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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현실주의의 역사와 이론
우암평화연구원 지음 / 화평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강자는 권력을 행사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약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정치적 현실주의의 선구자인 투기디데스는 말했다. 이처럼 국가간 힘의 불균등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힘의 논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현실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학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해오고 있다. 이 책은 현실주의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을 선보이며 이해를 돕고 있다. 현실주의 이론의 형성과 발전을 정리해보고, 여러 나라들 속에서 나타난 현실주의의 모습을 고찰하며, 한국 정치의 주요 이슈에 현실주의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현실주의는 악한 인간들의 권력 투쟁과 국가 이익 추구라는 분석틀로 정치 현실과 국제정치를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들이 당위적 목표를 설정해 정치 현실이 이에 따라 작동해야한다고 본 반면, 현실주의자들은 현실 정치 형태의 법칙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또한 이상주의가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여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과 달리, 현실주의는 비도덕적(amoral) 가치관으로 무장할 것을 주장한 마키아벨리와 같이 현실을 가장 잘 파악하여 이를 잘 조정할 것을 강조하는 힘의 논리와 세력균형 등의 개념을 설파한다. 현실주의만큼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고, 서술할 수 있는 이론이 없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의 우수성이 입증된다.
현실주의 지지를 표명하는 이 책은 현실주의의 발전과정과 주요 논쟁들을 시계열적 방법으로 검토하고, 자유주의를 비롯한 비판을 소개하면서 현실주의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각 국의 적용 사례를 살펴보는 데 있어 현실주의의 개념을 유리하게 적용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논지를 전개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다. 가령 베트남 전쟁 종식을 위해 현실주의자들이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는 대목에서는 전쟁 반대라는 단순하지만 숭고한 인류의 가치를 가지고 반전을 주장했던 많은 수의 반전평화론자들의 노력은 평가하지 않고 있다. 비슷하게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의 주요 특징이 잘 드러난 정책이라고 평가하면서 마찬가지로 현실주의에게만 일방적으로 찬사를 늘어 놓는다. 또한 현실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일본의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을 군부의 이상주의적 정책 노선이었다고 평가하는 부분에서는 현실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이상주의를 억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설령 잘못된 이상이 많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주의의 정당성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탈냉전을 예측하지 못하고, 유럽통합 같은 국제 협력 증진과 초국적 단체들의 영향력 확대를 과소평가했다는 현실주의의 실패에는 관대하면서도 자유주의의 실패에는 매서운 칼날을 들이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쉬운 점은 현실주의에 경쟁할만한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대항마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한 검토가 부족해서 객관적 비교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실주의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일부 싣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보다는 그들의 실패를 소개하는 것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현실주의가 이상주의에게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나, 이상주의의 이념적, 이론적 경향은 자유주의 등의 이름으로 현실주의의 대안으로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예로 세계무역기구(WTO)의 확산은 절제된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미국의 일방적 패권에 세계가 휘둘리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주요 관심사로 부상한 경제 분야의 파급력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중국의 경우 국가주권이 박탈당한 역사적 경험을 가져서 국가주권 문제에 감정적으로 강경하게 반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다가도, 우리의 통일문제에서는 강한 민족적 정서가 개입되어 이상적인 목표에 기울고 있다며 햇볕정책을 실현 가능한 현실적 목표를 얻지 못하는 이상주의의 특징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하는 등의 사안 평가의 상이함이 눈에 띄였다. 이는 다양한 필진들로 구성된 이 책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보인다.
최근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며 민주주의 실현 같은 이상을 내세웠고, 남북 전쟁 상황의 링컨이 자신의 현실주의를 노예 해방이라는 이상으로 포장한 것처럼 세상은 적당한 위선으로 덧씌운 현실주의가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현실주의도 지나치면 '미치광이 현실주의'가 되어 파렴치한 전쟁광과 같은 얼굴로 등장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다. 한층 높아지고 있다는 개인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이 이러한 천박한 국가주의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겠지만, 국가 중심의 구조가 당분간은 큰 틀에서 유지될 것이라고 예상되는만큼, 현실주의 패러다임의 분석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우리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실효성 없는 외침도 가려 들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다자주의를 무시하고 노골적인 일방주의를 주창하는 네오콘(neoconservatives)의 발호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균형감각이 되어야 한다.
『위기의 20년』에서 “건전한 정치 이론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와 현실의 양 요소 위에 입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외친 E. H. 카의 지적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극단적 이상주의자들이 객관적 조건과 물리적 법칙을 외면하고, 극단적 현실주의자들이 정치를 통해 추구할 이상과 목적을 잊은 채 현상 유지에만 급급한 것은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상 없는 정치는 맹목적이지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정치는 공허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국제정치를 바라 봐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