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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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악이라는 말이 있다. ‘짐짓 악한 체한다라는 뜻으로 보통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논할 때, ‘성선설이나 성악설처럼 타고나길 선하거나 악하지, 부러 악한 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며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좀처럼 본심을 파악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정치나 사건·사고에서는 때때로 빛과 그림자처럼 위악이 필요한 예도 많아졌다. 조선 후기만 보아도 노론의 영수이자 정조 독살설에서 유력 용의자로 치부되었던 심환지가 나중에 발견된 어찰로 인하여 사실은 정조의 뜻대로 정국을 움직이도록 협력했던 자로 밝혀진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풍조는 사회 계급의 위로 올라갈수록, 해당 국가나 시대의 정세가 불안정할수록 더욱 복잡하고 치열해진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역사를 평가할 때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시간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인물이 행동한 명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민주화 운동 대목이 그러한 부분이요, 당대에는 오랑캐에게 굴욕스러운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 축출의 한 가지 명분이 되었던 광해군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지나며 기록이 사라지고, 조작되고 도덕 기준이 변하여도 꾸준히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들도 있다. 미합중국의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은 무능한데다 부패했고 사생활도 깨끗하지 못해 역대 대통령들을 놓고 인기 투표를 시행하면 항상 최하위에 든다고 한다. 우리는 역사도 길고 그만큼 수난의 세월도 장장(長長) 하니 한국사에서 최악인 지도자를 뽑으라면 1, 2위를 두고 다툴 사람도 많다. 특히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은 실리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에게 다소 황당해 보일 수 있기에 조선시대 왕들은 심심찮게 불려 나오는 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차치한다 해도 변호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는 법이다. 먼저 숭정제처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그리고 구하고 있는 명장을 스스로 위기에 빠뜨린 선조가 있다. 근대화 노력은 했다지만 권력욕에 비해 능력이 심히 모자라 중요한 시점에서 나라를 일제강점기에 접어들게 만든 고종도 종종 거론된다. 특히 인조는 청나라의 침공을 앞두고 반정으로 추대된 사례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호란을 자초한 치명적 실책을 무수히 보였으며 며느리인 민회빈강씨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훗날 효종의 정통성 문제와 예송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오죽하면 선조보다도 최악의 왕이라고 비판받을까? 사실 선조는 몽진과 그 자신의 시기만 제외하면 긍정적 평가의 여지라도 있지만 인조는 백성들의 생활은 생활대로, 나라의 위기는 위기대로, 그 와중에 권신들의 횡포는 감싸주는 암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인조 재위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으로 정점을 찍는다. 여기에 자신이 아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좋아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인조를 존경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조 1636>은 그러한 왕과 전쟁에 대하여 조선뿐만 아니라 명과 청, 그리고 인조반정이 성공하기까지의 전후 관계를 연도와 지도, 사료를 들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필자는 가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 위키 페이지에 접속해 역사 인물의 행적을 눈으로 좇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일반인들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역사를 가볍게 읽기 쉽도록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자의 재미와는 별개로, 인조가 펼친 정치는 위급한 상황에서 너무나 태평하고 정세를 모르는 아둔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백성들 대부분이 죽거나 전리품으로 전락해 타국의 병졸들에게 농락당하는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의 호란을 겪어가면서도 친명 배금을 찾는 모습이나,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리기 이전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기까지 하는 행태는 좋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권력에 대해 집착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읽는 내내 인조 시대 권력층처럼만은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심어주었다. 앞서 언급했던 선조와 영조는 단점이 두드러지어서 그렇지, 그들이 저지른 일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른 방면에서는 잘한 일도 있어서 그들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렇지만 인조는 정치적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정책에 대한 명분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왕이나 그 밑의 요직에 있는 신하들이나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비겁하게 움직였다. 정치적 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술하면서 득보다는 실이 컸고 권력 유지를 위한 명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자신 대의 왕 자리를 지키려다 추후 자신의 아들, 손자 대까지 위태로워지는 무리수였다. 어쩌면 우리는 현재에 태어나 그런 지도자로 인해 고통받지 않고 편안하게 교훈을 얻을 수 있어 다행인지도 모른다.

  흔히 인조와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어느 한쪽이 치달으면 다른 한쪽은 최악으로 묘사되며 시소처럼 위아래를 오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왕뿐만 아니라 만백성이 그 시대의 증인 아니겠는가. <인조 1636>은 인조가 왕이 되는 계기에서부터 전개를 시작하지만 정작 인조보다는 각 전쟁과 사건의 배경과 그를 접한 사람들의 행위, 그리고 거기에 얽혀있는 이해타산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특히 1등 반정공신인 김류와 이귀는 이 책에 인조와 비슷하게 주목받고 있으며 반정에서 앞장서는 역할을 맡았지만 2등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모함까지 받아 그것을 실행해버린 이괄의 난에 대해서도 판세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어떠한 책을 좋아하게 될 때는 독자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이를테면 고전으로 유명한 <오만과 편견>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엘리자베스에게 시종일관 차갑게 대하던 다아시가 그녀의 충고로 개심하고 그녀를 위해 몰래 노력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사실을 기술하는 역사 서적이라도 다를 바 없다. 인간이란 무릇 감탄고토가 본능인 생물이라 몇백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후손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거나 보통 인간이라면 보이기 힘든 충절을 보여 마음을 울리지 않는 이상,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다 하더라도 쉽사리 좋아하거나 존경까지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지도자라 하더라도 보수적인 시대에 태어나 이런저런 제약 속에서 정책을 펼치고 살아가야 했으니 재미있는 대목을 찾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재미있는 부분을 선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모든 페이지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김류의 아들과 손자가 행한 방탕과 패륜 등은 내 안에 잠자고있던 애국심이 울게 만들었으나 그들의 행실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기회가 되었다. 인조 역시 거시적으로는 이후 조선이라는 국가 앞에 막중한 분기점을 놓았으나 누구나 한 번쯤 리더를 꿈꾸는 현대 사회에서 반면교사가 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의 모든 부분을 사랑한 이유는 제목과 달리 이 책의 스포트라이트가 백성들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세종대왕이건, 정조 치하건간에 울고 웃는 사람은 있었다. 그 극적인 희비는 대부분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내고 힘 없는 자들이 겪는다더욱 슬픈 사실은 우리 민초들의 이러한 삶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소명되기는커녕 조명받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내가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에서처럼 <인조 1636>은 권력 앞에 밟히고 누웠던 수많은 사람을 기억하고 불러준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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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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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바랜 듯한, 그러면서도 전혀 흐려지지 않은 사진 속 두 여자가 있다. 그 시절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고전적인 머리 모양을 한 서구의 소녀와 가까운 곳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중년의 여성.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지은 소녀와 다르게 중년의 여성이 지은 표정은 정확하지 않다. 웃는 것이라기엔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한 긴장이 그에게 서려 있고, 비극적인 상황이라기엔 그들의 모습이 그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과도 느껴져 말을 고르기 어렵다.

  <사나운 애착>을 읽는 매 순간 내가 느꼈던 방향 잃은 분노와 혼란스러움은 이 책의 표지처럼 모호한 색을 띠고 있다. 원래 감정에 둔한 편이라지만 고닉이 회고하는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는 생각보다 극렬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또 평온함이 이어지지는 않다만 책을 덮으며 처음 느꼈던 감상은 사납다기보다는 갈피를 잃은 듯하네였다. 보편,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녀 관계를 모르겠으니 더욱 짐작이 가지 않았다. 끊임없이 고성이 오가고 시간을 질질 끌며 서로에게 더욱 상처입히기를 갈망하는 싸움의 반복은 바다 건너 이곳,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본인 자신도 뭐가 잘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심 이러한 관계를 내려다보듯 우월감을 느끼며 본 부분도 있다. ‘우리 모녀 관계는 달라. 우리는 점점 나아지고 있어.’ 혹은 겨우 이런 걸 갖고 방황이라고 한다는 거야? 엄마를 욕하지만, 딸도 어느 쪽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글쎄, 작가 자신이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류와 내적 갈등이 모녀 사이를 오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몇 세기를 앞서 살았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의 이야기이건 쉽게 몰입하는 나에게 이 책은 시종일관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 보여 달갑잖은 존재였다. 자전적 소설이어서 그런 걸까? 독자를 고려하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자신의 잠재적 욕구와 내면을 성찰하는 데에 치중한 작품이어서? 여성과 모녀 관계에 관한 연구와 분석이 저자가 살았던 때보다 늘었음에도, 그로부터 유의미한 심리 효과나 사회적 배경을 도출해낼 수 있었음에도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평온함을 가장한 냉소를 지었다.

  그러나 과연 나는 정말 고닉과 그가 생각한 애정, 모녀 관계에 대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관찰했나? 책장을 넘기는 내내 누군가의 삶과 방황을 경멸하고 비웃고 저렇게 살진 말아야지. 더 나은 삶을 살 거야.’라고 다짐했으면서도 돌아서서 내가 얼굴을 맞대고 웃고 우는 엄마 또는 자매들과 비슷한 대화를 반복한다.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만다. 고개를 주억거린다. 사나운 애착은 형태만 다를 뿐, 우리 모두에게 깃들어 있다. 그렇게 돌이켜보면 그 모든 부정적인 태도가 사실은 자신을 향해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시에 고닉이 그 숨 막히는 순간, 변치 않을 것 같던 애정에 스스로 질려가던 모든 순간에 자신에게만큼은 얼마나 솔직했는지를 느낀다. 자신의 변덕스러움과 야망, 게으름과 결핍에 대한 인정은 한 발 내디디면 되는 쉬운 일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구축해놓은 굳건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나아지고 인기 있는 머리 모양이 변해도 한 집 아래 두 여자의 관계는 변치 않을 것이다. 한쪽은 소리치고 다른 한쪽은 침묵 속에서 반격할 말을 차곡차곡 개는 이 행위들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반복되겠지. 책을 더듬더듬 읽어나가며 고닉이 헤매는 삶의 거취를 좇다 보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떠오른다. 순전히 관계와 갈등이라는 점에만 치중한다면 말이다. 이게 정확한 표현인지, 더 나은 비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속에서 읽은 부자 관계는 항상 빛나 보였다. ‘감정 쓰레기통이나 애증이라는 단어는 떠올릴 가치도 없다는 듯, 친한 친구 사이에서나 오갈 굳건한 신뢰가 둘을 묶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모녀 관계를 표현한 작품들, 내 현실과 주변의 관계 양상들을 지켜보며 단순히 유대감으로만 뭉쳐질 수 없는 이 숨막히는 사랑을 떠올렸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을까. 남성들이 만들어낸 체계에서 약자이자 성모, 매력적인 파트너로 남아있기 위해 애쓴 나머지 가장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서로에게는 내보일 것이 초라한 자신밖에 없었던, 정제되지 않은 원초적 자아의 표출구였나. 혹은 사랑만 있다면 증오는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아주 순수한 애정 관계 아니었나.


이 안정적인 관계는 언제 휘발될지 모른다. 어쩌면 끊임없는 변화, 유동적인 상태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진실이 아닐까 한다.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요 인생의 신비와 약속을 관통하는 진리가 아닐까. - P311

그 순간은 갈등과 만용만이 가득했다고 할 수 있다. 엄마는 당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해하고 있진 못했다. 사실 엄마는 교육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졸업했을 때 교사가 안 되어 있자 엄마는 마치 사기라도 당한 표정을 지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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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독립운동 열전 1~2 - 전2권 독립운동 열전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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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들으면 보통은 시간과 기록, 기억에 관한 상투적인 대답이 들려오기 일쑤이다. 사실 틀린 건 없다. 정답도 없고.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친숙한 사물 하나에서도 수백, 수천 가지의 새로운 의미와 개념이 도출될 수 있는데, 하물며 추상적 단어인 역사의 의미를 찾는 것이야 쉽겠는가. 그러나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 학생뿐만 아니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여러 가지 공인 시험, 자격증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살면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한국사를 시험 과목으로써 마주한다. 그리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달 암기하거나 수포자처럼 과감히 역사를 등지는 쪽을 선택한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느끼는 자신의 한계와는 다르게, 엄연히 우리가 그 구성원으로서 살아 숨쉬는 역사에 대한 중요성은 여기에서 우리가 풀어나가는 문제집의 한 장처럼 얄팍하게 변해버린다.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과 어려운 존재라는 의미는 엄연히 다른 뜻이다. 심지어 어렵다는 이유로 역사나 사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았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지극히 단편적인 행동을 하는 작금 세태를 관찰하다 보면 역사에 대한 무지가 초래한 결과는 두려울 정도다. 이제는 암기 과목으로서의 역사만 떠올리는 시야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삶이자 죽음, 원한이자 미스터리였던 흐름 자체의 역사를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독립운동 열전> 시리즈는 이러한 의미에서 특히 우리나라 사람에겐 감히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성역화된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파헤친다.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살인이 있었고 국권회복운동이 어떻게 추락했는지, 망명과 암살,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주어진 거금과 관련된 습격, 그 배후로서 등장하는 어느 의병투쟁의 거목에 대한 충격적인 서술이 이어진다. 1권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중심으로, 2권에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주목하여 독자에게 능동적으로 당시에 대하여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에 역사에 대하여 주체적·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학생이나 성인들에게 추천하기 좋은 도서라고 느꼈다. 그중에서도 내게 큰 충격을 주었던 대목은 1권의 김립 암살 사건과 15만원 사건에 대한 기록과 자료들이었다. 학생일 적, 역사 강의를 들을 때 선생님께서는 조는 아이들을 위해 비밀을 알려주듯 역사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야금야금 꺼내어 들려주셨다. 당연히 독립운동가 사이의 내분과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지역, 신분 차별 등 차이로 인한 독립운동의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디어에서 내세운 캐치프레이즈 그럼에도 정의는 승리한다!’처럼 그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이라는 큰 뜻 앞에서 화해나 용서를 나누었을 줄만 알았다. 동시에 그런 그들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경계와 어려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대립의 근원을 분석한 글을 이해하며 이해나 공감이 결여된 단편적 시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오만을 내포하고 있는가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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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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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액자 속 세상과 액자 밖 세상과의 경계를 짐작하기 어려워 길을 잃기 쉬운 피그먼트 프린트(Pigment print) 작품이다. 작품과 교감하는 사람들을 4차원의 시공간에서 농락하듯, 뿌연 안개 속 세상을 카메라에 담은 민병길 작가의 <질료들의 재배치(안개)>는 작품을 처음 보게 된 지 2년이 지났지만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나를 놔주지 않고 있다. 과거처럼 몇 가지 색을 만드는 데 제약이 따랐던 것도 아니고, 이렇게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도 무심코 흑백의 세상에 눈길을 뺏기고 만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각자 좋아하는 색을 꼽아보라 하면 갖가지 색이 등장한다. 타오르는 불처럼 새빨간 색, 어느 여름 바닷가에서 마주한 파랑. 물론 흑백도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색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상은 골라잡을 수 있는 뷔페 같아서 그들의 마음에 저마다 잊지 못할 이미지를 남긴다.

  색채의 마술사, 막상스 페르민은 그런 이미지와 색상 간의 관계에 집중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은 승려의 아들 유코가 하나의 진정한 시인이 되기까지, 또 그런 유코가 눈먼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예술에 색을 입히는 과정을 배워나간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단순한 단편에 불과하지만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가 동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 역시 우리의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하얀 눈이 무엇을 담고, 어떤 의미로 거듭나는지 겨울밤 눈 내리는 소리처럼 조용히 전개된다.

  처음 나는 이 책을 접하며 상당히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소설이지만 시처럼 함축적이었고 이야기지만 실존했던 인물이 등장했기에 상당히 종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어릴 때 처음 장갑을 끼고 눈을 뭉치려다 번번이 흩어져버려 실패한 것처럼 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읽어나가는 사이에 혹여 이전 부분이 녹아 없어지진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었다. 몰입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흥미진진하다거나 손에 땀을 쥐게 한다기보다 하나의 모래시계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함에 언제 시간이 지나가는지 무심코 세어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아직도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여하간 눈으로는 유코의 의식을, 신비로운 여인을 좇으며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내 안에서 새고 있는 그 무언가를 걱정하게 되었다.

  한때는 나도 시를 써보려고 애썼던 적이 있었다. 계절의 변화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포착해 한 편의 글로 남기고자 했었다. 안타깝게도 글 무덤만 남겼지만 말이다어떻게 보면 앉아서 글만 쓰는 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시가 어떤 예술보다도 어렵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걱정되었다그래서 더욱 유코가 시인의 길을 택해 어떤 결말에 닿을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소세키 선생과 니에주(Neige)가 지나온 길을 답습할까? 그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할까? 멀리서 눈을 보면 매우 푹신해 보이지만 그 밑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위험하다. 니에주가 돌아간 길은 그런 위험이 내재한 예술이었다. 소세키 선생은 그녀의 모습을 재현하기를 반복한 끝에 실명하게 된다. 설맹증의 일종이겠지만 소세키 또한 니에주처럼 위험한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위험이 그를 찾아왔으리라 짐작했다. 그런 그에게서 배우며 사랑을 알고 잃는 경험을 한 유코가 그들 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쩌나 염려했다. 하지만 이 작품이 결과보다는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여주듯, 나도 유코가 결말에서 어떤 삶을 택했는지는 차치할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이야기이다.

  아슬아슬한 불안감과 사랑에 대해 포근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모순적인 작품이지만 작가에게 붙은 수식어를 고려해볼 때, 이처럼 색을 잘 연상시키는 작품이 더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다. 같은 세상에서 눈을 뜨고 감건만, 어떻게 그만 이렇게 강렬한 색을 뽑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그가 작품을 쓰지 않으면 그가 보는 세상을 볼 수가 없을까? 나는 책을 읽다가 그 답을 찾았다. 그러고 보면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잖은가.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도 다채로운 색의 세상에 파묻혀 살아 마음의 눈이 멀었는지도 모른다.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여인과 그에게 닿기 위해 눈부신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소세키처럼 무언가에 닿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시인이 되기 위해 마음에 색을 입히는 훈련을 했던 어느 청년은 그것이 자신의 색이 아님을 알아야 했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그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서로 사랑했다. 줄 위에 머물러 있었다
눈으로 지어진.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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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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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책을 고를 때면 이리 재고 저리 재기 시작했다. 치솟는 물가 때문인지, 아니면 어느새 변해버린 나의 시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어릴 때의 그 순수한 눈으로 책을 고를 수만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설보다는 문제집과 경제서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으며 어쩌다 흥미를 끄는 제목에 발걸음이 멈춰도 쉽사리 손이 나아가질 않는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지 않게 된 나는 어느새 세상의 모든 소식에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뿐만아니라 미디어가 의도한 혐오와 증오를 착실히 내뱉었으며 고작 10분 남짓한 영상조차 집중하기 힘들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빨리 감기]를 연타하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의 나는 이런 어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니, 될 가능성은 열어 두었으나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 손으로 생을 마감해 추한 몸뚱이를 세상에서 치워버리자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으니, 9살의 내가 이 모습을 본다면 놀라다 못해 뒤로 넘어갈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누구도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상상하지 못한다. 행복한 가족을 꿈꾼다고, 명문 대학을 나와 승승장구하는 출세 가도를 걷기를 원한다 해서 우리 또한 그 빛나는 세상 속에 바로 합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그래서 더욱 기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은 모두 그 꿈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지속된다. ‘플라세보 효과가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니만큼 희망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황 시운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이런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의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너무 솔직한 나머지 어머, 뭐야? 구역질 나게!”라는 말을 누군가의 귀에 들리도록 서슴없이 내뱉고 술에 취해 함부로 폭언을 내뱉으며 시비를 거는 형편없는 우리 세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에 거창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아니니 긴장할 필요 없다. 꿈속에라도 나올법한 몽환적인 표지를 바라보다 보면 순수한 호기심이 일어, 책을 집어 들게 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펼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고개를 파묻고 몰입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책이건 영화건 어떤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것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차단한다. 혹여 줄거리나 감상에 방해가 되는 중대한 스포일러를 접하게 될 때에는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처음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한동안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온 똥을 뭉개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린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작가의 절망과 무력감, 깊은 슬픔이 방어할 새 없이 내게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저마다의 아픔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 아픔을 글로 표현한 수기들을 제법 읽었다고 생각해왔지만, 이 작품을 접하고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또 오만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의 일기>라던가 <지선아 사랑해> 같은 수필들을 읽으며 장애에 대해 너무 순진한 시선을 가져왔다. 장애가 있다면 그에 따르는 고통과 차별, 혐오가 가져온 슬픔이 있기 마련임에도 이를 담담히 풀어내는 사람들을 보며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글을 쓰며 얼마나 걸러진 아픔이 있을지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기계적으로 읽기만 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쳐 지나간 구절들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지금에 이르러 공감에 대한 잘못을 깨닫게 된 것일까.

  각각의 작품이 가진 개성과 매력이 있겠지만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산문집으로서 가진 특징을 꼽자면 단연코 그 첫 번째는 내 것처럼 생생히 전달되는 흡입력이다. 사고 이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과 달라진 신체를 어찌하지 못하고 장애와 씨름하는 삶, 그리고 달라진 세상의 대우를 접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상에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으나 아직도 이런 무지함과 편견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사회일 줄은 몰랐기에 더욱 자신과 사회 모두가 수치스러웠다. 휴식 시간을 갖기 위해 책을 들고 카페로 들어왔지만, 작가의 달라진 눈높이를 따라다니는 동안 세상이 너무 야속해 쉴 새 없이 고개를 쳐들기에 십상이었다. 책을 읽다 갑자기 한숨을 푹푹 쉬고 홧김에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본 어느 손님 때문에 바리스타와 다른 손님들은 차를 마시다가도 그 손님을 흘끔흘끔 훔쳐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 나타난 고통은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읽는 것조차 쉽지 않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제 손으로 할 수 없어 엄마의 도움을 받아 연명하는 삶, 더 나아가 부모조차 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하게 된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끝없는 절망 등. 폭풍처럼 몰아치는 삶의 고달픔이 물귀신처럼 작가의, 그 시선을 함께 보고자 하는 독자의 두 다리에 붙어 있다. 언제나 같은 괴로움이 찾아온다면 차라리 기대라도 하지 않고 바위처럼 견뎌내려는 엄두가 나겠다만, 똥이 인생을 뒤흔드는 이유가 될 거라고는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것처럼 작가는 사고 이후 한순간에 연약한 아이가 되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타인과 함께 해야 하는 삶은 그 누구보다 끈끈한 삶이 될 수도 있지만 타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한동안 쉽게 벗어나지 못할 혼란과 두려움, 그로 인한 움츠러듦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영장류의 왕이니 어쩌니, 했으면서, 그 인간은 다른 동물이라면 여의찮을, 때때로 우리 인생에 갑자기 튀어나온 돌멩이 같은 사소함에 심하게 앓는다. <그래도, 아직은 봄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남들만큼만살길 바라면서 그 범주에 흠은 포함되지 않는다. 작가는 사고를 겪기 이전에야 비로소 스스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냈다. 그 성공이 너무 기쁜 나머지 달밤을 즐기고자 했을 뿐인데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삶이 불공평하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비단 신체뿐만 아니라 성별, 빈부, 국적이나 인종 그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이루어져 있고 돌아간다. 누군가는 삶이 무료해 미칠 지경이라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나도 만족하지 못해 퇴폐 향락적 행락에 절어 살아가는데 그 십분의 일 만큼을 바라는 누군가에겐 아무리 발버둥 쳐도 좀처럼 세상에 빛이 들지 않는다. 삶은 아름답지 않지만 살아가야 하므로 사는 것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세상은 비겁하다. 결함이 있다면 그 결함을 보완해나가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가장 약한 가난한 사람, 차별받는 사람, 장애인들과 같은 약자를 먼저 밀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장애인인 사람과 함께하려는 사람들까지 그 ''을 넘으라 명령한다이 책은 그런 세상의 모순을 작가의 눈으로 첨예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극적이지도 문학적 가치가 있었는지도 않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 본인을 조금씩 치유해 다시 스스로 다독일 수 있게 해준 책이라 했다.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본분을 다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 아닐까.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너무도 차가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앞으로 걸어 나가기로 했다.



사람이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던져져도 적응하라고 그 안에서나마 작게라도 즐거움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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