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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서울이라는 도시,
회사원은 늦잠을 자고 교인들은 기도를 하고
연인들은 사랑을 속삭이며 누군가는 축구공을 찬다.
막 몽정을 시작한 사내아이들이 강가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것도,
강바닥을 흘러다니던 시체가 홀연히 떠오르는 것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눈을 꼭 감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알몸의 남자.
그는 오랫동안 물밑을 떠돌고 있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 말이 없다. 아직은...
가벼운 연애소설이나 감성 에세이와 어울릴 것 같은 정이현이라는 작가가 가족 소설을 썼다고 한다. 두 번이나 사회적 인사의 상실을 경험하고 감정적으로도 힘겨웠던, 그리고 2008년 금융대란의 여파가 아직 걷히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던 2009년에는 심리학 책이나 엄마를 찾는 소설-<엄마를 부탁해>라던가 <도가니>와 같은-이 빠른 속도로 밀리언셀러 기록을 돌파했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가족 소설이라기에 가족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 예상했는데(어쩌면 그런 듯 싶기도 하지만) 한 가족에게 생긴 미스테리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정이현의 미스테리 소설은 약간 의외다 싶었지만 이번 책을 통해 작가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해낸 듯한 느낌도 든다.
한강을 표류하는 시체. 표지를 넘기고 본문을 읽어들어가려 할 때 처음으로 만난 문장이다. 요 근래 읽은 책이 <편집된 죽음>, <보이A>, <위대한 개츠비>, <셜록홈즈> 등 죄다 살인이나 자살, 죽음이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가 없는지라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찾다가 '정이현'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저 반가이 손에 들었는데, 맙소사 또 시체라니... 첫 문장부터 ‘이게 뭐야’ 하고 탄식할 수 밖에 없었지만 살인, 죽음이라는 소재 보다는 조금 멀리, 그렇지만 긴장의 끈은 놓을 수 없는 상태에서 책은 의외로 단숨에 읽혀진다.
정이현의 소설은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 두 번째다.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네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앞으로 꼭 챙겨 볼 작가 목록에 정이현이라는 이름을 추가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고, 한 두해 지난 후 단편집이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단편 소설을 읽지 않는 취향상 그 책은 pass.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나는 정이현 작가의 소설.
그러고보면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도 평범한 듯 하면서도 조건 좋아보이는 남자 영수가 거짓 영수였다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긴했었는데 이번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각자가 하나의 영수이고, 이 가족은 영수들의 집합체이다.
표류하던 시체에서 가족의 이야기로 건너온다.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김상호, 화교 출신의 어머니 진옥영, 상호와 전처 사이의 아이 은성, 혜성 그리고 터울이 큰 막내 딸 유지. 서래마을 고급 빌라에 거주하고 남들이 보기에 꽤 그럴듯한 모습의 가정을 꾸리고 있는 이 가족에게 겨울의 기운이 마음껏 활개치는 2월의 어느 일요일.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막내 딸 유지가 행방불명 되면서, 이미 오래전 금이 가 있던 유리창의 파편들이 아슬아슬하게 끼어있던 가족이라는 틀에서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이다.
유지가 사라진 일요일, 아버지 상호는 사업상 약속을 위해 외출하고 어머니 진영은 친정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옛 연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대만으로 간다. 첫째 은성은 남자친구와 틀어지면서 자해를 하고, 이 소식을 듣고 혜성은 누나 은성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유지가 홀로 집에 남아 있던 그 날,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누구도 유지가 집안에 홀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에 신경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몇 시 즈음에 어떤 차림을 하고 누구와 함께 집 밖을 나섰는지도 알 수가 없다. 상호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인 딸아이의 행방불명 사실을 경찰에조차 알리지 못하고 사립 탐정을 고용해 조용히 수사할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네 명. 상호, 옥영, 은성, 혜성은 서로 품어온 비밀이 들킬새라 전전긍긍하며 유지의 부재에 자책하고, 이런 네 사람 각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 그리고 마침내 이 네 명이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면서-상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옥영이 집을 떠난 그날 누구를 만났는지, 은성과 혜성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무관심으로 포장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있다고 혹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여기고 있던 이들은 가족이 되어 서로를 돌보게 된다.
거짓 영수처럼 거짓 인생을 살고 있던 네 명의 가족이 다른 한명의 구성원의 사고로 인해 대화와 관심으로 서로를 알아가면서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이니 이것도 일종의 상처 치유를 통한 ‘가족의 재탄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그 과정이 정말로 아프고 씁쓸하고 안타깝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