저한 근면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글쓴이는 스승의 닳고닳은 한한대사전을 넘기며 단순무식한 노력이 왕도임을 확인한다. 다산 정약용이 책상다리로 앉아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고사를 전한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오로지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를 받은 이야기도 꺼낸다. 편안한 휴식이 되는 공부가 진짜 공부이며 질리지 않고 가슴 뛰게 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럭저럭 소일(消日)하지 않는 삶은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라는 『중용』 구절과 만난다. 누구나 사흘쯤은 성인군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닷새 정도는 공부를 하다가 지쳐 단잠에 빠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흘과 닷새를 보름으로, 달포로 늘려나가는데 있다. 눈치 보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정성이 하늘까지는 몰라도 사람은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셋째로 줏대 있는 개성이다. 선생은 『미쳐야 미친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미치는 마니아들의 치열함을 예찬한 바 있다. 온달 이야기는 운 좋은 출세담이 아니라 신의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해석을 비롯해 고쳐 읽고 따져 읽는 자세를 환기시킨다. 저자가 두드러지게 살피지는 않았지만 유교 텍스트에 내재된 지배층 옹호 및 차별의식 같은 극복해야할 인습들도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것이다. 양명학이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진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 같은 면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전도 결국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특히 “정신을 본받고 표현을 본받지 말라(師其意 不師其辭)”라는 한유의 문장론을 강조한다. 옛것을 배우되 옛것을 답습하지 않고 편승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권한다.


이 세 가지 비책의 뿌리는 역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다. 서유럽과 영미 선진 출판시장에서는 컴패니언(companion) 북이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출판시장이 고전의 요약정리나 이색적인 재해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면 컴패니언 북은 고전의 핵심 부분을 발췌해 옮기고 여기에 자세한 해석을 다는 식이다. 이처럼 원문을 무궁자재로 인용하기 위해서는 고전 번역이 절실하다. 다행히 지난 7월 한국고전번역원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문고전 번역사업을 국가가 끌어안음으로써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고전 국역사업을 수행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포실한 고전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해보자.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이 땅에서 곰삭은 옛글은 무슨 힘을 지닐까. 자본의 포섭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는 무엇일까.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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