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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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책을 고를 때면 이리 재고 저리 재기 시작했다. 치솟는 물가 때문인지, 아니면 어느새 변해버린 나의 시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어릴 때의 그 순수한 눈으로 책을 고를 수만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설보다는 문제집과 경제서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으며 어쩌다 흥미를 끄는 제목에 발걸음이 멈춰도 쉽사리 손이 나아가질 않는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지 않게 된 나는 어느새 세상의 모든 소식에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뿐만아니라 미디어가 의도한 혐오와 증오를 착실히 내뱉었으며 고작 10분 남짓한 영상조차 집중하기 힘들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빨리 감기]를 연타하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의 나는 이런 어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니, 될 가능성은 열어 두었으나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 손으로 생을 마감해 추한 몸뚱이를 세상에서 치워버리자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으니, 9살의 내가 이 모습을 본다면 놀라다 못해 뒤로 넘어갈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누구도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상상하지 못한다. 행복한 가족을 꿈꾼다고, 명문 대학을 나와 승승장구하는 출세 가도를 걷기를 원한다 해서 우리 또한 그 빛나는 세상 속에 바로 합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그래서 더욱 기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은 모두 그 꿈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지속된다. ‘플라세보 효과가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니만큼 희망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황 시운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이런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의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너무 솔직한 나머지 어머, 뭐야? 구역질 나게!”라는 말을 누군가의 귀에 들리도록 서슴없이 내뱉고 술에 취해 함부로 폭언을 내뱉으며 시비를 거는 형편없는 우리 세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에 거창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아니니 긴장할 필요 없다. 꿈속에라도 나올법한 몽환적인 표지를 바라보다 보면 순수한 호기심이 일어, 책을 집어 들게 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펼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고개를 파묻고 몰입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책이건 영화건 어떤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것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차단한다. 혹여 줄거리나 감상에 방해가 되는 중대한 스포일러를 접하게 될 때에는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처음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한동안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온 똥을 뭉개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린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작가의 절망과 무력감, 깊은 슬픔이 방어할 새 없이 내게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저마다의 아픔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 아픔을 글로 표현한 수기들을 제법 읽었다고 생각해왔지만, 이 작품을 접하고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또 오만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의 일기>라던가 <지선아 사랑해> 같은 수필들을 읽으며 장애에 대해 너무 순진한 시선을 가져왔다. 장애가 있다면 그에 따르는 고통과 차별, 혐오가 가져온 슬픔이 있기 마련임에도 이를 담담히 풀어내는 사람들을 보며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글을 쓰며 얼마나 걸러진 아픔이 있을지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기계적으로 읽기만 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쳐 지나간 구절들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지금에 이르러 공감에 대한 잘못을 깨닫게 된 것일까.

  각각의 작품이 가진 개성과 매력이 있겠지만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산문집으로서 가진 특징을 꼽자면 단연코 그 첫 번째는 내 것처럼 생생히 전달되는 흡입력이다. 사고 이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통과 달라진 신체를 어찌하지 못하고 장애와 씨름하는 삶, 그리고 달라진 세상의 대우를 접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상에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으나 아직도 이런 무지함과 편견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사회일 줄은 몰랐기에 더욱 자신과 사회 모두가 수치스러웠다. 휴식 시간을 갖기 위해 책을 들고 카페로 들어왔지만, 작가의 달라진 눈높이를 따라다니는 동안 세상이 너무 야속해 쉴 새 없이 고개를 쳐들기에 십상이었다. 책을 읽다 갑자기 한숨을 푹푹 쉬고 홧김에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본 어느 손님 때문에 바리스타와 다른 손님들은 차를 마시다가도 그 손님을 흘끔흘끔 훔쳐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 나타난 고통은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읽는 것조차 쉽지 않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제 손으로 할 수 없어 엄마의 도움을 받아 연명하는 삶, 더 나아가 부모조차 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하게 된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끝없는 절망 등. 폭풍처럼 몰아치는 삶의 고달픔이 물귀신처럼 작가의, 그 시선을 함께 보고자 하는 독자의 두 다리에 붙어 있다. 언제나 같은 괴로움이 찾아온다면 차라리 기대라도 하지 않고 바위처럼 견뎌내려는 엄두가 나겠다만, 똥이 인생을 뒤흔드는 이유가 될 거라고는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것처럼 작가는 사고 이후 한순간에 연약한 아이가 되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타인과 함께 해야 하는 삶은 그 누구보다 끈끈한 삶이 될 수도 있지만 타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한동안 쉽게 벗어나지 못할 혼란과 두려움, 그로 인한 움츠러듦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영장류의 왕이니 어쩌니, 했으면서, 그 인간은 다른 동물이라면 여의찮을, 때때로 우리 인생에 갑자기 튀어나온 돌멩이 같은 사소함에 심하게 앓는다. <그래도, 아직은 봄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남들만큼만살길 바라면서 그 범주에 흠은 포함되지 않는다. 작가는 사고를 겪기 이전에야 비로소 스스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냈다. 그 성공이 너무 기쁜 나머지 달밤을 즐기고자 했을 뿐인데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삶이 불공평하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비단 신체뿐만 아니라 성별, 빈부, 국적이나 인종 그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이루어져 있고 돌아간다. 누군가는 삶이 무료해 미칠 지경이라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나도 만족하지 못해 퇴폐 향락적 행락에 절어 살아가는데 그 십분의 일 만큼을 바라는 누군가에겐 아무리 발버둥 쳐도 좀처럼 세상에 빛이 들지 않는다. 삶은 아름답지 않지만 살아가야 하므로 사는 것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세상은 비겁하다. 결함이 있다면 그 결함을 보완해나가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가장 약한 가난한 사람, 차별받는 사람, 장애인들과 같은 약자를 먼저 밀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장애인인 사람과 함께하려는 사람들까지 그 ''을 넘으라 명령한다이 책은 그런 세상의 모순을 작가의 눈으로 첨예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극적이지도 문학적 가치가 있었는지도 않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 본인을 조금씩 치유해 다시 스스로 다독일 수 있게 해준 책이라 했다.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본분을 다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 아닐까.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너무도 차가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앞으로 걸어 나가기로 했다.



사람이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던져져도 적응하라고 그 안에서나마 작게라도 즐거움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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