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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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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손에서 놓치 않고 단숨에 다 읽었다. 그 만큼 흡인력이 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멍하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범죄스릴러로 시작되더니, 섬의 이주민이 원주민을 바라보는 것 같은 고갱의 그림같은 풍경을 그리다가, 섬에 지진이 나면서 재난 스릴러가 되더니, 어느 정도 주인공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부터는 재난 휴머니즘 영화가 되었다가, 재난 로맨스가 되는가 싶더니, 이아냐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는 장면부터는 '이 소설이 이제 법정물로 흘러가려나?'했더니 다행이 법정물로 가지는 않고, 재난 로맨스로 끝이 나는가 싶더니, 유진의 환영이 나타났다가 없어지며 물자국이 남는 장면에서는 이런 환타지인지 오컬트인지... 라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정신없이 읽었는데, 다 읽고나니 더 정신이 없다.
읽는 사람의 그릇이 작은 탓이 크겠지만, 어쩌면 조금은 작가가 과욕을 부린 탓도 있지 않나 싶다.

이야기를 정신없이 쫒아왔는데 정리가 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주인공인 '진'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인것 같다. 도대체 이 괴물같이 강한 여자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이 여자가 괴물같이 강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같은 것도 보이지 않고 말이다. 제목은 '미칠 수 있겠니'지만, 읽다보면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진이라는 여자가 그 삶을 미치지 않고 견디는게 참 이상할 정도로 보인다. (여기서 부터는 스포일러)'또 다른 나'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휴양지의 서번트를 거느린 놈팽이 남편으로 변해가고, 그 서번트가 남편의 현지처화 되고, 그 현지처는 임신을 하고, 이 여자는 그 남편의 현지처를 칼로 찌르고, 그 현지처를 좋아하던 남자아이로 부터 찔리고 정신을 잃고, 하지만 혐의는 받지 않고, 남편은 자살을 암시하는 말을 남기고 실종되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미치지 않고 7년 동안 또박 또박 도서관에 출근해서 삶을 견딜 수가 있는지. 그리고 매년 남편을 찾으러 그 섬에 가고. 그 섬에서 현지 드라이버 이아냐를 만나 이런 저런 교감을 나누고 지진을 겪으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이야기가 너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다. 진이란 여자도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고.

작가의 전작인 소설집 "안녕, 엘레나"를 참 좋게 읽었다. 지독한 삶을 참 지독하지 않고 담담하게 다루면서도 따스한 햇빛 같은 것을 비추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단편 '안녕, 엘레나'나, '조동옥, 파비안느'를 읽으면서는 이국적인 배경을 이물감없이 버무려내는 작가의 솜씨에 탄복했었다. 어쩌면 이 소설 "미칠 수 있겠니"는 읽기에 따라 내가 느꼈던 그 두가지 장점을 모두 가진 작품이라 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나에게는 좀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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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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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라서 행복한,
독자라서 행복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면 상상도 못할 주제, 나라면 상상도 못할 스케일, 나라면 상상도 못할 디테일,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전개.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선사하는 소설 말이다. 독자에게 최악인 소설이라면 그 반대의 것일 것이다. '이런 소설 나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그 만큼 도무지 신선한 것도 압도적인 것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티븐 킹 보다 서늘한,
내 독서량이 일천하기 때문에 아무 소설이이나 함부로 연상하고 색깔을 입히는 것은 안될일이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잡고부터 이런 저런 소설들에서 스타일이 겹치는 부분이 없는 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7년의 밤'을 손에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얼른 떠오르는 한국 소설은 없다. 내가 장르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 탓도 있겠지만, 추리, 공포, 범죄 소설의 느낌을 그려내는 본격 문학 주류 작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일천한 독서력(讀書歷)에 떠올린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이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포석, 분/초 단위의 촘촘한 사건관계 구성, 불우한 주인공(?) 등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떠올리게 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한 불안감과 공포. 그 불안감과 공포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이 괴물이 될수도, 혹은 괴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려낸 세세한 내면묘사와, '인간 집단'자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괴물이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소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키븐 킹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 하고 '7년의 밤'이 뜨겁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간혹 '따뜻한 것'은 있으되- 내 영혼의 아틸란티스, 사다리의 마지막 칸 등- '뜨거운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스티븐 킹 소설에서 따스함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회한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7년의 밤에는 '현재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잃지 않으려는 뜨거움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의 사이에서도 냉소와 허무와 자기 부정으로 상황을 등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 붙고 물고 늘어지는 그 뜨거움. 그 어떤 기법적인 장점보다,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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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불면의 봄밤을 함께하고 싶은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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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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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읽었던 '통조림공장' 단편이 들어있는 소설집이다. 그때 들었던 느낌은 '재기발랄하다'기 보다, 회사의 리소스를 개인적인 용도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노동자의 사소한 욕망과, 무언가를 저장하고 싶어하는, 혹은 저장하여 은폐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당연한 욕망을 참 독특한 듯 하면서도 편안한 만듦새로 '담아낸'것이 기분 좋았었다. 편혜영의 다른 작품들을 함께 묶어서 읽고 싶다.
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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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첫 소설집 '바늘'을 읽자마자 나는 열광했다. 사회 하부계급 여성의 욕망을 그토록 자세하게 그려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바늘'을 읽자마자 이런 쪽글을 썼었다. '읽고 또 읽었던 소설. 관념적이지 않고,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묘사적인 소설.'바늘', '꿈꾸는 고물상', '눈보라 콘' 어찌 그 안의 주인공들과, 그 안의 배경들을 잊을까.'
이후, 그녀의 눈물사용법, 명랑 등은 '아... 조금만 더 해주지. 더 해줄 수 있었을텐데'라고 생각했다. 기대가 큰 나는 여전히 그녀의 작품 아래 배고픈 입을 벌린다. 이번에는 조금 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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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신작이라는 것 만으로 기대가 된다. 전 세대들과는 다른 여성작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확확 성장해 가는 것이 가슴 아리게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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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엔들 잊힐리야 - 상 박완서 소설전집 12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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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읽었던 느낌하고는 천양지차다. 전처만, 머릿방아씨, 태임이, 종상이, 태남이, 여란이 등 등장인물들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것만이 내가 예전에 읽었었다는 증거가 될 뿐. 세월을 지나 읽는 그 느낌은 새로운 것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줄여서 얘기하자면, 지금 읽은 것이 예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그때는 이 소설이 이렇게 좋은, 그리고 대단한 작품인지 몰랐다.

다르게 보이는 등장인물들
이해할 수 없었던 머릿방아씨의 자기방기(自己放棄), 그런 사람으로 부터 나온 신비할 정도의 놀라운 열망. 고등학교 때 읽을 때는 너무나 모순되어 보였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으니, 머릿방아씨가 자기방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를 포기할 수 없어서 생활을 방기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활을 풀어놓을 대로 풀어 놓아, 그 힘으로 자기를 지키다가 결국 그 풍선효과로 또 강렬한 생존본능에 사로잡히게 되는 강력한 길항작용을 견디어 내는 삶. 가슴이 아프고 아팠다.
머릿방아씨에 대한 이해가 바뀜에 따라, 전처만의 처(妻) 홍씨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홍씨에게 남아있는 인상이란,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이고 있지를 못해 쓸고 닦고 만들고 먹는 살림에 목숨 걸어 domestic goddess가 되고자 하는 psycho 혹은 그악스러운 시어머니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본 홍씨는 그렇지 않다. 심성이 바르고, 차분히 자기 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원망삼지 않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성취를 찾아나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맑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 앞의 부조리(며느리의 부정)를 원망삼은 단 한번의 댓가로 홍씨가 치르는 대가는 사실 가혹하다 할 만하다.
전처만의 세째아들인 이성이는 고등학교 때 읽은 경험으로 '천하에 약삭 빠르고 상도의에 어긋나는 야차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는데, 읽고보니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반보 앞서 보고, 되도 않는 뚝심이나 불도저 정신같은거 없이 착실하게 자기 장사를 해 나가는 사람이다. 대단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차분히 시대의 큰 파도를 탈 뿐이다. (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내가 그 동안 닳고 닳은 것인지도)
주인공 부부라 할 수 있는 전태임, 김종상에 대한 느낌도 예전과는 참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태임이가 거상(巨商), 거목(巨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완벽한 판단 오류였다. 고등학교 시절, 읽으면서 이런 거상(巨商)에게 사임당을 닮으라는 "태임"이라는 이름은 너무 스케일이 작은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집안을 꾸려나가는 배포에 있어서는 거목인지 몰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당찬 상속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어릴 때 읽을 때는 태임이의 이미지에 가려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종상이의 그릇이 보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보적 가족 - 콩가루 집안? 아니,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가정
읽으면서 놀랐던 건, 이 소설 면면히 흐르는 '가족해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문제없이 흘러가는 '대안 가족'의 얘기가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가부장제에 얽매인) 가족해체를 두려워하고 개탄하는 촌스러운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100년전 개성을 그리는 박완서 할머니의 발상에는 혁명적인데가 있다. 세간의 잣대로 보면 콩가루 집안일지 모르나 진정 진보적이고 인간적이다. 청상이 된 며느리가 가진 아이를 거두고 손수 이름을 지어주는 전처만 - 그 핏줄에 대한 인정이, 최초의 가부장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의는 차치해두자-을 비롯하여,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이종상-전태임 커플또한 녹록치 않다. 시집와서 시댁 귀신이 되지 않는 다면 스스로 부끄럽다 여기는 것이 마땅한 시대에, 남편옆에 있는 여란에게 보란 듯이 쿨하게 민적을 갈라나가고, 일본 유학 후 재혼을 하는 상철이 댁. 시집와 밥상머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식구들이 먹고남긴 잔반을 허겁지겁 입에 주워넣던 승재네 며느리가, 남편 살해범을 자처 한 후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 뒤,'혜정이'라는 이름을 새삼스럽게 찾아 갖는 그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 혜정은 또 추후에 태남과 재혼하여 사실상 동해랑의 안주인이 되니, 신기하고 신묘한 가족사다. 2006년작 '가족의 탄생'이 생각나는 대목이니, '미망'이 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가.
전태임, 김종상의 부부 관계가 모던한 점 또한 주목할만하다.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시작된 결혼생활이니, 모던하다못해 황당(?)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의 사업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여필종부의 관계도, 처갓집 뜯어먹고 사는 관계도 아닌, 그저 인생의 동반자 관계.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다. (물론 이 와중에 둘 사이의 소생인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는 전적으로 전태임의 몫이긴 하다.)

박완서는 초기작과 말년작만 읽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왕성하게 필력이 뻗치던 시절. 그 시절의 글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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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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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에는 '심장'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등장한다. 표제만 등장할 뿐이지만 영화 '비터문'을 조금 변형하여 썼을 뿐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소설 속 소설의 직접 내용이야 언급되지 않지만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간다. 물론 장르가 옮겨가고,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윤색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것들은 분명 창장이었을 것이다.

'은교'를 읽으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루이 말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데미지'다.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에 이적요 시인을, 안나(줄리엣 비노쉬)에 은교를, 마틴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 아들 역)에 소설가 서지우를 끼워 넣으면 얼추 구도가 다 맞아 떨어진다.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는 생물학적 부자관계가 아닐 뿐 그 애증관계는 더 이상 끈끈할 수 없는 부자지간의 것이며, 극 속에서 스티븐 플레밍(제레미아이언스)이 사회적 저명인사였다는 것, 아들인 마틴 플레밍은 비교적 성공한 인생이기는 했지만 동일 분야에서의 아버지의 업적이나 명성과 비교할 수는 없는 자리에 있다는 것, 안나에게 어필할 때 마틴 플레밍보다는 스티븐 플레밍이 훨씬 열정적이고, 더 맹목적이고 그러면서 더욱 노련했다는 점은 '은교'와 딱딱 맞아 떨어진다. '사회적 명성을 다 가진 노년의 신사가 열정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하는 모습'이라는 소재 자체도 비슷하고 말이다. 거기서 살짝 -실제로 살짝이 아니지만, '은교'에서 '심장'이라는 소설이 '비터문'을 "살짝"비틀었다고 하니까 쓰는 말이다 - 비튼 것이 안나와 달리 은교는 약혼녀가 아닌 17세 소녀고, 은교와 서지우의 관계가 실제 연인이라기 보다는 원조교제 사이라는 것, 이적요 시인이 정치인이 아닌 시인이라는 점, 한국의 북한산 언저리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이 외에도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와 아버지간의 행위를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난간으로 떨어지는 설정 대신 아버지가 아들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간의 행위를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살인을 결심하며, 아들은 그 살인미수행위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라 충격으로 사고사 한다고 죽음의 설정을 이중화 한 것이 그 '비틀린'지점이다.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소설은 '화자'의 입을 빌어 서술된다는 차이점으로 인한 장르적 특성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은교에서의 이적요 시인이나, 서지우 소설가의 심리묘사는 지나친 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한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는 것, 조용히 살아왔다는 것, 10년간의 수감생활 이후 시를 쓰며 마치 수도승 처럼 살아왔다는 것,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등 '노인네가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정당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말이다. 67~69세 정도의 노인(사실 노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나이다)이 감당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게 되는 일은 구구절절한 정당화가 없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의 열정과 욕망에는 별 다른 이유가 붙지 않는다. '은교'초입에 나오는 문장처럼 '사람이란 본디 미친 감정'이 아니겠는가. 뭐 문단 서두에 써 두긴 했지만 그 구구절절한 묘사가 이 작품의 미덕이고 가치인지도 모르겠다. 서지우의 은교에 대한 사랑역시 구구절절한 핑계를 동반한다. 서지우의 '은교'에 대한 사랑은 마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인 듯 하다. 서지우가 본디 은교를 사랑하였는가. '은교'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서지우는 이적요가 은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부터 맹렬하게 변화한다. 아버지의 여자인 엄마를 사랑하는 오이디푸스와 같이.
그 심리가 붕 뜨는 것은 역시 '은교'다. 소설의 표제는 '은교'지만 사실 주체로써의 '은교'의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은교는 생각없고 철없는 요즘 고등학생이건, 혹은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의 이음동의어로써의 여신이건 객체에 머물러있다. 몇 마디 스스로 입을 열어 말을 하긴 하고, 일정 부분 수긍도 되지만 그 말은 서지우나 이적요의 자기 고백처럼 완성성을 지니지 않는다.

데미지에서의 '안나'는 '사회적 명성을 다 가진 노년의 신사가 열정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하는 모습'을 그리기에 지나치게 설명되는 감이 없지 않다. 내가 볼 때 '데미지'의 안나는 그저 자신이 가진 욕망에 충실하고 그것을 잘 조정하고 저글링하는 영악한 여자일 뿐, 어릴 때 아버지 직업 때문에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느니 친오빠가 방문 앞에서 자살했느니 하는 트라우마는 그저 구절구절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스티븐 플레밍의 자기 파괴적 열정과, 아들인 마틴 플레밍의 절망감에 대한 묘사는 그렇게 간단히 잘라버리면서,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안나'의 행동에 핑계를 대주는 데 그렇게 골몰했던 게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다. 그 점이 바로 '은교'와 '데미지'가 확연히 다른 지점이기도 할테다.

삶을 뒤흔드는 열정의 존재가 뭐가 그리 새삼스럽겠는가. 어떤 시점의, 어떤 상황 속의 열정은 사람의 삶을 사회적 성공과 표준적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지만, 어떤 시점, 어떤 상황 속의 열정은 삶을 파괴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나이와 무슨 상관이겠으며, 개인이 놓인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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