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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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에는 '심장'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등장한다. 표제만 등장할 뿐이지만 영화 '비터문'을 조금 변형하여 썼을 뿐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소설 속 소설의 직접 내용이야 언급되지 않지만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간다. 물론 장르가 옮겨가고,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윤색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것들은 분명 창장이었을 것이다.

'은교'를 읽으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루이 말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데미지'다.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에 이적요 시인을, 안나(줄리엣 비노쉬)에 은교를, 마틴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 아들 역)에 소설가 서지우를 끼워 넣으면 얼추 구도가 다 맞아 떨어진다.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는 생물학적 부자관계가 아닐 뿐 그 애증관계는 더 이상 끈끈할 수 없는 부자지간의 것이며, 극 속에서 스티븐 플레밍(제레미아이언스)이 사회적 저명인사였다는 것, 아들인 마틴 플레밍은 비교적 성공한 인생이기는 했지만 동일 분야에서의 아버지의 업적이나 명성과 비교할 수는 없는 자리에 있다는 것, 안나에게 어필할 때 마틴 플레밍보다는 스티븐 플레밍이 훨씬 열정적이고, 더 맹목적이고 그러면서 더욱 노련했다는 점은 '은교'와 딱딱 맞아 떨어진다. '사회적 명성을 다 가진 노년의 신사가 열정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하는 모습'이라는 소재 자체도 비슷하고 말이다. 거기서 살짝 -실제로 살짝이 아니지만, '은교'에서 '심장'이라는 소설이 '비터문'을 "살짝"비틀었다고 하니까 쓰는 말이다 - 비튼 것이 안나와 달리 은교는 약혼녀가 아닌 17세 소녀고, 은교와 서지우의 관계가 실제 연인이라기 보다는 원조교제 사이라는 것, 이적요 시인이 정치인이 아닌 시인이라는 점, 한국의 북한산 언저리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이 외에도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와 아버지간의 행위를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난간으로 떨어지는 설정 대신 아버지가 아들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간의 행위를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살인을 결심하며, 아들은 그 살인미수행위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라 충격으로 사고사 한다고 죽음의 설정을 이중화 한 것이 그 '비틀린'지점이다.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소설은 '화자'의 입을 빌어 서술된다는 차이점으로 인한 장르적 특성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은교에서의 이적요 시인이나, 서지우 소설가의 심리묘사는 지나친 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한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는 것, 조용히 살아왔다는 것, 10년간의 수감생활 이후 시를 쓰며 마치 수도승 처럼 살아왔다는 것,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등 '노인네가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정당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말이다. 67~69세 정도의 노인(사실 노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나이다)이 감당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게 되는 일은 구구절절한 정당화가 없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의 열정과 욕망에는 별 다른 이유가 붙지 않는다. '은교'초입에 나오는 문장처럼 '사람이란 본디 미친 감정'이 아니겠는가. 뭐 문단 서두에 써 두긴 했지만 그 구구절절한 묘사가 이 작품의 미덕이고 가치인지도 모르겠다. 서지우의 은교에 대한 사랑역시 구구절절한 핑계를 동반한다. 서지우의 '은교'에 대한 사랑은 마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인 듯 하다. 서지우가 본디 은교를 사랑하였는가. '은교'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서지우는 이적요가 은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부터 맹렬하게 변화한다. 아버지의 여자인 엄마를 사랑하는 오이디푸스와 같이.
그 심리가 붕 뜨는 것은 역시 '은교'다. 소설의 표제는 '은교'지만 사실 주체로써의 '은교'의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은교는 생각없고 철없는 요즘 고등학생이건, 혹은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의 이음동의어로써의 여신이건 객체에 머물러있다. 몇 마디 스스로 입을 열어 말을 하긴 하고, 일정 부분 수긍도 되지만 그 말은 서지우나 이적요의 자기 고백처럼 완성성을 지니지 않는다.

데미지에서의 '안나'는 '사회적 명성을 다 가진 노년의 신사가 열정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하는 모습'을 그리기에 지나치게 설명되는 감이 없지 않다. 내가 볼 때 '데미지'의 안나는 그저 자신이 가진 욕망에 충실하고 그것을 잘 조정하고 저글링하는 영악한 여자일 뿐, 어릴 때 아버지 직업 때문에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느니 친오빠가 방문 앞에서 자살했느니 하는 트라우마는 그저 구절구절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스티븐 플레밍의 자기 파괴적 열정과, 아들인 마틴 플레밍의 절망감에 대한 묘사는 그렇게 간단히 잘라버리면서,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안나'의 행동에 핑계를 대주는 데 그렇게 골몰했던 게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다. 그 점이 바로 '은교'와 '데미지'가 확연히 다른 지점이기도 할테다.

삶을 뒤흔드는 열정의 존재가 뭐가 그리 새삼스럽겠는가. 어떤 시점의, 어떤 상황 속의 열정은 사람의 삶을 사회적 성공과 표준적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지만, 어떤 시점, 어떤 상황 속의 열정은 삶을 파괴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나이와 무슨 상관이겠으며, 개인이 놓인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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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ㅣ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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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작가의 전작 '귀신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한권짜리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서너권 이상 되는 대하소설에서나 나올법하게 수많은 사연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잔뜩 등장한다는 점도 그렇고, 어떠한 지형(귀신의 시대에서는 노령산맥, 이슬람 정육점에서는 한남동)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역사, 지리적인 삶을 짚어 나가는 것 또한 그러하다. 시점을 알 수 없는 훗날의 내가 '어린날의 나'가 되어, 1인칭작가시점도 전지적작가시점도 아닌 묘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묘사해 나가는 것도 그러하다. 


묘사력과 익살, 사안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나다. '사람의 신화'에서 '귀신의 시대'를 거쳐, '봉섭이 가라사대'까지 오는 동안 마술적인 차용은 줄어들고, 어두운 묘사는 줄어들며, 유머는 점점 증폭되어가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데, 이 작품또한 그 연장선 상에 서 있다고 본다. 거의 모든 작품의 무대였던 '노령산맥'에서 '한남동'으로 옮겨왔기 때문일가. 약간 아쉬운 것은 이번 작품은 전작에 비해 좀 더 철학적이 되었고, 좀 더 인위적이 되었고, 좀 더 설명적인 듯하다는 느낌이다. 주인공 소년의 사유가 너무 깊은 나머지 소설과 철학적 사유가 따로 읽히는 듯한 느낌이 조금 있다. 인물의 얼굴을 스크랩하고, 그 스크랩으로 세계지도를 만드는 것은 지나치게 illustrative하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고, 안나 아주머니를 필두로 한 그 사람들이 돼지도축 여행을 떠나는 것 또한 너무 상징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심지어 나중에 '총상'과 관련된 얘기가 나올 때는, 그것을 읽으면서 상상되는 '그 사건'을 '직접 언급'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며 적잖이 걱정마저 되었다. (다행이 추측만 할 수 있게 하지, 언급을 직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소설에서'아쉽다'는 '완벽을 기대했던 작품'에서 약간의 트집잡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데서 오는 감정이지, 영 아닌 작품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 여타 작가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기와, 기질과 생명력이 있다. 


손홍규는 정말 보석같은 작가다. 문단에서만 보석같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 세대에 있어서의 보석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에서 경계세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경험을 그 어느 쪽이든 다 풍부하게 직접해보고, 역사와 생활을 씨실과 날줄로 엮어 유머가 넘치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재주 때문에 그를 보석같다고 생각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우리세대에 이런 철학과 이런 문제의식과 이런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예전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훨씬 우리 세대에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쉽게 용서하게 만드는 세월 속에서 나는 얼마나 경주마 같이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일천한 상상력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가.  

일상에 함몰되지 않는, 징징거리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과 유머를 잃지 않는 손홍규.  

개그콘서트 식으로 말하자면, '손홍규 포레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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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ㅣ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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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손홍규. 나와 동년배에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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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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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파괴, 판타지적 감성의 도입. 읽고 나면 도대체 줄거리가 뭔지 알 수 없는 소설들의 홍수 속에.

나와 같은 세대의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궁금했다.

아.... 김애란. 대단하구나.

소설적 재미를 고스란이 유지하며, 동시대를 꼭꼭 눌러쓰고 있구나. 멋지고. 소중하다.

내가 할 말은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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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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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그렇게 천박하고 얄팍한 은유로 쓰여졌을 리가 없지만, 나의 감상 및 분석에 따르면, 이건 '대한민국에 글쓰는 아내를 견딜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에 대한 질문과 대답인 것 같았다.

글쓰는 아내의 그 예민함, 명민함, 그리고 넘볼 수 없는 지독한 자기 세계. 그와 더불어 생활인으로써의 감각 없음과 다른 분야에서의 천치 같음. 게다가 아내의 글을 읽어보면 어김없이 들어 있는 자기의 얘기 (소설 쓰는 사람의 등장 인물에 주변 인물들이 묻어있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故 김소진의 소설에 소설가인 아내의 글을 읽고 괴로워 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 있었다. 본인이 소설가인 사람도 이런 글을 쓸 지언데....) 이것들을 견딜 수 있는 남자는 아마 굉장히 드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은 그렇게 느껴졌다. 글쓰는 아내를 견딜 수 없다고 난리난리를 한번 쳤던 남편이. 도저히 그것은 끊어버릴 수 없는 천형 같은 것이라고 깨닫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고 잘 살아보기로 결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낄낄 웃었다. '그래, 자아만 강하고 경제력과 생활력도 없는 여자를 견딜 수 있는 남자는 없겠지. 그런데 그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남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 이현. 너의 이름을 기억하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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