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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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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이 지랄맞은 이유는 제법 살만하다고 느낄 때쯤 뒤통수를 거하게 치기 때문이다. 부유하든, 똑똑하든, 아무리 신중하고 착한 성격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그 법칙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 뭔가 보이거든 손을 드세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건드리지도 마시고요. 손을 드세요.

 워커는 죽은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가장 친한 세 친구 중 하나의 동생이었다. 사고였다. 하지만 시체로 발견되었고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장 예뻤던 스타는 주점에서 노래를 불렀고 워커가 사랑했던 마사는 변호사가 되어 고향을 등졌다. 빈센트는 그 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워커는 이제 서장이 되어 자신의 병과 싸우며 스타와 아이들을 다독이고 빈센트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준비해놓기도 하며 마을의 시시콜콜한 일들을 (효과는 없지만) 해결하려 노력하는 그저 그런 경찰일 뿐이다. 빈센트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워커는 그와 관중석에서 맥주를 마시고 미식축구를 보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지만 절친한 친구가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원했던 건 워커뿐이었을까? 스타가 총에 맞아 죽고 빈센트는 다시 구속되는 처지로 돌아간다. 스타가 죽게 되던 순간, 빈센트와 스타 외에 그 장소에 존재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그건 충격을 먹고 기억을 잊어버린 아주 어린 아이 로빈일 뿐이다. 한편, 스타가 죽기 전 딸 더치스는 그동안 가족들을 위협해온 다크의 사업장에 불을 지르고 cctv 비디오를 훔쳐버렸고, 미혼모가 경제적 곤란을 겪으며 아이들과 살아가는 곳에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은 너무 많았다. 워커 외에는 모두 빈센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더치스는 홀로 다크가 진범이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사실일까?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미웠던 것은 다크도, 빈센트도 워커도 아닌 더치스였다.

언제나 어른들의 심기를 건드려 나쁜 아이로 낙인찍히게 만드는 더치스의 헛발질이 보기 힘들었고 무법자랍시고 내세우는 허세도 역겨웠다. 그런 감정은 책을 펼쳐서 소녀의 불행이 나열되는 내내 지속되었다. 소녀만 미운 건 아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 소녀의 동생도 거추장스러웠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네 명의 어른들이 하는 행동이 모두 답답하고 싫었다. 모두가 피해자였고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살아가려고 애쓰는 동안 하등 도움되지 않았던 나는 독자라는 위치에서 쉽게 그들을 재단하고 경멸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야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항상 이성적인 자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기를 들어야만 했던 소녀를 어째서 그런 삐딱한 시선으로밖에 볼 수 없었을까. 방황하다가 강도에게 습격당하고 다시 재기하려나 싶을 때쯤 엄청난 손실을 기록해 다시 약에 빠져들고. 이건 빈센트나 워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이야기였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써 내려간 이야기여서 그런지 이 소설은 사람이 늪 바닥에서 허우적댈 때의 기분을 아주 잘 느끼게 해준다. 타인이 모두 적으로 보이고 모든 말이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 인생의 수많은 고난들 중 남들은 헤매지 않을 간단한 문제조차 더 악화시키고 마는, ‘병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 말이다. ‘병신상태의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때로는 최악이 될 선택을 하고 만다. 나는 그런 병신상태, 작가가 다시 약에 손을 대고 할아버지 댁에서 로빈이 겨우 안정을 되찾으려는 순간에 그 할아버지가 총에 맞고 다시 악몽이 재현되는 쳇바퀴 속에서 이 책을 읽었기에 도저히 이 모든 수렁의 끝에 완전히 행복한 결말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로빈이 죽거나, 소녀가 누명을 쓰거나, 아니면 진짜로 희생자를 만들고 감옥에 가거나 다크에게 놀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녀의 발악은 더운 여름날 사람에게 달려들었다가 땅에 떨어진 날벌레를 신발로 짓이길 때 느껴지는 기분나쁜 감각으로밖에 와닿지 않았다. 나는 이 느낌을 잘 알았다. 내가 받아왔던 경멸과 혐오로 나는 어느새 나를 보고 있었다.

 이렇듯 교양보다는 욕설이 어울렸고 화사한 긴 생머리보다는 부스스하게 막 묶은 머리가 더 편안한 삶이었다. 뿌듯함보다는 수치스러운 경우가 훨씬 많았고 그럴 때마다 베갯잎을 적셔가며 내일은 꼭 죽어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살아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린 내 곁에 죽고싶을 때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는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가깝거나 내 인생을 바꿀 거대한 도움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도움들이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여겼던 워커의 도움이나 막막해보였던 핼, 무심한 듯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줬던 돌리, 계속해서 밀어내도 언제나 곁에 되돌아오는 상냥함이 되었던 토머스 노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이야기를 꾹 참고 끝까지 함께할 수 있게 해주었던 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도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또한 지나가리라같은 수박 겉핥기식 위로 따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이겨냈다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게 아니라 진짜 시궁창을 살아내서, 마침내 빠져나오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야말로 그가 생각한 진짜 위로가 아니었을까. 내 삶은 사랑받는 공주님이나 잘 진열된 인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삶이기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굳은 살도 배겼으리라. ‘가난한 아이의 욕심은 용납할 수 없지만 부잣집 공주의 생떼는 사랑스러워 보이는어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어떤 순간에는 그 날선 눈빛이 더치스가 들었던 돌보다도, 그렇게 해서라도 날을 세우려하는 것보다도 어찌나 날카롭고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예리한, 때로는 동정을 가장해 속에 꽁꽁 숨겨야만 하는 저열한 악의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의외로 삶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 지탱한다. 아이들을 지켜주려던 어느 무능한 경찰의 고집, 그저 희생하는 길 밖에 몰랐던 남자의 침묵,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 회색 말... 그 보잘 것 없는 것들로도 삶은 살아진다. 그러니까 뻔한 이야기가 되더라도 우리 사랑을 나누자. 그깟 호의라고 비웃음 살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야 할 곳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아직 바로잡을 수 있어."
빈센트가 말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빈센트가 일어섰다.
"난 30년이나 늦어버렸는걸." - P65

소녀는 자기가 잃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그리고 동생이 얻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울었다.
더치스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동생에게 작별을 고했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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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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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표지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자연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이 나왔던 적은 중학생 때 수련회로 간 성산일출봉 이후로 거의 10년 만이었다. 누군가는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가 결코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저 조용한 풍경 속에 생명의 보고와 위험이 숨겨져 있는 웅장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그 말대로 위험을 품은 아름다움이기에 그렇게 감탄하게 되는 것일까?

 이곳의 배경은 표지 속 그림처럼 섬마다 흐르는 시간이 다른 산골짜기의 어느 지역. 여느 산골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골짜기 마을들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이곳에는 큰 특징이 있다. 바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비슷한 섬들이 있는데 이러한 섬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이나 구성만 조금 다를 뿐, 마을마다 하나씩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실 이 마을들은 모두 같은 마을이면서 다른 마을이다. 열여섯 살의 오딜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마을들은 20, 40, 60년 후가 지났을 때를 살아가고 반대로 서쪽에 있는 마을들은 같은 주기로 그 전을 살아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래와 과거가 공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만큼,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상실을 바로잡거나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 현재의 선택을 바꿔나가는 등 마을과 시민들의 존속에 치명적인 사건을 일으킬 수 있기에 마을마다 경계에 철책을 세우고 헌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으며,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문기관이라는-이곳에서 정부 기관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곳에 청원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다른 마을에 방문해야 하는 정당한 근거를 토대로 신청하고 그 신청이 접수되어야만 가능하다,

 곧 졸업을 앞둔 열여섯 살을 살아가고 있는 오딜은 절친한 친구가 시내로 이사를 간 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조용한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 일상이라는 것이 비록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거나 수다를 떨 때, 조용히 벽에 기대어 풍경을 바라보거나 점심으로 싸준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시간을 때우는 등 다소 고독한 종류의 것이었지만 오딜은 그 일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일상은 오딜이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앙리의 공이 그의 안전한 울타리를 깨부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리와 톰이 일부러 혼자 있는 오딜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녀가 움츠러들 만한 곳만 노려서 공을 맞히고 있었다. 오딜은 운동장 한쪽에서 선생님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으며 아이들이 자신이 놀라는 광경을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눈물을 참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오딜이 영원 같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마음속으로 수십 번 다짐하던 때에, 먼 곳에서부터 나뭇가지가 날아왔다. 알랭과 에드메였다. 곧 알랭과 에드메, 조와 쥐스틴과 어울리게 된 오딜은 많은 일을 겪게 된다. 좋아하는 아이와의 추억이 단둘만의 기억으로 남길 바라기도 하고 부유한 아이의 가정에 초대받아 그들의 생활을 잠시나마 엿보기도 하며 수영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재며 여느 소녀들과 같은 존재가 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 사회적 평판과 보장된 미래, 행복에 대한 희망은 에드메가 죽으면서 깨어지기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라는 노래가 있다. 영화 <장화, 홍련(2003)>의 막바지에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모든 일의 윤곽이 드러나고 수미가 과거를 회상할 때, 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새엄마와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집을 뛰쳐나오고 마는 장면에서 그 잘못된 선택에 대한 비극성을 고조시킨다. 대부분 결말까지 보고 나면 사실 그동안 영화에서 보았던 수연과 은주는 수미의 다른 인격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시간의 계곡>을 끝까지 읽고 난 후, 나는 이 작품에서 에드메가 죽은 이후로 등장한 서른여섯, 쉰여섯의 오딜이 모두 그녀의 다른 인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주인공의 이름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연출되는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오딜은 주인공 오데트가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왕자가 잘못된 맹세를 하게끔 악마가 보낸 딸의 이름이며, 오데트(Odette)라는 이름 자체가 오딜(Odille)의 애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이후 흐름이 폭포의 흐름처럼 쉴새없이 급변한다는 점이다. 에드메가 죽은 후 오딜은 그동안 에드메의 행적을 보고하고 그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였던 자문관 심사 프로그램에 아예 출석하지 않아 최악의 형태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딸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투영했던 오잔 부인은 딸의 멍청한 선택에 크게 실망했을 뿐 아니라 그 후로 아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오딜이 직업을 구해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조부모의 집에 들어가 살아야 했을 만큼 냉랭한 태도를 고수한다. 그 후로 오딜은 헌병이 된 이후로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나 동료 병사로서 출세와 먼 길을 걷는다. 그렇지만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기도 하고 나름대로 일에 적응해 이 직업을 택한게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고 느낄만큼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한 청원인이 손녀를 보고 올 수 있게 데려다주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형편없는 모습으로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오딜은 충격에 자신의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레몽의 제안대로 장사빌을 찾아가 장교로 임관하겠다고 지원한다. 가정폭력을 당하다 다른 섬으로 가서 과거의 자신을 말리기 위해 탈출하려는 옛 동기(자문관 심사 프로그램 탈락자)를 제압하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녀를 놓치지만 레몽의 도움과 그의 거짓 보고로 이를 기회삼아 장교 임관 후보자 중 선두에 서게 될 정도로 출세에 가까워지는 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그뿐만 아니라 일정한 직업을 갖추지 못하고 떠돌이 사냥꾼이자 일용직 일꾼으로 전락한 알랭을 만나 그에 의해 더러운 평판을 얻고 좌천하게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순식간이다. 단순히 이렇게 빠른 변화만으로 오딜이 그녀의 환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집중한 부분은 에드메의 죽음 전과 후로 변화되는 작품의 흐름, 묘사 방식, 주인공의 심리 등 그 모든 것이다. 1부에서는 소녀였던 오딜의 섬세한 감정과 복잡한 고뇌, 혼란스러움이 자세히 묘사되었다면 2부는 마치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스릴러와 서스펜스)을 읽는 것처럼 수많은 사건과 속셈이 오딜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부정한 방식으로 수습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모습보다는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그에게 선택을 종용하듯 드밀어지고 잠깐의 고려 끝에 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반복된다. 물론 현실에서도 어른이 되며 녹록치 않은 사회에 적응하느라 염세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하긴 하긴 하지만 2부에서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인형극에 사용되는 꼭두각시처럼 보일 정도로, 기묘하리만큼 자아를 잃는다. 마치 인물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인물을 이끌어간다 해도 좋을 정도로 오딜은 착실히 비극을 향해 끌려간다. 자신의 심리보다도 타인과 선택이 미칠 영향을 무감하게 바라보고 그 일련의 과정이 모두 생각하는 시간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처럼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선택이 반복되는데,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마다 그 선택 이전까지 그가 열심히 고려해왔고 우선시했던 가치는 그 선택이 얼마나 오판이었는지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양 쉽게 버려진다. 지나치리만큼 주인공에게 거리감을 두고 흘러가는 작품의 서사와 기술,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는 독자는 오딜에게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가까이에서 바라봐왔던 오딜로부터 급속도로 멀어지며 의아함을 느낀다. 마침내 작품 말미에는 이 세계관 전체에서 벗어나 이 골짜기와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나누는 기준 중에 역할이 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을 주동 인물(주인공)’, 작중에서 주인공과 갈등을 빚거나 그 흐름을 방해하는 인물을 반동 인물이라고 일컬으며 그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결정, 그리고 작품이 진행될수록 어떤 결말에 처하는지 등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그런데 1부와 2부의 흐름, 그리고 2부에서의 오딜과 그녀가 결말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다른 자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완전히 객관적인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묘사하는 입장이며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관찰하는 자신이라면 2부에서의 행동이나 정신없이 교차되는 독백, 좀 더 정확히 묘사하면 자신 앞에 놓인 사건이나 인물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과거나 미래에 더 중점을 두고 이루어지는 오딜의 독백과 행위가 이해되는 셈이다. 애시당초 작품은 에드메와 오딜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의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데에 비중을 그리 두지 않았고 오로지 오히려 오딜의 관점에서만 진행되어 독자들은 오딜이 자신을 바라본 시점에서밖에 그녀를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2부에서의 오딜이 실존하는 인물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나? 반대로 그 미래들이 모두 실존했다 한다면 과거로 돌아가 에드메를 살려내고도 행동할 수 있었던, 열여섯의 자신과 마주치고 총에 맞는 죽음을 맞이한 찰나의 오딜은 누구인가? 열여섯의 오딜은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자신이 한 선택과 결과를 감당하기 위해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다. 그 결과로 태어난 다른 자아는 [자동] 버튼을 설정해 놓은 로봇처럼 서른여섯, 쉰여섯이라는 분기점을 맞아 다른 자아를 갖출 때까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과 결과들을 연결 짓지 못하고 분리하여 관성적으로 살아왔다. 작중 자주 강조되는 개입은 곧 절멸이다라는 법칙이자 구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생각해 보라. 우리가 선택한 결과 태어나는 우리가 우리의 다른 자아라면 그 선택을 번복하고 바로잡게 될 때 사라지는 것 또한 그 쉬운 선택에서 태어난 쉬운 우리일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잘못된 선택에 대한 일종의 우화라고 느꼈다. 작중 내내 오딜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에게도 같다. 우리는 시간을 오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곳과 이곳 모두 공통점은 있다. 우리가 내뱉은 말과 하기로 결심한 선택을 되돌리기는 몹시 어렵다는 점이다. 이처럼 잘못된 선택은 그 순간부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잡고 흔든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선택은 곧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가고 몰아치는 선택과 경험을 하는 나는 오직 하나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수백, 수천 가지 과거와 미래, 그때 닥친 문제들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한 가지의 현재가 하잘것없어 보일지 모른다. 당장 이 순간에는 그 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잘못과 절망이 에드메를 살리는 결말로 이끌었듯, 우리에게 닥친 물결이 바다로 나아가는 데 등을 밀어줄지도 모른다면, 그렇게 믿는 낭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더 오랜 세월을 슬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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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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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미국에서는 대중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표차로 트럼프가 재선되었다. 워낙 극단적인 정책을 내세우기도 했고 혐오에서 오는 결집력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만큼 사람들은 그가 재선되기까지 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는데, 의외를 넘어서서 충격적이기까지 한 결과가 나오자 다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먼 곳을 보지 않아도 당장 우리나라의 상황 또한 계엄령이 해제되고 법원이 점거당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이에 항거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상황이기에 결코 안정된 시국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폭로와 발견의 연쇄 쇼크에서 흥미로운 점을 한 가지 살펴보면, 그들의 집권 과정에 공정하지 못한 공작이 이루어졌음은 명확하나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까지 완전히 0에 수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보수 진영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알려진 태극기 부대60대 이상 유권자들의 여론 조사를 살펴본다면 오히려 연령대별 유권자 비율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투표율까지 높은 노년층이 보수정당에 확연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교과서에서,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도덕규범과 법이 자정 기능을 상실한 모습을 보이고, 우리를 전혀 보호해 주지 못할 것처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인터넷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 성악설에 대한 주장이다. 어느 개인이 겪은 불이익에 대한 사연에서부터 희대의 악인으로 비치는 인물을 다룬 방송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함을 역설할 만한 근거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그러한 악에 대하여 손가락질하고 선을 준수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보이면서 그 도덕심이 누가 보아도 약자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근거 없고 원색적인 비난으로 유명하다는 네이버 뉴스가 꼭 아니더라도 장애인·여성·외국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는 유튜브 영상의 댓글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당연하지 않은 혐오 발언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우리가 배웠던 정의와 선이 현실 사회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은 항상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법을 준수하고 약자를 배려하며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는 규칙들은 사실 빛 좋은 개살구였나? 왜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그 당연한 규칙들을 우습게 여기며-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정의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행동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행동하려 할수록 내게는 선비충’, ‘진지충같은 호칭이 덕지덕지 붙여졌고 나는 차츰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배우며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으로부터 재미없고 당연한 소리만 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가 안타깝지만 마음은 더 상쾌했다. 그리고 그렇게 입을 다물고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조차 사회생활과 위계질서라는 이름 아래 열심히 웃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을 돌아볼 때면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상한 걸까? 너무 예민한 걸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내가 바랐던 정의로운 어른, 다음 세대를 위해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선배 시민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에서는 교과서처럼 말한다라는 비웃음 섞인 괴짜 취급에 어느새 나는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동물농장> 속 벤저민처럼 변해있었다. 그런 생각이 절정에 달할 때가 작년 겨울이었다. 잠시 집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2주간 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겼던 나는 그곳에서 기대치 않게 책을 추천받았다. 정중하되 이 책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확신이 실린 눈빛을 보자 평소 잘 읽지 않던 책인데도 자연스럽게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니까, 뒷일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좋아하고 옳다고 믿는 것을 자유롭게 권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 만남은 그 뒤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내 책 편식을 고쳐준 것도 이러한 낭만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렇게 펼쳐 든 것이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지금은 거울이 그려진 표지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상처 입은 흑조를 여러 마리의 백조가 외면하는 샛노란 표지였는데 그만큼 일상에서 약자로서 차별받았을 때의 기분을 잘 표현한 그림이 없어 나는 지금도 그 표지를 제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표지 또한 책의 일부이자 활자 속에서 만나게 될 주제를 가리키는 표지(標識)라 생각하기에 책을 고를 때 표지를 다소 중요시하는 편인데, 이 책의 표지는 책을 읽기 전에 보아도 내용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고 책을 읽고 나서 볼 때에는 그동안 열거되었던 사례들 속 약자가 처한 환경을 다시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해 책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눈에 아른거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 책의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차별을 얘기하면 역차별을 먼저 꺼내는 사람, 평등과 형평 그리고 공정을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 차별을 웃음 소재로 사용하여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고는 웃었으니까 동의한 거 아냐?”라고 당당하게 되묻는 사람은 물론이고,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장애인을 위해 다른 채용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불편한 권민우 변호사 같은 사람 그리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사우나에서 출입을 거부당했을 때 그것이 주인의 재량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우리가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친절하게 권하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내가 충분히 사회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가끔 이런 의문을 품는다. ‘왜 우리 사회는 외모나 연애, 결혼 같은 지극히 사적인 화제는 무례하다 싶을 만큼 쉽게 꺼내면서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 대한 고찰은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가령 인터넷에서는 퐁퐁남이라던가 간스유예기엔교 플필헤네카(간호사, 스튜어디스, 유학파, 예체능, 기독교, 엔피, 교사, 플로리스트, 필라테스, 헤어 드레서, 네일아티스트, 카페 사장)’이라는 근거 불분명한 비하 용어가 쉽게 오가면서 현실에서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려면 성차별이 만연한 한국 현실에 대해 아예 모른척하고 있어야 하는 현실 말이다. 비단 성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가까운 일본에라도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놀랐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처우는 굳이 멀리 찾아보지 않고 점자 블록의 관리 상태, 서울교통공사가 장애인 단체의 시위를 어떻게 대우하고 시민들은 이러한 대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슬픈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라도 인식하는 차별받는 소수자들은 차별에 차별을 거듭해 시민들의 눈에 보이는 곳으로까지 오게 된, 존재의 마지막 선에까지 서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거론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존재하는 명찰 색 차이의 문제나 예멘 난민의 입국(2018)을 앞두고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욱 강하게 반대하는 것, 우열반 제도와 같은 차별은 애당초 현재까지도 차별이라는 인식조차 희박하다. 그렇지만 이런 깨달음이 반가웠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비로소 차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특권은 가진 자의 여유이기에 내가 누린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p.28) 나는 그러한 특권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자 약자로서,-모순되게 들리겠지만-입체적인 인간으로서 어딘가에서 차별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 또한 차별의 주체가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당장 내가 완벽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만들지는 않아도, 지금 우리가 상호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구성된 사회의 약속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다. 이것이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계속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며 내가 그동안 찾아 헤맸던 목소리였다. 나는 객관적이고 믿을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가 겪은 것, 우리가 일삼고 있는 것이 차별이라고 말해줄 단단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여행지에서 만난 같은 성향의 사람, 그와 취미에 대해 나눈 대화보다도 우리가 공통으로 공유하는 이 보이지 않는 신념이자 목소리를.

 차별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논쟁이 뒤따라온다.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변화가 항상 반가운 사람은 없고 그 변화가 내가 가지고 있다는 인식조차 없었던 권리를 조각내어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처럼 보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나를 흔들었던 것은 나를 호의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주변인들조차 내가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마치 논쟁의 화두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단순히 낭만과 이상에 사로잡힌 치기 어린 젊은이로 보는 순간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인터넷에서 인상깊게 읽었던 댓글이 있다. 차별에 대해 살펴본 어느 기사에 달린 한마디는 네가 받는 불이익만 보지 말고 현실을 살아라!”였다. 몇 년 전에 본 거라 그 댓글이 기사 자체를 비판한 것인지, 기사를 옹호하는 댓글과 대립하며 나온 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뒤로도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차별을 분석하고 더 나은 방안이 필요하다는 뉴스를 볼 때면 그와 비슷한 말은 댓글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하는 건 공상에 불과한 낭만일까? 어쩌면 낭만이자 그저 이상(理想)으로 치부되는 그 선()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인간이라는 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선을 넘어버리는 때가 온다면, 그 선을 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제재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우리 대다수가 누렸던 이 평범한 삶이 특권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김수영 시인의 시 <달나라의 장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이 시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나는 황규관 시인의 해석을 좋아한다. 팽이는 험난한 현실에 처해있는 내게 환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한지 반대로 보여주며 설움을 터뜨려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만큼 팽이가 도는 걸 지켜보는 건 편하다. 달나라의 장난같이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내 현실과 정신과는 다른 이야기다. 만약 내가 팽이가 도는 것처럼 편한 길을 원한다면 너도, 나도 각자 알아서 돌면 그만이다. 평등이나 공정, 정의는 공통된 그 무엇이고 쉽게 보장받지 못한다.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대중에게 닿을 만큼 반복되어야 비로소 인식될 것이다. 그런 현실은 꼭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우는 것이 비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나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팽이는 계속해서 돈다. 이 시에서 그랬듯 그 서러운 현실을 보는 것보다 팽이를 보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그저 팽이를 바라보면 별세계로 빠져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별세계인가, 그저 팽이가 돌아가는 현실인가. 그리고 서러움이 존재하는 그곳이 그저 이상이자 낭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차별과 평등에 대해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문제제기를 할 만큼 순발력이 없다면, 그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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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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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나는 사마귀 제거 시술을 받았다. 콩알만 한 크기지만 그 위치가 하필이면 발바닥이라 일상을 보내는데 크게 애를 먹고 있는데, 가족들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이 크게 의지가 되고 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이런 일을 겪으니 자연스럽게 상처에 관한 한 가지 일화가 떠올랐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질문받은 적 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우리가 초창기 문명에 대해 떠올릴 때 흔히 연상하는 토기, 낚싯바늘, 석기 등을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한 그녀가 대답한 답은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였다. 미드는 이와 같이 덧붙였다. 만약 당신이 동물인데 다리가 부러졌다면 죽겠죠. 달아날 수도, 물을 마시러 강에 갈 수도, 사냥할 수도 없으니까요. 당신은 그냥 다른 짐승들을 위한 고기죠. 하지만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는 누군가가 그 사람이 치유될 때까지 곁에서 도와주었음을 나타내요. 누군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을 돕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에요.

 한 광고가 있었다. 한 쌍의 소년과 소녀가 매트리스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잠드는, 그야말로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광고였다. 그 일로 아이들은 굉장히 유명해졌고 둘의 부모님들은 각각 돈을 거머쥐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연예인이, 정확히는 화려한 스타를 꿈꾸는 사람이었고 본인의 능력으로는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딸을 통해 성공을 꿈꾸었다. 소년에게는 항상 일 벌이기를 좋아하지만 대부분 크게 말아먹는 아버지와 따스한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여성 편력과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하여 자주 싸웠다. 소년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집에서 키우던 천산갑들과 엄마, 둘만 있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다루기 쉬운 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싸우고 뜨겁게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괜찮아 보였던 소년의 어머니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어느 날,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을 떠났다. 그 뒤로 소년은 자라 남자가 되었다. 남자는 연예인은 아니더라도 세트장을 짓고 수리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생활했다. 그 과정에서 남자를 발굴했던 광고의 촬영 감독에게 제안받고 영화를 한 편 찍었다. 남자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울었고 마지막에는 우는 남자의 얼굴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며 영화가 끝났다. 그 영화는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았다. 한 편, 소녀는 어머니의 손길에 이끌려 연예계에 발을 담갔다. 그렇지만 어딘가 특출나게 도드라지는 특징이 없었기에 학업에 성실한 모습이라도 보여서 대중에게 친근한 스타가 되어야 했다. 소녀는 미디어에 노출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하는 물건으로서 여자가 되어야 했다. 그 방식은 강제였고 폭력이었고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과정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제법 자랄 때까지 살아남았다. 남자는 죽음에 연인을 빼앗기고 선을 넘은 결과, 좁고 불편한 단칸방에 갇히듯 살아가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 역시 버티고 있었다. 이 책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책을 소개하는 문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어린 시절에 함께 출연했던 영화의 회고전이 프랑스 낭트의 영화제에서 열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중년이 된 두 사람은 파리에서 재회한다.’  계기라고? 그건 장하이타오가 그랬듯, 그들의 노력과 그리움을, 그들의 우정과 유대를 외부에서 성별로만 피상적으로 바라본 뒤 얄팍한 단어 하나로 그 기나긴 역사를 압축해 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건 구실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소녀와 울음을 멈추지 못한 소년은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고 찾아다녔다. 둘의 삶은 항상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쪽이었다. 심지어 사랑조차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은 그들에게 행복보다 더 큰 죽음과 이별을 가져오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이라도 그 아픔에 공감해 줄 사람, 함께 울어줄 사람. 그 한 사람과의 이별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아물지 않은 아픔을 간직한 채 서로를 기다렸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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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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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번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군것질을 하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비밀에서부터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해주는 하얀 거짓말, 또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내는 용서받을 수 없는 거짓말까지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거짓말이 평화로운 일상을 가장한 수면 아래를 유유히 돌아다닌다. 처음 <맡겨진 소녀>를 읽었을 때, 이 책을 관통하는 것 또한 일종의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 속에 나타나는 모든 장면과 행동이 침묵에 대해 강조하고 있지만 글쎄, 거짓말은 입을 열지 않을 때도 가능하다. 누군가는 절제된 표현을 통해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에 매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거짓이 굳이 입을 여는 순간에 국한되지 않고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 도리어 입을 다문다고 해서 진실만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선함이라는 대외적 가면을 뒤집어쓴다면 얼마나 교묘한 거짓말이 태어날 수 있는지 알았다. 이 소설의 분위기는 대체로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그것은 어른들 사이에서 침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이다. 물을 긷고, 빠르게 달리며 소녀가 오롯이 모든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에야말로 몇 없는 평화의 순간이 지속된다.

  아이를 먼 친척에게 맡기며 본론을 바로 꺼내지 않고 경제, 물가, 날씨에 대해 빙빙 돌려 말하는 아빠. 자신의 아이를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남에게 맡기게 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것인지, 부러 집안 사정에 대해 부풀려 말하는 아빠. 그런 그의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용인해주는 킨셀라 부부. 아이는 자신의 부모님이 다른 가정에 비해 사정이 좋지 않고, 아이가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태어나며 이에 따라 자신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맡겨진다는 사실만 겨우 알고 있을 뿐이다. 아이가 킨셀라 부부의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을 때도 부부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하도록 돕고 소녀가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어른으로서 자리를 지켰다. 그들의 일상이 자리 잡아 갈 때쯤, 마침내 자신의 아이가 아닌 이 소녀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갈 때 입을 옷을 마련하기 위해 킨셀라 가족이 마을로 나가게 되며 소녀는 자신이 어떻게 그들의 집에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절대적으로 악하다거나 서로를 극렬히 증오하지는 않는다. 댄은 그저 자신의 살림을 감당하기 어려워 잠시나마 아이를 좋은 곳에 두려는 살짝 무책임한 가장이고, 메리도 자신이 압도될 정도로 아이를 많이 낳아서 각 아이에게는 소홀한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부족한 살림으로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애쓴다. 킨셀라 부부의 아이는 그저 개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들 부부는 딱히 소녀를 죽은 친아들의 대용품으로 삼고 싶었다기보다는 더 형편이 나쁜 친척에게 좋은 일을 해주려던 것뿐이었다. 밀드러드 역시 존과 에드나가 마이클을 추모할 여유를 주고자 겸사겸사 소녀를 돌보며 너무 많은 말을 뱉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들이 굳이 전하지 않은 각자의 속사정은 암초처럼 끈질기게 누군가의 침몰을 기다린다. 소녀는 그 복잡한 물길 속에서 정신없이 흔들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입기도,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물살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돌다가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발붙일 작은 섬을 하나 발견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그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거짓은 오래가지 않는다. 거짓 평화, 가짜 가족... 설령 그것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거짓이라 해도 쉽게 깨지고 마는 것은 정말 진실만이 옳은 것이어서일까?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서 포르투가 아저씨는 제제가 온전히 어른으로 자라나기 전에 기차에 치여 죽고 마는 것처럼 세상은 아이라고 해서 일시적 행복을 온전히 누리게 두지 않는다. 소녀가 집으로 돌아갈 시기가 다가오자 킨셀라 부부는 여전히 침묵하지만 그들의 분위기는 아주 절제된 슬픔을 담고 있다. 집으로 데려다 주는 순간에조차 소녀의 엄마와 아빠는 어딘가 모르게 변한 그들의 딸을 보며 킨셀라 부부에게 보이지 않는 날을 세운다. 그 모습은 마치 아직 어린 소년소녀가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지 않게 용쓰는 것 같았다. 메리와 댄에게도 소녀처럼 너무 순수해서, 어른들의 거짓말에 휘둘리고 상처입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은 거짓말하는 법을 배워 어른처럼 보이도록 꾸미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의 사연이 어찌되었든 간에 소녀에게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래서 소녀는 더욱 절박하게 매달린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영원히 멈춰있고 싶었다소녀가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호밀밭에서 서서 언제까지나 그 애를 잡아주리라.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 P17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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