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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작은 거짓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정말 오랜만이다. 마지막으로 읽었던 이 작가의 책이 무엇이었던가 기억하기에도 까마득할 정도이니...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신간이 나오는 족족, 한 권 나올 때 마다 한 번도 아니고 아주 여러 번 읽고 또 읽고 닳고 닳도록 읽었었는데 어느 순간 이 작가의 문체가 질리기 시작하더니, 매번 그 캐릭터가 그 캐릭터에, 세상사 달관한 듯 내 일도 내 일이 아니고 네 일도 내 알바 아니다 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주인공들 모습에 신물이나 어느 때인가 부터는 일본 소설 읽기 자체를 뚝 끊고 말았다.
그러다 최근에 에쿠니 가오리 신간 소식을 접하면서 달콤한 제목에 이끌려 주말에 커피 한 잔 하며 오랜만에 그냥 그런 분위기 한 번 느껴보자 싶어서 책을 골랐는데-정작 책은 평일 출퇴근 길 지하철에서 그리고 미용실에서 무겁게 파마롤을 머리에 말은 상태에서, 마음도 머리도 심란하고 복잡한 때에 읽었지만- 책장을 채 몇 장 넘기지도 않았을 때부터 참 한결같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이러기도 쉽지 않을텐데. 이 작가의 글은 참 변함이 없다. 좋은 의미로든 좋지 않은 의미로든.
“사람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 혹은 지키려는 사람에게.” (p.196)
소설은 결혼 3년차인 테디베어 작가 루리코와 평범한 회사원 사토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워낙에 말 수가 적고 내향적이었던 루리코에게 사토시는 온화한 웃음과 넉살좋음으로 다가와 그녀가 기어코 결혼을 선택하도록 했지만, 함께한지 3년이 된 이들은 수다쟁이 아줌마가 된 루리코와 표현력이 급격히 저하된 무뚝뚝한 아저씨 사토시가 되어버렸다.
외형적으로는 누가 보기에도 행복하고 금슬 좋은 부부인 이들이지만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저녁을 먹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게임에 몰두하는 남편 사토시, 작업실이기도 한 그들의 집에서 종일을 보내다 퇴근해 들어온 남편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기를 갈망하는 아내 루리코는 3년차 부부의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 루리코는 자신이 만든 테디베어를 여자친구에게 사 주고 싶다며 만나게 된 하루오와, 사토시는 대학시절부터 자기를 따르던 여자 후배인 시호와 또 다른 남자, 여자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안정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외도하는 남녀.
밖에서 취하는 달콤함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더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시크릿 가든> 마지막회를 보고 그대로 틀어두었던 SBS 채널에서 다큐멘터리로 본 한 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때는 너무도 사랑하여 평생 함께 하기 위해 결혼했지만 결혼 5-6년차가 되면서 집안에서는 단 한 마디의 말조차 나누지 않던, 대화하다 보면 입씨름 뿐이라 입을 꾹 닫고 있다던 남보다 못해 보이던 부부. 결혼 전에 그들 또한 진심을 다해서 사랑했다고 하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은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라 情으로 산다고들 하는걸까. 깊게 오래도록 하는 사랑도 물론 있지만,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소설 속 남편 사토시는 아내 루리코에게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모성애를 더 느끼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루리코가 제공하고 있는 아늑함 때문일 뿐 본인은 전혀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어찌보면 루리코야말로 보살 중에 보살이 아닐까 싶다. 퇴근 후 저녁 먹고 일어나면 자기방에 들어가 문걸어 잠그고 노래 틀어두고 게임이나 하는 남편이라니. 너무 끔찍하잖아.
결론은, 사토시가 나쁜놈이다.
루리코를 외롭게 만든 것도, 결혼 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시도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도, 시호에게 애매한 행동을 보인 것도. 이 네 사람의 관계에 최초 원인 제공자인 사토시. 이런놈이 제일 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