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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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바랜 듯한, 그러면서도 전혀 흐려지지 않은 사진 속 두 여자가 있다. 그 시절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고전적인 머리 모양을 한 서구의 소녀와 가까운 곳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중년의 여성.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지은 소녀와 다르게 중년의 여성이 지은 표정은 정확하지 않다. 웃는 것이라기엔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한 긴장이 그에게 서려 있고, 비극적인 상황이라기엔 그들의 모습이 그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과도 느껴져 말을 고르기 어렵다.

  <사나운 애착>을 읽는 매 순간 내가 느꼈던 방향 잃은 분노와 혼란스러움은 이 책의 표지처럼 모호한 색을 띠고 있다. 원래 감정에 둔한 편이라지만 고닉이 회고하는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는 생각보다 극렬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또 평온함이 이어지지는 않다만 책을 덮으며 처음 느꼈던 감상은 사납다기보다는 갈피를 잃은 듯하네였다. 보편,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녀 관계를 모르겠으니 더욱 짐작이 가지 않았다. 끊임없이 고성이 오가고 시간을 질질 끌며 서로에게 더욱 상처입히기를 갈망하는 싸움의 반복은 바다 건너 이곳,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본인 자신도 뭐가 잘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심 이러한 관계를 내려다보듯 우월감을 느끼며 본 부분도 있다. ‘우리 모녀 관계는 달라. 우리는 점점 나아지고 있어.’ 혹은 겨우 이런 걸 갖고 방황이라고 한다는 거야? 엄마를 욕하지만, 딸도 어느 쪽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글쎄, 작가 자신이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류와 내적 갈등이 모녀 사이를 오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몇 세기를 앞서 살았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의 이야기이건 쉽게 몰입하는 나에게 이 책은 시종일관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 보여 달갑잖은 존재였다. 자전적 소설이어서 그런 걸까? 독자를 고려하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자신의 잠재적 욕구와 내면을 성찰하는 데에 치중한 작품이어서? 여성과 모녀 관계에 관한 연구와 분석이 저자가 살았던 때보다 늘었음에도, 그로부터 유의미한 심리 효과나 사회적 배경을 도출해낼 수 있었음에도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평온함을 가장한 냉소를 지었다.

  그러나 과연 나는 정말 고닉과 그가 생각한 애정, 모녀 관계에 대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관찰했나? 책장을 넘기는 내내 누군가의 삶과 방황을 경멸하고 비웃고 저렇게 살진 말아야지. 더 나은 삶을 살 거야.’라고 다짐했으면서도 돌아서서 내가 얼굴을 맞대고 웃고 우는 엄마 또는 자매들과 비슷한 대화를 반복한다.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만다. 고개를 주억거린다. 사나운 애착은 형태만 다를 뿐, 우리 모두에게 깃들어 있다. 그렇게 돌이켜보면 그 모든 부정적인 태도가 사실은 자신을 향해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시에 고닉이 그 숨 막히는 순간, 변치 않을 것 같던 애정에 스스로 질려가던 모든 순간에 자신에게만큼은 얼마나 솔직했는지를 느낀다. 자신의 변덕스러움과 야망, 게으름과 결핍에 대한 인정은 한 발 내디디면 되는 쉬운 일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구축해놓은 굳건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나아지고 인기 있는 머리 모양이 변해도 한 집 아래 두 여자의 관계는 변치 않을 것이다. 한쪽은 소리치고 다른 한쪽은 침묵 속에서 반격할 말을 차곡차곡 개는 이 행위들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반복되겠지. 책을 더듬더듬 읽어나가며 고닉이 헤매는 삶의 거취를 좇다 보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떠오른다. 순전히 관계와 갈등이라는 점에만 치중한다면 말이다. 이게 정확한 표현인지, 더 나은 비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속에서 읽은 부자 관계는 항상 빛나 보였다. ‘감정 쓰레기통이나 애증이라는 단어는 떠올릴 가치도 없다는 듯, 친한 친구 사이에서나 오갈 굳건한 신뢰가 둘을 묶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모녀 관계를 표현한 작품들, 내 현실과 주변의 관계 양상들을 지켜보며 단순히 유대감으로만 뭉쳐질 수 없는 이 숨막히는 사랑을 떠올렸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을까. 남성들이 만들어낸 체계에서 약자이자 성모, 매력적인 파트너로 남아있기 위해 애쓴 나머지 가장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서로에게는 내보일 것이 초라한 자신밖에 없었던, 정제되지 않은 원초적 자아의 표출구였나. 혹은 사랑만 있다면 증오는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아주 순수한 애정 관계 아니었나.


이 안정적인 관계는 언제 휘발될지 모른다. 어쩌면 끊임없는 변화, 유동적인 상태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진실이 아닐까 한다.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요 인생의 신비와 약속을 관통하는 진리가 아닐까. - P311

그 순간은 갈등과 만용만이 가득했다고 할 수 있다. 엄마는 당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해하고 있진 못했다. 사실 엄마는 교육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졸업했을 때 교사가 안 되어 있자 엄마는 마치 사기라도 당한 표정을 지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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