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창덕궁 대조전을 거닐다가 새 모양으로 생긴 처마 빗물받이가 익살맞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마냥 좋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던 빗물받이가 있던 곳은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는 한일합병을 결의하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흥복헌 앞에 서니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다는 순정효황후의 통분이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가 김인숙은 내가 느꼈던 오묘한 감정을 일상에서 체화한 듯하다. 『제국의 뒷길을 걷다』(문학동네, 2008)는 북경이 천하의 수도에서 한 나라의 수도로 내려오는 여정을 묘사한다. 저자는 그 내리막길을 따라가며 어디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헤집고 오늘날에 주는 함의까지 따져본다. 역사에 대한 입체적이고 총체적 이해가 돋보인다. 기록의 이면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풍부한 사료 검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이따금 역사의 물결을 탓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없애겠다는 속셈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귀결의 최종 책임자를 당대 최고의 의사결정자로 삼는 것은 대개 온당하다. 그런데 그 최고 권력자에게 얹어지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일 때 필부필부의 가슴은 짠하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일까. 김인숙 역시 선통제 푸이의 이야기에서 지은 죄보다 더 과중한 벌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까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중국은 남의 나라 이야기니까 덜 고통스러워서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지만 그의 눈길은 충분히 촉촉하다. 어쩌면 모든 동정은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문화유산들이 약탈당할 때 가슴 아파하는 까닭은 중국 근대사의 굴곡과 고스란히 빼닮은 대한제국의 말로가 자꾸 포개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동병상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계시민 의식이 꽃피는 실마리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수용소에서 양말을 깁고 있는 푸이의 모습이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사진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저자도 지적하듯이 “두 차례의 침략과 삼전도의 굴욕 등으로 조선에 가혹한 모욕을 주었던 청나라(76쪽)”의 마지막 황제의 안쓰러운 신세를 한껏 통쾌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욱일승천 하던 기세가 가뭇없이 소멸하는 무상함은 옛 원한을 눅이는가 보다. 고려 공양왕은 폐위당할 때 자신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다고 말하며 울었다. 푸이는 그럴 투덜거림마저 내뱉기 전에 용상에서 내쳐졌다. 아무리 권세를 누렸던 이라도 선대의 죄과를 한 사람이 모두 짊어지는 연좌제는 불편하다. 한때는 우리를 괴롭혔던 이들의 후임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연좌제에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 오늘날을 사는 시민의 양식일 게다. 어떤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하는 수난을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 뒷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만리장성 아래 깔렸던 원혼들을 비롯해서 억울한 죽음이 무수한데 몇몇 위정자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건 일견 사치스럽다. 기록된 치욕보다 더 많은 수모가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고통까지 추체험하기에 우리는 너무 약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화된 추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애틋함이 배어나오지를 않는다. 이름 없는 민초의 아픔을 추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인(仁)의 확산이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구조라고 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가엾어 보일 때 순서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저자가 악명 높은 서태후에게도 연민의 시선을 보낼 때 역사에서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를 곱씹는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것이 서태후가 해군의 군비를 이화원의 증축에 유용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유용이 서태후의 탐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서태후에게 아부를 하기 위한 제삼자의 행동 때문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한 푼의 군비도 빼돌려지지 않았더라도 청이 일본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청나라가 좀 더 강력한 해군을 갖추었던들 쇠퇴해가는 길만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잔인한 말일까. 설령 이런 흐름이 눈에 보이더라도 서태후는 최선을 다해 억지로 거스르려고 했어야 옳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그리 하라고 만든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는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난을 감내해야 한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서태후가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에게 두 번의 삶이 없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연개소문의 자식들이 골육상잔을 벌이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버틸 수 있었을까. 최영과 정몽주가 별다른 실책이 없었더라면 고려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큰집이 무너지려 할 때 기둥 하나로 떠받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목난지(一木難支)임을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은 무모하다. 하지만 그 무모함이 때때로 눈부시다.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견지한 사람을 줄곧 외면하지 않음을 되새기는 것이 역사를 읽는 자세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18쪽)”이기도 하다. 물론 푸이와 그 둘레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시시한 것이었다. 예정된 실패였던 의화단이 품었던 꿈보다 더 초라한 바람이었다. 청 황릉의 도굴에 비분강개한 마음은 순정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선통제가 복위할 명분을 세울 수 없었다. 푸이가 만주국 수립에 협조한 것이 일본의 강압으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가 만주국 강덕제(康德帝)가 된 것은 단지 일본의 간계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푸이의 비극은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 제국민의 위한 제국을 꾀했더라도 시대정신은 제국을 거부했으리라. 일본 패망 이후 푸이는 전범 재판을 받고 사상개조라는 명목 하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중국 공산당은 마지막 황제에 대한 예우를 외면하고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이전 시대와 결별했다. 푸이의 전기에는 자신이 한 사람의 인민으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으나 그것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새사람이라면 그리 탐스럽지 않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일도 점점 나아져야 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60쪽)”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역사의 끝자락을 잡은 사람이더라도 야멸치게 업신여기는 건 사려 깊은 처사가 아니다. 폐허의 잔해를 수습하는 사람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보장이 없다. 건곤일척의 승부가 일단락되었다면 승자는 패자의 낡은 생각들을 향해 법적 책임을 넘어선 앙갚음을 하기보다는 자신과 패자 사이의 조심스러운 견줌을 시작해야 한다. 역사의 패자가 서서히 잊힐 여유를 품어서 역사의 비정함을 줄여야 비로소 승자가 될 자격을 얻는다. - [無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