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의 거짓말 - 워렌 버핏의 눈으로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말하다
최경영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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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정부의 언론 장악이 한참일 무렵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KBS 사원행동을 했던 한 기자가 있다. 그는 이달의 기자상을 여섯 번이나 받을 정도로 탐사보도 영역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탐사보도팀에서 스포츠 중계팀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이유야 짐작할 수 있는 바대로인 보복인사.
이 책의 저자 최경영 KBS 前기자의 이야기이다.

끊임없이 언론의 객관성과 진실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던 그는 “한국 언론, 너는 진실을 보도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서, 투자가 워렌 버핏의 말을 인용해 “워렌 버핏의 상식 :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대조하여 한국 언론의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대량해고’, ‘대량 감원’, ‘대규모 실직’이라는 단어 대신 ‘구조조정’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근로자를 노동자/직장인으로 구분하여, 파업을 하고 있다면 노동자가 되는 상징적 조작. 노무현 정부 때는 범람하던 ‘세금 폭탄’,‘서민 경제 파탄’이라는 용어 (보수 정권으로 바뀐 지금은 세금이 폭탄처럼 투하되지 않으니 참으로 편안하실 겁니다. 그런가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당사국인 미국의 최대 경제지인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 ‘금융위기’라는 단어를 1743번, ‘공포’를 587번, ‘공황’이라는 단어를 351번 언급한 반면, 여기 멀리 태평양 건너에 있는 나라 한국 대표 경제지에서는 각각 4870번, 675번, 425번 사용했던 한국 언론의 호들갑 등.

대놓고 비판하겠다고 쓴 글이다. 읽으면서도 ‘이 저자, 목에 핏대 너무 세운다.’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저자의 답답한 마음이 진하게 전해진다. 책을 덮기 전, 에필로그에서 “사실 이 책은 ‘분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저자의 말을 보며 ‘어쩐지. 그렇게 보였소 -’ 하고 끄덕끄덕.
하도 답답하고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펜을 들었다고 저자 또한 직접 밝히고 있긴 하나 대중이 뉴스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다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보는 것도 좋았을텐데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한 비판만이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어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긴, 언론이 독립 언론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면야 대중이 언론이 뿌린 정보를 얼마만큼 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또 얼마만큼은 걸러내야하는지 이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테지..  때문에 언론인들에게 이렇게 고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한국 언론이 즐겨 쓰는 ‘국익’ ‘화합’ ‘안정’과 같은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단어에는 그들이 보호해주고 싶은 사회 기득권의 이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다원화된 이익사회입니다.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직장인의 이익이 모두 다르고 또 그 안에서도 개별적 이익이 갈라집니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어떤 집단은 혜택을 받고 어떤 계층은 거꾸로 불이익을 받습니다. …… 자본주의에 바탕한 민주 사회는 이렇게 이익이 천차만별입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이 말하는 국익은 기실 신기루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매 순간 갈등하고 타협합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고 있는 ‘국익’이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포장하기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p.28-29)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부당한 것인지 명백히 구별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언론이 그 부당함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언론은 결과적으로 그 부당함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p.62) 

 값싼 뉴스는 과잉으로 넘쳐나고, 진짜 정보는 없는 상황, 특히 논쟁적인 주제에서 뭔가 뉴스는 많은데 정보가 없는 현대 미디어의 상황을 스탠퍼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프록토는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라는 용어로 정의했습니다.
아그노톨로지는 ‘사회-문화적으로 공고화된 무지에 대한 탐구’라는 뜻입니다. 좀 어렵습니다. 저도 어렵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추진한다고 하고 야당과 시민단체는 반대한다고 하는데 시민들은 그 핵심 쟁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핵심 쟁점에 관해 명확히 판단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언론에서 대중에게 주로 논쟁의 ‘가십거리’만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중은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만 사실은 들은 게 없고, 아는 것 같지만 아는 게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프록토 교수에 따르면 대중이 이렇게 ‘사회-문화적으로 공고화된 무지’의 함정에 지속적으로 빠지는 이유는 바로 특정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핵심 쟁점과 내용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중은 강호순이나 김길태와 같은 특정 정치 경제 집단의 이익이 얽혀 있지 않은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핵심적인 내용을 듣게 되지만,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처럼 세금, 환경 등 정작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서는 온갖 소음만 듣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특정 이익집단이 ‘소음’을 통해 교란하고 물타기한다는 것이지요. 이 소음의 대부분이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입니다.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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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키스 뱅 뱅!
조진국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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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류 모델 나현창, 진실한 사랑이 두렵기만한 잘나가는 스타일리스트 민서정,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 담백한 남자 정기안. 그리고 귀엽지만 어설픈. 2인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못마땅스럽기만한 네일 아티스트 조희경. 소설은 이 네 명의 젊은이들이 얽힌 사랑이야기를 각자의 시각에서 보여주고 있다.

<소울메이트><안녕,프란체스카>를 보진 않았지만, 이 두 작품들에 열광하던 이들이 있는걸 보면 이미 검증된 작가다 싶어서 별 거리낌 없이 책을 들었다. 그런데 왠걸 열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아차차- 하게 된다. <코스모폴리탄>에 연재가 되었다더니. 역시나. 하고 적당히 페이지를 눈으로 훑듯 읽는다. 수위가 한참이나 높은 글들을 많이 싣기로 소문이 자자한 <코스모폴리탄>에 연재되어서 그런걸까? 적당히 자극적일꺼라고는 예상했지만 출근시간 한 시간 전, 여유롭게 커피 한 잔 마시며 소설이나 읽자던 계획은 남이 볼새라 책장을 넘기는 분주한 손으로 인해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그러고보니 주인공들 직업도 모델, 스타일리스트, 소설가, 네일아티스트다. 약간은 붕 뜬 듯한, 현실감이 묘하게 결여된 스토리도 잡지의 무게 딱 그만큼인 것 같다. 무게로 따지자면 <코스모폴리탄>이 여느 잡지들보다는 좀 더 무겁기는 하더라마는.



Story
1. Poison Prince '나현창'
현창은 모델이지만 아르바이트로 바에서 일을 하고 있다. 바에서 그는 모델 오디션에서 자신에게 칼날을 겨눈 스타일리스트 민서정과 맞닥뜨리게 되고, 그녀의 친구 희경으로부터 서정과 함께 밤을 지새워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이었고, 하룻밤 쯤이야 누구와 잠을 자든 상관이 없었던 그는 이제껏 그래왔듯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고 서정과 함께한다.

2. Writing to reach you '정기안'
서정의 애인인 기안은 서정과 함께 간 파티에서 현창을 만난다. 익숙한 얼굴의 그. 며칠 전 기안에게 전달된 사진 속 주인공이다. 사진에서 현창은 서정과 열락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안은 감정을 억누르고 사진 속 모습을 털어내려 애쓴다. 한 번이니 나만 눈감아버리면 지나갈 수 있으리라. 그녀와의 사이는 아무 문제 없으리라. 파티에서 희경은 현창에게 서정과 다시 한 번 밤을 같이 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그녀의 몸도 마음도 그 자신에게 향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그날 이후 두 번째로 함께 밤을 나눈 현창과 서정. 그들의 모습은 이번 또한 기안에게 전달된다. 기안은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서정에게 이별을 고한다.

3. My heart is as black as night '민서정'
화보촬영차 들른 일본의 바에서 기안을 만났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 이제껏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안달했던 여느 남자들과 다르게 그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늙어 죽을 때 까지 함께 하자고 했던 그가 이제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두려워 현창에게 몸을 묻으며 자신을 망가뜨려본 것인데, 기안이 이별을 고하자 서정은 그가 없는 삶이 이제는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겠다고 다짐한 서정은 현창에게 제안했다. 기안과 서정 공동명의로 된 집에 같이 들어가서 살자고. 이렇게해서 세 명의 기묘한 동거생활을 시작된다.

4. Broken bicycles '조희경'
희경은 서정의 친한 친구이다. 잘나가는 스타일리스트 서정의 소개로 네일 아티스트로의 명성을 떨쳐나가고 있긴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서정의 그림자일 뿐이다. 자신의 일에서도 일인자이지만 연예인 뺨치게 예쁘기까지한 서정. 뭇남성들의 시선은 서정에게만 향해있고 희경은 언제나 서정의 친구, 딱 그 자리에만 있다. 하루걸러 남자를 갈아치우는 서정. 곁에 기안이라는 멋진 남자가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만족할 줄 모르고 여전히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헤매고 있는 서정이 희경은 못마땅하다. 기안이 그녀에게는 너무 과분해보여서, 그 남자가 내 남자가 되었으면 해서, 그 남자를 얻고만 싶어서 현창에게 제안을 했다. 현창이 서정의 몸도 마음도 다 차지해달라고.

진창에서 뒹굴기만 하는 현창. 그의 악마 같은 웃음과 나이답지 않은 어두운 모습에 서정은 몸서리를 치지만, 현창은 자신의 꿈과 서정을 맞바꿀 모험을 감행한다. 현창의 사랑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고, 서정의 사랑은 현창과 기안 사이에서 위태위태한 외줄타기와 같았다. 가랑비에 옷 젖어들 듯 아스라한 감정을 새긴 기안은 현창의 모험 앞에서 뒤돌아서야만 했고, 친구의 사랑을 넘본 희경은 연심을 주었던 남자에게 자신의 밑바닥 추악한 모습을 다 드러내고야 말았다. 꿈을 잃었지만 사랑을 얻은 현창, 삐딱하게 칼날을 겨누고서라도 지켜야만 했던 자신을 더 이상 홀로 지킬 필요가 없어진 서정.
결국 기안이 홀로 남게 되었지만 서정은 아무래도 기안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상대였을지 모르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기안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내고 싶다. 
티격태격할 것은 안봐도 뻔하지만 현창과 서정이 앞으로 행복하기를, 기안은 그에 맞는 좀 더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을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희경도 자신을 좀 더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게 되길, 그에 앞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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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미닛 룰 모중석 스릴러 클럽 22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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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minute rule. 은행을 털고 경찰이 도착하기 전 무사히 빠져나가기 까지 필요한 시간은 단 2분. 돈을 챙겼든 챙기지 않았든 은행전문털이범 맥스 홀먼은 이 2분의 법칙을 반드시 지킨다. 그러던 어느 날 홀먼은 'Two minute rule'을 어겨 경찰에 집히게 되고, 10년간의 교도소 수감을 마친 후 보호관찰 상태로 풀려나게 된다.  

 그런데 수감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옮기려는 홀먼에게 그의 아들인 리처드가 경찰 동료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생의 반을 교도소에서 보낸 홀먼과는 달리 경찰이 되어 그 자신을 안심하게 만들었던 아들, 도나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었던 아들이 피살되었다는 사실은 홀먼을 혼란 속으로 집어삼킨다.   

 도대체 왜. 그의 아들이 피살되었던 것일까? 홀먼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가지만 리처드의 상관으로부터 아들이 아버지인 그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과 질이 좋지 못한 동료들과 어울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충격에 휩싸인다.   

리처드와 그의 동료들을 살해한 용의자는 곧 밝혀지지만 용의자는 체포 직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상태였고 이로서 경찰의 수사는 종결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홀먼은 이 사건의 수사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수가 없고,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밝힌 내용들 사이에서 미심쩍은 구석들을 발견하게 된다.   

부패한 경찰이었다는 아들의 오명을 벗기고 진짜 살인범을 찾기 위해 홀먼은 전직 FBI 요원이자 10년 전 자신을 체포한 캐서린 폴라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둘은 진실을 쫓아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과 음모들.  진실에 다가갈수록 홀먼에게는 '부전자전' 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떠오르고... 아들에게 못다 준 부성애, 죄책감, 자기 회한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서 폴라드는 수사의 진척에 따른 쾌감과 짜릿함, 홀먼에 대한 동정과 애정을 갖게 되는데... 

 

모든 것을 걸고 아들의 죽음을 밝히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홀먼과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적극적으로 돕긴 하지만, 여전히 그를 100%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폴라드. 소설의 엑기스인 마지막 50페이지에 다다라서 매 페이지마다 촌각을 다투며 벌어지는 일은 'Two minute rule'의 진가를 만날 수 있게 한다.

독서 속도가 매우 느린 나조차 400페이지 분량의 책을 대여섯 시간만에 훅-하고 읽어버릴 정도로 흠뻑 빠져들 수 있었던 책이다.  
1. 스토리가 단순히 사건의 전개에만 치중하지 않고 인물의 내면 묘사와 개인내적인 갈등에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어 그들의 감정에 절로 젖어들게 만든다는 점.
2. 폴라드가 셜록홈즈도 필립 말로도 아닌, 단지 '전직' FBI 요원으로의 모습 딱 그 만큼만 보여지고 있다는 점.
3. 그래서 결국은 '폴라드가 아닌' 사건의 당사자인 리처드가 문제를 해결해낸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든다.
별 기대 없이 집어들었는데 의외성을 엿볼 수 있었으니 아주 큰 소득을 얻은 것만 같다. 
작가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어 최근에 출간된 <워치맨>도 주문해서 책상 위에 대기 중.
이번 책 <투 미닛 룰>을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겠다 싶었는데, 다음 책 <워치맨>은 이미 <타운>이라는 영화로 영화화 되었다. 책 읽기 전에 너무 기대하면 안되는데.. 그래도 다음책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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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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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서울이라는 도시,
회사원은 늦잠을 자고 교인들은 기도를 하고
연인들은 사랑을 속삭이며 누군가는 축구공을 찬다.
막 몽정을 시작한 사내아이들이 강가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것도,
강바닥을 흘러다니던 시체가 홀연히 떠오르는 것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눈을 꼭 감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알몸의 남자.
그는 오랫동안 물밑을 떠돌고 있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 말이 없다. 아직은...


가벼운 연애소설이나 감성 에세이와 어울릴 것 같은 정이현이라는 작가가 가족 소설을 썼다고 한다. 두 번이나 사회적 인사의 상실을 경험하고 감정적으로도 힘겨웠던, 그리고 2008년 금융대란의 여파가 아직 걷히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던 2009년에는 심리학 책이나 엄마를 찾는 소설-<엄마를 부탁해>라던가 <도가니>와 같은-이 빠른 속도로 밀리언셀러 기록을 돌파했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가족 소설이라기에 가족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 예상했는데(어쩌면 그런 듯 싶기도 하지만) 한 가족에게 생긴 미스테리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정이현의 미스테리 소설은 약간 의외다 싶었지만 이번 책을 통해 작가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해낸 듯한 느낌도 든다.

한강을 표류하는 시체. 표지를 넘기고 본문을 읽어들어가려 할 때 처음으로 만난 문장이다. 요 근래 읽은 책이 <편집된 죽음>, <보이A>, <위대한 개츠비>, <셜록홈즈> 등 죄다 살인이나 자살, 죽음이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가 없는지라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찾다가 '정이현'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저 반가이 손에 들었는데, 맙소사 또 시체라니... 첫 문장부터 ‘이게 뭐야’ 하고 탄식할 수 밖에 없었지만 살인, 죽음이라는 소재 보다는 조금 멀리, 그렇지만 긴장의 끈은 놓을 수 없는 상태에서 책은 의외로 단숨에 읽혀진다.

정이현의 소설은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 두 번째다.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네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앞으로 꼭 챙겨 볼 작가 목록에 정이현이라는 이름을 추가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고, 한 두해 지난 후 단편집이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단편 소설을 읽지 않는 취향상 그 책은 pass.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나는 정이현 작가의 소설.
그러고보면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도 평범한 듯 하면서도 조건 좋아보이는 남자 영수가 거짓 영수였다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긴했었는데 이번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각자가 하나의 영수이고, 이 가족은 영수들의 집합체이다.

표류하던 시체에서 가족의 이야기로 건너온다.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김상호, 화교 출신의 어머니 진옥영, 상호와 전처 사이의 아이 은성, 혜성 그리고 터울이 큰 막내 딸 유지. 서래마을 고급 빌라에 거주하고 남들이 보기에 꽤 그럴듯한 모습의 가정을 꾸리고 있는 이 가족에게 겨울의 기운이 마음껏 활개치는 2월의 어느 일요일.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막내 딸 유지가 행방불명 되면서, 이미 오래전 금이 가 있던 유리창의 파편들이 아슬아슬하게 끼어있던 가족이라는 틀에서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이다.

유지가 사라진
일요일, 아버지 상호는 사업상 약속을 위해 외출하고 어머니 진영은 친정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옛 연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대만으로 간다. 첫째 은성은 남자친구와 틀어지면서 자해를 하고, 이 소식을 듣고 혜성은 누나 은성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유지가 홀로 집에 남아 있던 그 날,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누구도 유지가 집안에 홀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에 신경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몇 시 즈음에 어떤 차림을 하고 누구와 함께 집 밖을 나섰는지도 알 수가 없다. 상호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인 딸아이의 행방불명 사실을 경찰에조차 알리지 못하고 사립 탐정을 고용해 조용히 수사할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네 명. 상호, 옥영, 은성, 혜성은 서로 품어온 비밀이 들킬새라 전전긍긍하며 유지의 부재에 자책하고, 이런 네 사람 각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 그리고 마침내 이 네 명이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면서-상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옥영이 집을 떠난 그날 누구를 만났는지, 은성과 혜성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무관심으로 포장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있다고 혹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여기고 있던 이들은 가족이 되어 서로를 돌보게 된다.

거짓 영수처럼 거짓 인생을 살고 있던 네 명의 가족이 다른 한명의 구성원의 사고로 인해 대화와 관심으로 서로를 알아가면서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이니 이것도 일종의 상처 치유를 통한 ‘가족의 재탄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그 과정이 정말로 아프고 씁쓸하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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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박경민 옮김 / 한겨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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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종, 성별, 교육 문제 등 당시만해도 파격적인 이런 문제들을 함께 다루고 있어서 화제가 되는 소설일까? 지금이야 의문을 품을 수도 없는 문제들임에도 그 시대상으로 보면 충분히 획기적인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문학 작품으로서 이 책의 가치는 이해를 못하겠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을 수 밖에 없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의문을 제기하고, 소재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문학으로서의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이랬다, 저랬다. 동전의 양면 같은 마음이다) 워낙에 성장 소설은 좋아하지 않았거니와 이제 와서 이 책 조차 읽지 않았다는 압박감에 읽었던터라 책장을 넘기기가 더 힘들었을지도.

이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이다. 여주인공 스칼렛이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 받을 때에는 진보주의 교육관이 미국에 한참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듀이 대시멀 교수법을 따르고자한 스칼렛의 선생님은 스칼렛이 이미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데에 반감을 드러내는 식으로 작가는 진보주의 교육관을 가진 교사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이 발표된 것이 1960년. 마침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에 미국이 공황상태에 빠져 본질주의 교육관으로 전환하려고 할 때였다. 1960년 당시에는 진보주의가 실패한 교육철학으로 여겨졌기 때문일까? 진보주의 교육관에 대해 너무 적나라하게 불만을 드러내고 있어서 놀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부분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지만.

소설의 초반부에는 스칼렛과 그의 오빠의 생활을 담고 있고, 중반부에는 인종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부래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인종차별, 남녀차별이 심하였고 소설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흑인은 단지 피부색이 검기 때문에 핍박받았고, 여자이이는 숙녀가 되기 위해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던.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흑백 갈등이나 남녀차별이 그때만큼 심하지 않고 racist라는 말이 미국 내에서는 가장 큰 욕이나 악담으로 여겨질 만큼 인종차별은 가당치도 않는 세상이 되었지만 분명 사회 도처에서 그런 일들이 전연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당 대표란 작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식석상에서 룸살롱 자연산 발언을 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근로 환경이나 처우만 보아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다문화 가정, 교육, 양육, 노인복지, 탈북자 정책 등 아직도 해결하고 타협할 할 문제들은 산재해 있는데... 사회적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일들까지 합한다면 까마득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이 넘으면 뭐하겠는가. 뉴스를 보면 나오는 게 한숨이요 나라 돌아가는 모양새가 왜 요모양 요꼴인가 싶은데. 그러면서도 당장 내 피부에는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 문제들이니 화만 버럭 낼 뿐 주저주저하고 만다.
100년 뒤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이 되어 있겠지만 그때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는 제 3자의 고통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 친구에게 빌린 1992년 첫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당시 번역 문장이 지금과는 달라서 그런지 문장 중간중간 막히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다른 역자의 책은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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