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고 진다. 피고 지는 일, 거기에 꽃의 매혹이 있다. 피었으니 지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피기도 어렵고 지기도 어렵다. 어느 한쪽을 꼭 택하라면 피기보다 지기가 더 힘들지 싶다. 시인들은 꽃이 피고 지는 일을 자연 현상 차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을 마음 속 작용 여하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고 보았다.

꽃이 시인을 미혹시키는 건 시인의 내면 표현을 대행해주기에 더 없이 좋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인의 마음에 섭정을 하거나 대리청정 하는 단 하나 사물을 세우라고 한다면 많은 시인들이 꽃을 천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동서고금의 시 가운데 피는 꽃의 절정과 지는 꽃의 비애를 기막힌 솜씨로 빚어낸 명편들이 숱하게 많다. 지는 꽃을 다룬 시 가운데 장석남 시인의 「길」(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년 초판1쇄)을 나는 우선으로 꼽고 싶다. 2연 9행의 짧은 시에는 “부드럽고 연한 상상”(최하림)의 특징이 잘 내포되어 있다.

       

장석남의 시는 발묵이 잘 된 수묵화를 닮았다. 섬세하고 담백한 마음결이 시에 담겨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는 힘주어 강조하지 않는다. 감정의 고조와 시적 긴장도 잘 표출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묘한 점은 부조화를 이룰 법한 시어들이 독특한 사유 방식으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시를 빚어낸다는 것이다. 독특한 발상과 표현이 시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나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도 하고, 그의 시를 사랑하게도 한다. 그의 시에는 일상어가 종종 등장한다. 특히 줄임말과 같은 입말은 친근성을 확보한다. 시인 자신만의 어조로 전개한 시를 읽다보면 내 심사까지 조용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만의 독특한 어법이다.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장석남 詩 「길」, 1연>

시인은 바위 위에 떨어져 있는 팥배나무 흰 꽃잎을 바라본다. 5월에 피는 팥배나무 꽃은 배꽃을 닮았다. 희고 예쁘다. 첫사랑 같은 꽃이다. 반면 열매는 배가 아닌 팥을 닮아 팥배나무라고 한다. 그러한 팥배나무 꽃잎이 바위 위에 떨어져 있다. 시인은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다고 했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했다. 설마 “하얀 꽃잎들”로 인해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까마는 시인에게만은 사실이다. 왜? 꽃잎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바위가 그 꽃잎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싶다. 그렇지 않다면야 꽃잎이 바위에 내려앉아 있는 동안 훤히 속을 보여줄 리 만무하다. 1연은 2연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한 가지 지닌 셈이다. 즉 “바위 위에 앉은”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에서 바위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이는 시인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바위 위에 앉아줌으로써 바위의 마음을 투명하게 한 것이다. 바위는 팥배나무 꽃을 흠모하였음이 분명하다.

조금만 더 확대해석을 해보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을 “바위”가 사랑하는 이로 대입시켜 보자.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유를 더 잘 알 것 같다. 어쩌면 시인은 이 시에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였던 이와의 추억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이처럼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바위 위에 앉아 있는 팥배나무 하얀 꽃잎들로 인해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표현은 기막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같은 詩, 2연>

지는 꽃이 지나온 짧은 궤적을 ‘길’이라고 표현한 시인은 장석남이 처음이지 싶다. 꽃이 지는 짧은 거리를 마치 먼먼 길처럼 말하는 그 속에는 참으로 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최하림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무목적의 꿈과 부재의 꿈의 그림자들”이라고 하였다. 꽃잎이 맺혔던 팥배나무 가지와 꽃잎이 져서 내려앉은 바위 사이를 걸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걸을 수 없는 길을 걷고자 하였으니 당연히 “부재의 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싶다.

어떻게? 이 시에서의 ‘길’은 단지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꽃잎이 내려오는 동안,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꽃이 피면서부터 시작하여 꽃잎이 바위 위에 내려앉기까지의 시간도 포함한다. 시공(時空)이 하나로 합치된 ‘길’인 것이다. 따라서 공간으로서의 길은 “다/ 걸어” 볼 수 없겠지만, 시간의 경과로 이루어진 추억 속을 걸어보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인은 팥배나무 하얀 꽃잎과 바위를 만남과 사랑으로 대체시킨다. 하얀 꽃잎이 바위에 닿았을 때를 사랑하는 이를 만나 이루어진 사랑으로 본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마음이 몸에, 마음에 와 닿았을 때 몸 전체가, 생애 전체가 온통 환해지는 느낌.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 시인은 그 순간을 본 것이다. 그러하니 “하얀 꽃잎”이 피어난 순간부터(사랑하는 이를 본 순간부터) 그 꽃잎이 바위 위에 내려앉기까지(나에게 와서 서로 사랑하게 되기까지) 모두 다 오가며 기억을 더듬고 추억해보고 싶은 것 아닌가. “길들”이라고 복수로 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꽃잎 하나하나를 모든 만남과 사랑으로 보았고, 그 사랑들을 다 알아보고, 느껴보고 싶은 것이었다.

시 「길」은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표제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과 함께 읽으면 좋을 시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서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라고 하였지만, 그 꽃나무는 사랑하던 대상이고, 그가 자리했던 내 마음 자리에서 그를 뽑아낸 일이다. 그러니 뽑아낸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은 당연히 아픈 일이다.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은 殘像들”만 남았기에 “죽은 꽃나무”이고, 이를 “뽑아낸 일”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은 통증을 유발한다. 그게 설사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말이다. 그러하니 어찌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설사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되는 게 아닐지라도, 또한 자신의 사랑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더듬어보는 것 자체가 “길들을/ 다/ 걸어보”는 일이 아니겠는가.

시는 고요하고 연하디 연한데,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다는 기막힌 표현 앞에 나는 화들짝 놀란다. 이것이 장석남 시가 지닌 매혹이지 싶다.

한 가지 더 짚고 가자. 2연의 “꽃잎들이 내려온” 구절은 1연의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다는 것과 자연스럽게 아귀가 맞는다. 바위는 다가가지 못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여기서 기다길 수밖에 없었고, 그 마음을 알아 “꽃잎들이 내려온” 것이다. 시인의 사랑도 그랬나보다. 그녀가 시인에게 다가온 순간, 시인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환해졌나 보다.

1연은 바위 위에 꽃잎들이 앉아 있는 모양이다. 2연은 파격적으로 행을 바꿔줌으로써 꽃잎이 내려오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한 행 한 행을 끊어가며 천천히 읽으면 꽃잎이 나리는 모습이 더 잘 연상된다. 행 하나를 가르는데도 그것이 가져올 효과와 절제가 요구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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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테일러의 <런더너>(최세희 역, 오브제, 2012)는 제목만 놓고 보면 충분히 낚일 법한 책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런던 관련 책을 꽤나 사 읽은 나 역시 제목에 눈길을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내용을 살펴보았으니 제목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이겠다.

‘파리지엔’이나 ‘뉴요커’라는 말처럼 ‘런더너’라는 말에 눈길이 한 번 더 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15쪽에 이르는 꽤 긴 ‘들어가는 말’을 읽고 나면 이 책이 독자를 낚기 위한 의도에서 ‘런더너’라고 제목을 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베이징의 10분의 1 크기에 약 300개 언어를 사용하는 750만명이 살고 있는 런던. ‘들어가는 말’만 놓고 보면 저자에게 런던은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도시가 자체적으로 날 밀쳐내고 있다고 느꼈다.”(14p)고 말할 정도이다.

      

     

언어소통이 자유로운 캐나다인이 그렇게 느꼈을 정도이니 의사소통이 불편하고 문화 차이가 큰 동양인에게 런던은 어떻게 다가오겠는가. 그러나 이 책은 그와는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저자가 왜 제목을 ‘런더너’라고 지었는지 이해가 간다. 저자는 “나는 한 번도 누가 런더너이고, 누가 런더너가 아닌지 구분한 적이 없다.”(22p)고 했다. 이는 진정한 런더너라면 “런던 토박이이고, 마리르보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태어난 존재여야만 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런더너에 대한 규정 대신 진정한 런더너를 만나려면 어찌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런더너를 정의하는 말들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한 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런더너라는 것이었다.”(23p) 저자 크레이그 테일러는 5년간 런던 전역을 돌며 200명의 ‘런더너’를 만나 인터뷰한 결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말을 내놓는 데 이르기까지 저자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3장에 걸쳐 18개의 테마에 85명의 인터뷰이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이란, 우간다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다채로운 일을 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 모두가 ‘런더너’이다. 그들 얘기를 들어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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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의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효형출판, 2012)를 읽다. 기대했던 것처처럼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한국전통건축에 접근한다. 서현은 건축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앞장서왔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효형출판, 2004), <건축을 묻다>(효형출판, 2009) 등은 많은 이들로부터 꾸준하게 사랑받아 왔다.

     

공교육의 전통건축교육은 추상에 가까웠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양식을 줄줄이 늘어놓고는 그것이 각각의 특징이라고 가르쳤다. 우리 공교육 방식은 머리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 '고차원적'이었다. 우리 건축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강요하다시피 가르쳤다. 시각 효과가 가미된 안정감의 미학 '배흘림기둥', 우리나라의 산 능선과 버선코, 궁체의 선조미를 닮은 '유려한 처마곡선', 이러한 말만 기계적으로 가르렸고, 그렇게만 배웠다. 이유와 타당성에 대한 질문과 다른 미학적 관점은 들어서볼 자리가 없었다. 20년이 지나도 되풀이해서 그렇게만 가르쳤다. 벗어나지도, 더 추가되지도, 새로운 해석이 가마되지도 않았다. 찬사만을 고스란히 외워야 했다. '민족적 미의식'이라는 말로 모든 해석의 근원을 삼았다. 그러니 예술과 문화를 보는 안목이 키워질 리가 있겠는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전통 건축 양식 변화가 생겨났으며, 그 양식의 차이에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건축미학이 들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당연히 가져보았을 법한데, 친절하게 가르쳐준 책들은 드물었다. 서현의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는 부제에서 암시하듯 그러한 근원적인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참에 건축 관련 도서 몇 권을 더해 놓는다.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에는 몇 가지 틀린 사실과 오자가 있었는데, 수정하고 가다듬어 재판이 출간되었다. <배흘림기둥의 고백 - 옛건축의 창조와 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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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다가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린 플레카드를 보면서 챙겨 봐야 할 전시로 찍어두었던 건축전시 <감응: 정기용 건축>(2010. 11. 12 ~ 2011. 1. 30)을 끝내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씨네 큐브 광화문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보면서 정기용에 대해 다시 더듬어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가 정기용은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2년 동안 전북 무주군에서 면사무소, 공설운동장, 납골당, 버스정류장 등 30여 개의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영화 제작노트에서 밝힌 것처럼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는 현대 한국 건축계에서 한 명의 건축가가 하나의 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공건축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랜 시간을 들인 우리 건축계의 사건이었다.”

   

정기용은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건축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내가 그의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열화당에서 나온 하싼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마을 이야기> 번역서이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났다. 가까이에서 뵌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고인이 된 작가를 회고하는 나의 방식으로 그를 읽는다.

인문과 자연의 향기를 담아내는 건축이 부재한 시대이다. 국토를 도륙내고, 흐름을 제 맘대로 바꾸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토목공사를 무슨 거창한 업적처럼 도배질하는, 그 권력자의 무지와 오만과 천박함에 역겨운 심사를 주체할 수 없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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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이지누는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2006)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본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하는 것보다 지니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진득하게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었으며, 나에게서 뚝 떨어져 나를 물끄러미 볼 수 있는 거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폐사지만한 곳이 없었다. 스쳐가는 사람들도 드물며 미술사의 눈으로 볼 것 또한 그리 많지 않은 그곳이 나에게는 곧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었으며 무문관(無門關)이었던 것이다.”

     

그는 폐사지, 그 독락의 선방에서 기다리고 기다린다. 진득하니 기다려야만 열어주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휑하니 다녀가서는 결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아름다움이다. 빛이 적어서 한없이 기다리노라면 셔터를 누를 수 있을 만큼의 빛을 열어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 컷 사진도 가져가지 못할 때도 있다.

기다림은 결코 사진을 찍기 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머리말대로라면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과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이제 폐사지 답사기 2권을 더하였다. 전남 편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알마)에 이어, 전북 편인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알마)가 그것이다. 이 책들 역시 행간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다. 땅과 바람 속에 묻어둔 독락의 흔적을 더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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